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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 사음수성독 (蛇飮水成毒)
<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 사음수성독 (蛇飮水成毒)>
중국 당대(唐代)에 우전국(于闐國) 출신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대방광불화엄경> 권12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 ―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들고,
사음수성독(蛇飮水成毒) ―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든다.
지학성보리(智學成菩提) ― 지혜롭게 배우면 깨달음 이루고,
우학위생사(愚學爲生死) ― (문자나 말에 얽매어) 어리석게 배우면 계속 나고 죽는다
(생사 고통만 커진다)고 했다.
지혜와 어리석음의 간격, 소(牛)는 지혜로운(智) 자를 말하고, 뱀(蛇)은 어리석은(痴.愚) 자를 말한다.
마신다(飮)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으로 배움(學)을 의미한다. 물(水)은 경전 또는 불법(佛法)을 말한다.
우유(牛乳)는 보리(菩提)를 의미하며, 보리를 이루면 해탈하고 무한생명을 이룬다.
독(毒)은 생사(生死)를 의미하며, 번뇌로 인해 업을 짓고 생사의 고통을 받는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불법에 대해 지혜로 배우면(智) 즐거움의 결과가 있지만, 어리석음으로(痴.愚) 배우면
괴로움의 과보가 있게 된다고 했다.
지혜로 배운다는 것은 불법에 대해 믿음을(信) 일으켜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어리석음으로 배운다는 것은
의심(疑)이 많아서 받아들이지 못함을 의미한다. 믿음이 있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실천해서 증득할 수 있다.
반면에 의심을 일으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을 키울 수가 없어 수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고통의 과보가 따르게 된다.
위의 글이 좋은 가르침을 주는 구절이어서 이후 여러 곳에서 이를 활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 스님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도
나온다.
「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 사음수성독(蛇飮水成毒) ―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들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든다.」는 이 말은 천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그대로 관찰되는 보편적 자연 현상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고정적으로 좋고 나쁜 것은 없다. 물은 우유도 되고, 독도 된다. 물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물은 물일뿐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이 없다. 원래 우유도 독도 없다. 만나는 인연에 따라 우유도 되고 독도 된다. 같은 물이라도 어떤 인연을 만나는가에 따라 그 쓰임이 달라진다. 이와 비슷한 말이 우리 속담에도 있다.
「같은 새벽이슬을 마셔도 벌은 꿀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
새벽이슬은 밤사이 하늘에서 내려앉아 생겼을 뿐인데, 놀랍게도 벌은 새벽이슬을 먹으면 꿀을 만들고, 뱀은 새벽이슬을 먹으면 독을 만든다.
똑 같은 것을 주어도, 똑 같은 것을 가져도,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는 수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한결같지만 그 작용은 개인의 습성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습성(習性)은 때로는 천성(天性)보다 더 강한 작용을 한다. 일단 몸에 굳어진 습성은 좀처럼 고치기가 어렵다. 그래서 공자(孔子)도 이렇게 말했다.
「타고나는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성에 의해 성품이 갈라진다.」
또 <법구경>에도 다음과 같은 비슷한 말이 있다.
「좋은 향을 가까이 하면 몸에 향기가 배지만 생선을 가까이 하면 몸에 비린내가 밴다.」
평소 가까이 하는 습관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 말이다. 착한 친구와 함께 하면 착한 사람이 되기 쉽고, 못된 친구와 함께 지내면 못된 사람이 되기 쉽다. 그래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도 있다. 비슷한 인간들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보고 듣고 배우는 습관을 향상케 하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해서 항상 진리를 가까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종경록(宗鏡錄)>에도 나온다. <종경록>은 중국 당나라 때 영명 연수(永明延壽, 904∼975) 선사의 저작으로, 여러 대승경전이나 인도와 중국 성현들의 어록을 발췌해 모은 것인데, 위의 이야기는 본래 유식학을 집대성한 무착(無着, Asaṅga, 310~390경)의 저술 <섭대승론(攝大乘論)>에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 송대의 원오(圓悟克勤, 1063~1135) 선사는 <벽암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이고 살리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칼을 갖고 있는 것은 오늘만이 아니다. 예로부터 지혜 보검은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수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살인검(殺人劍)이 아니라 활인검(活人劍)이라야 한다.
이는 칼이 수행자의 번뇌 망상을 단번에 자르는 도구임을 비유해서 한 말이다.
