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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타리에서 오늘은 동구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오전 한두시간쯤 산책하듯 돌아볼 곳이 없을까 하고 길을 나섰다.
동인천 북광장으로 나오니 주변 공사와 문닫은 시장분위기로 훨씬 더 을씨년스럽다.
지하도를 나오자마자 중앙시장이 이어진다. 한때, 양키시장 또는 도깨비 시장으로 불렸던 이 곳, 한 때
인천에서 유명한 시장 중의 하나였던 곳이었는데 현재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순대국밥이 일품이었다는데 지금은 골목한켠 몇집만이 문을 열고 있을 뿐이다. 중앙시장이 흥할 때는 포목점이 많았으며, 지금도 한복가게로 그 명목을 잇고는 있는것 같았다.
길을 하나 건너 송현시장으로 발길을 이어갔다. 시장에서 순대를 사먹었는데, 싸고 맛있다. 송현시장은 리모델링을 해놓아서 그런지 비교적 깔끔했다. 이곳이라도 살아나야할 텐데....
송현시장을 따라 올라가니, 가파른 고개가 나타나고 그 끝에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하늘을 치솟고 있다. 그 아랫자락으로 송현동과 송림동 일대가 펼쳐진다.
수도국산의 원래 이름은 송림산. 주변 일대가 매립돼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는 바닷가의 조용한 소나무 숲이었다. 송현(松峴)동, 송림(松林)동의 지명도 여기서 비롯됐다.
그 가파른 언덕이 똥고개였던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일명 닭장집의 달동네까지 가기가 넘 힘들어 집까지 갈 수 없는지라 볼일을 보았던 그 언덕, 똥지게를 지고 그 벼랑 끝에 내다 버렸다고 해서 생겼다고도.. 똥차가 달동네까지 올 수 없어 호스를 끌다가 빠져 똥으로 잠겼었다는 이야기며,...똥고개에 얽힌 이야기가 수도 없이 이어진다...
그렇게 애들만이 아닌 어른도 좋아하는 똥이야기, 방구이야기를 하며 수도국산을 올랐다.
여기서 잠시 수도국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가기로 하자.
1883년 인천개항과 함께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하자 물부족과 함께 전염병의 만연으로 상수도 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1905년 2월 재인일본거류민 단장 토미타는 수도부설에 관한 간담회를 열고, 개항장에서 6km떨어진 문학산 계곡에 빗물을 저장하는 우수저수지를 건설하고자 했으나 용수량부족으로 무산되고 만다.
1906년 6월 대한제국 정부는 탁지부(국가재정전반을 담당하는 부서, 오늘날의 재정경제부와 유사)에 수도국을 두었으나 재정부족으로 수도사업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통감 이토오히로부미는 대한제국 정부에 관세수입을 담보로 일보흥업에서 1천을 대출받아 상수도 사업을 시행하도록 한다. 4년간의 공사 끝에 노량진 수원지는 1906년 11월 착공하여 1910년 시작하게 된다.
융희4년 1910년 10월 30일 통수식과 시범급수를 거쳐 12월 1일 급수를 시작하게 된다. 생산량 12,000톤, 송수량 9,000톤(인구7만명, 1일 1인 111.8리터)거리(노량진-인천)32.64km. 원래는 인천과 용산방면으로 통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인천방면의 공사가 빨리 진척되어 서울보다 인천이 일찍 급수가 개시된다. 바로 그 정수된 수돗물이 인천에 급수된 송림산 송현배수지였다. 1931년 당시 월 최저 12톤에 2원(당시 쌀1되에 20전)상수도 설치비와 사용료는 한국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수돗물은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배수지가 설치되면서 수도국산이 된 송림산은 1950년대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도시빈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으나 수도관 설비가 미약해 공동수도에서 물지게로 물을 날라야 했다.