위와 같이 칼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살인검(殺人劍)요, 또 하나는 활인검(活人劍)이다. 살인검는 남을 해하는 칼이고, 활인검은 모든 생명을 살리는 칼이다. 살인검⋅활인검은 예로부터 선문의 풍습이며, 지금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살인검은 말의 길, 생각의 길을 끊어, 모든 것을 부정하며 궁지에 몰아넣어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활인검(活人劍)이란 긍정해주며 적극적으로 나아가게 해 깨닫게 하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거나 생기 넘치게 하는 선승(禪僧)의 예리한 역량을 칼에 비유한 것이다. 「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 사음수성독 (蛇飮水成毒)」을 연상시킨다.
‘칼’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칼’에는 검(劍)과 도(刀)라는 구별이 있다.
대부분 검이나 도나 비슷하다고 보는데, 한문으로 칼 검(劍), 칼 도(刀), 두 글자 모두 "칼"이란 번역하지만, 검(劍)과 도(刀)는 다르다. 검과 도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칼날’에 있다.
검(劍)은 날카롭고 날렵한 양날로 이루어진 칼을 말하며, 도(刀)는 무겁고 둔탁한 한쪽만 날이 선 형태의 칼을 말한다.
그러니까 검(劍)은 양쪽에 날이 있는 것으로 찌르기 용으로 만든 칼이므로 청월검(靑月劍), 천무검(天舞劍), 용화검(龍華劍) 등 유명한 양쪽 날의 검들이 많았다.
그러나 도(刀)는 한쪽만 날이 있는 베기 위한 칼이다. 그래서 우리가 식탁에서 사용하는 칼을 식도(食刀)라 한다. 삼국지의 관운장(關雲長)이 휘둘렀던 큰 칼을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라 하는데, 아무리 큰 칼이라 할지라도 날이 한쪽밖에 없으므로 도(刀)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검과 도의 차이는 크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로지 칼의 날로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가 군에서 총검술을 할 때 끼웠던 단검은 아무리 작아도 날이 양쪽으로 있으므로 검(劍)이라 했으며, 아무리 작은 칼이라도 날이 한쪽으로 있으면 도(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작은 칼이라도 단검(短劍)과 단도(短刀)는 구분이 된다. 마찬가지로 칼은 흉기도 되고 과도도 된다. 칼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고 의사가 칼을 쥐면 암을 도려내지만 강도에게 쥐어진 칼은 사람을 해칠 수 있다. 이는 한 칼이라고 해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하여 이러한 말들이 모두 「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 사음수성독 (蛇飮水成毒)」을 연상시킨다.
<법화경> 제5품 ‘약초유품(藥草喩品)’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수일지소생 일우소윤(雖一地所生 一雨所潤) ― 비록 한 땅에서 자라서 같은 비를 받아 크지만
이제초목 각유차별(而諸草木 各有差別) ― 모든 풀과 나무는 각각 차별이 있느니라.」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는 같지만, 소초(小草)⋅중초(中草)⋅대초(大草)⋅~ 삼약초(三藥草), 소수(小樹)⋅대수(大樹) 등으로, 풀과 나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차별이 있어 각양각색으로 자란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한 음으로 설법을 하셨지만, 중생은 근기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천차만별이다.
같은 상황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독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같은 상황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그 상황 속에서 기회를 보고 더 큰 가능성을 모색하고, 어떤 사람은 불만으로 보고 비관만 한다. 왜 그럴까? 차이는 상황 자체가 아니라,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 긍정적인 힘과 부정적인 좌절이 나타나게 된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인생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직접적으로 불쾌와 고통이 따르지 않는, 견딜 만할 정도의 한때가 주어진다면, 그것을 그대로 즐기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하면, 지난날의 좌절이나 미래에 대한 근심 때문에 찡그리고 현재를 어둡게 해서는 안 된다. 염려와 후회에 어느 정도 시간을 쓰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마음 아프더라도 지나간 일로 해두자, 아무리 괴롭더라도 울렁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자, 이것이 옳은 생각이다.
또 내가 바꿀 수 없는 미래의 일이라면 그것은 신의 뜻 가운데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라.“
「결국 행운의 본질은 상황이나 사물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달려있다.
행운이란 긴 눈으로 보면 누구에게나 공평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요행을 바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행운과 불운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으며, 한때 기적적으로 보이는 행운도 결코 그것이 항구적인(恒久的)인 행운이라고 확정하기는 어렵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상황이 궁극적으로 행운이 될지 불행이 될지는, ― 즉 어느 쪽을 향하여 나아갈지는 온전히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행운으로 이끌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방향일 것이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추는 것으로 시작해,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독이 아닌, 꿀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그 전환의 요소들은 온전히 내 안에 있다. 이것이 바로 행운의 본질이다. 행운이란 결코 우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