수도국산 달동네. 수돗물을 곁에 두고서도 수돗물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곳, 이제 달동네로 유명하던 이곳은 재개발되어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2005년 문을 연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서 그 기억들이 후손들에게 호기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을 둘러쌓고 있는 송현근린공원 또한 철쭉이 한창여서 산책하기 아주 좋은 곳이며, 워낙에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한켠으로는 송현동, 송림동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며, 또 한켠으로는 그 옛날 명성을 날리던 만석동, 화수동 일대의 해안선을 따라 제강, 목재, 방직, 중공업 등을 위한 공장이 아직도 남아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재개발되어 산뜻하게 들어선 송현주공아파트 사잇길을 따라 15분정도 내려오면 화도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화도진 뒷 담벼락에서 화평동 평안의 집 그림그리는 할머니의 모습을 담을 수 있어 더욱 좋았다. 그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하고... 옛날에는 배가 드나들었다는 수문통을 지나고, 송현초등학교를 지나다 보면, 여기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민들레국수집과 함세덕극작가 내용은 '뉴스인'에서펌>
숨어 있다는 표현이 적절치 않게 꽤나 유명한, 국수는 팔지 않는 '국수집'이 화평동 길 건너 화수1동에 있다. 화도안로를 따라 가는 고갯길, 화도교회 교회 인근에 서영남씨가 2003년 4월1일 문을 연 '민들레 국수집'. 가톨릭 수사 출신의 서씨는 배고픈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곳이 아닌, 섬기는 곳으로 국수집을 열었다고 한다.
열 사람이 겨우 앉는 작은 식당에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150~3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찾는다.마침 민들레 식당을 찾은 날이 목요일(민들레 국수집은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을 쉰다) 3평짜리 가게에서 국수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18평짜리 가게에서 뷔페식으로 음식을 내놓는다.기업이나 정부의 후원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은 노력으로 8년간 국수집을 운영하는 작은 기적은 지금 공부방으로 승화하고 있다.
서씨는 민들레 국수집 홈페이지(mindlele.com)에서 "그냥 꿈일까 했는데도 불구하고 '민들레 책들레'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꿈마저 가난한, 가난한 동네아이들을 위해 꾸던 그의 꿈이 또 다른 이들의 꿈이 돼 현실로 됐다.누구는 벽지를 새로 바르는 일을 했고, 누구는 책상과 의자를 싸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또 누구는 반찬 만드는 일을 도왔고,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구는 찬거리를 보내주기도 했다.그래서 국수집은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으로 됐고, 노숙인 공동체 '민들레의 집'과 '민들레 희망지원센터'로 또 됐다.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의 작은 쉼터 '민들레 국수집'이 있어 사람 사는 동네 화평동을 더 향기롭게 하지 않나 싶다.
화평동은 1998년 10월 화수1동과 통합, 행정동으로는 '화수1·화평동'이라고 한다. 주민수가 8천300명인 조그마한 동네다. 화평동(花平洞)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화촌동(花村洞)과 '벌말'이라 부른 평동(平洞)을 합쳐, 두 마을 이름 첫 자를 따 지은 합성 지명이다.
화촌동은 한자 표현대로라면 지형이 꽃처럼 생겼거나, 마을에 꽃이 많아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화평동 일대가 매립되기 전, 바다로 돌출한 육지를 뜻하는 곶(串)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돼 '곶마을'로 불렸다. 그러다가 이를 부르기 쉽게 '꽃마을'이 되고, 이것이 다시 한자화해 화촌(花村), 또는 화촌동이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화평동은 벌판에 마을이 있어 이를 벌말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화한 것이다.
그렇게 화도진 공원에서 여유있는 걸음으로 5분정도 내려오면, 화평동 냉면거리가 시작된다.
어찌됐든 꽃동네는 분명히 아닌 화평동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단연코 '세숫대야 냉면' 때문이다.보통 냉면하면 물냉면의 대표격인 평양냉면이나, 비빔냉면이 일품인 함흥냉면을 떠올리게 되는데, '세숫대야 냉면'이라니.냉면을 담는 그릇의 크기도 그러려니와 지름 30㎝ 크기 그릇에 담긴 냉면의 양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을 터다.게다가 가격도 '4천5백원', 비교적 싼 가격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어 500원 하던 시절부터 이곳을 찾던 주변 공장 노동자들이 단골로서 여전히 여름철 점심시간 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화평동은 골목길이 참 정겹다. 군데군데 텃밭이 있어 정겨움을 더한다.
지금의 냉면골목이 형성되기 훨씬 전, 1980년 초까지만 해도 화평동 냉면집들은 주로 화수시장 인근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했다. 아직도 화수시장 인근과 화평동 곳곳에는 냉면집이 많다.그러던 것이 하나둘 경인철로변으로 자리를 옮겨 오늘에 이른다고 하는데, 간판을 보면 하나같이 '원조'다. 상인들조차도 진짜 원조를 가리기 힘든 듯했고, 그 맛도 대동소이하다.예전에는 냉면집이 수십 개나 영업했다고 했다. 양복점과 구둣가게가 냉면집으로 바뀌고, 그렇게 전성기를 보냈지만 지금은 11개만 남아 있다고 했다. 경인전철 복복선 사업으로 철로변쪽 가게들이 철거돼 없어졌기 때문이다. 덩달아 술꾼들을 끌어 모으던 일명 '방석집'들도 그때 사라졌다.
골목길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길이다. 좀 멀리서 동네아낙들이 모여 함께 찬거리를 다듬는 모습을 담았다.
화평동 냉면거리는 골목길로 해서 작고 아담한 동네로 이어진다. 막다른듯 열려 있는 골목길을 따라가면 자그마한 텃밭이 있고, 어깨를 맞댄 집이 있고, 또 사람이 있다.골목길에서 동네아낙들이 배추를 다듬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화평동은 인천에서 몇 안 되는 곳이다.
그곳에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작품을 남긴 극작가 함세덕(1915~1950)의 생가가 있다.화평동 455번지에서 태어난 함세덕은 1936년 '조선문학'에 단막극 '산허구리'를 발표하며 등장했고, 1939년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연극제에 '동승'으로 참가했다.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해연(海燕)'이 당선돼 등단한 이후 '낙화암', '무의도기행(無衣島紀行)' 등을 남겼다.함세덕은 주로 섬과 바다를 배경으로 어민들의 생(生)과 사(死), 현실과 꿈을 그렸다. 그러나 한때 '흑경정', '추장 이사베라' '에밀레종' 등 친일 성향의 작품을 쓰기도 했다.8·15광복 후 조선연극동맹에 참여해 '기미년 3월 1일', '고목(古木)', '태백산맥' 등 문제작들을 발표했지만, 광복 직후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그 동안 작가적 역량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1988년 월북 작가들에 대한 해금조치와 함께 그의 작품이 재조명되고 있다. 인천에서도 지역 출신 극작가 함세덕의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들이 진행됐지만, 정작 그의 생가는 보존 계획이 여전히 답보 상태다.화평동 좁은 골목길에 자리한 그의 생가는 소주방으로 변해 있다.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만든 박두성 선생의 딸 정희씨가 사는 '평안수채화의 집'.옆에 걸린 그림이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 골목을 스쳐 지나 화평동 냉면거리로 다시 들어서면 중간쯤에 또 다른 인물과 만나게 된다.한글점자 '훈맹정음'을 만들어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고 박두성 선생의 딸, 정희(87)씨가 살고 있는 4층짜리 집이다. 의사인 남편을 만나 1949년부터 살고 있는 그곳에서 정희씨는 그림을 가르친다. '평안수채화의 집'이라 하는 이 건물은 원래 정희씨 남편이 하던 '평안의원'이었다.예순 살을 훌쩍 넘긴 나이에 화가로 정식 데뷔한 그는 직업, 나이, 신분 따지지 않고 그림을 가르치고 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수필 '나의 아버지 송암'을 펴내기도 했던 그는 전시회 수익금을 시각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서 내놓는다.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냈고 국립현대미술관장을 했던 석남 이경성 선생도 1919년 화평동 37번지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참 얘깃거리도 많은 동네인가 보다.
그렇게 냉면골목을 끝으로 1시간 30분 남짓한 시간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만감을 교차하며, 이런생각 저런생각, 이런이야기, 저런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며 오르내렸다.
첫댓글 제가 태어난 송림동 이네요 지금도 어머니가 계신 그곳
수도국산 부터 시장길 오며가며 정든 내 고향 사진으로
보니 더 더욱 고맙고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