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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경북 태조산 도리사
도리사 寂 滅 寶 宮 (적멸보궁)
1977년 세존 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사리탑을 새우고불사리 예배소인 寂滅寶宮(적멸보궁)을 1982년에 주지 法燈和尙 (법등화상)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축대를 쌓아 복련문이 새겨진 초석에 나무기둥을 세웠다. 창호는 꽃창살로 짜여져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적멸보궁은 불상을 모시지 않고 법당만 있는 불전(佛殿)을 말한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사리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1982년에 새로 지었고, 안에서 바라다 보이는 석가여래사리탑은 높이 560㎝로, 세존사리탑에서 나온 금동 육각사리함의 모습을 본떠서 1987년에 만들고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적멸보궁 뒤편에 있는 석가세존사리탑은 1977년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1987년에 법등화상이 조성한 것이다
높이8m로 八角 圓堂形 浮屠(팔각원당형부도)를 본 따서 정방형 지석대 위에 팔각 석탑을 세웠는데 기단에는 용을 조각하고 탑신에는 사천왕상을, 상륜부의 귀꽃에는 여래상을 조각하는 등 전체적으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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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대구 비슬산 용연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914년(신덕왕 3)에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창건했으며, 이 절터는 용이 살았던 곳이라고 해서 절이름을 용연사라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3년(선조 36)에 휴정의 명령으로 인잠(印岑)·탄옥(坦玉) 등이 재건했다. 1650년(효종 1)에 일어난 화재로 보광루(寶光樓)만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으나 다음해에 계환(戒環)·여휘(麗輝) 등이 중건했다.
그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6·25전쟁 때 병화를 입어 겨우 명맥만 유지되던 것을 근래에 복원했다.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영산전·명부전·사명당·선실(禪室)·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석조계단(보물 제539호)이 있고, 이외에도 몇 기의 부도와 3층석탑 등이 있다.
용연사에 관한 고려 시대의 사실은 기록에 보이지 않고 조선시대에 들어서서야 사적이 전한다. 물론 법당 앞의 석탑이 고려시대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 시대에도 가람이 계속 유지되어 왔음에 틀림없으나 기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1419년(세종 1)에 천일(天日) 스님이 퇴락된 절을 보고 슬픈 마음이 일어나 장엄한 규모로 중창하였으나,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03년(선조 36) 사명 유정(泗溟惟政) 스님이 인잠(印岑)·탄옥(坦玉)·경천(敬天) 스님 등에게 중창하도록 하였다. 이 때 지은 전각이 대웅전을 비롯해서 5동이었고, 거주하는 승려도 2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650년(효종 1)의 어느 날 저녁 등불을 켤 무렵에 별똥이 떨어져 불이 나서 법당과 요사가 다시 소실되는 화를 입었으나, 이듬해 일언(一彦) 스님과 학신(學信) 스님이 동상실(東上室)과 서상실(西上室)을 건립하였다. 1653년에는 홍묵(弘黙) 스님이 대웅전을, 승안(勝安) 스님이 명부전을 세웠고, 이듬해에 일주(一珠) 스님이 만월루(滿月樓)를 세웠다.
이때부터 1661년(현종 2)까지 함허당(含虛堂), 관정료(灌頂寮), 관음전(觀音殿), 반상료(返常寮), 명월당(明月堂), 향로전(香爐殿), 약사전(藥師殿), 두월료(斗月寮) 등을 10여 년 동안 거의 해마다 건립하였다. 1668년에는 대종(大鍾)과 금구(金口)를 주조했고, 다시 중창 불사가 계속되어 18세기 초까지 사리각(舍利閣), 천왕문, 응진전, 영류당(詠流堂), 일주문, 명부전 등이 건립되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중창 불사가 연이어 이루어져 전각은 무려 200여 칸이 되었다고 한다. 대찰의 면모를 갖춘 용연사는 1673년(현종 14)에 으뜸가는 보배를 경내에 받들게 되었으니, 바로 석가여래 부도탑이 그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통도사에 들어가 석가여래의 진신사리탑을 훼손하려 하자, 사명 대사가 금강산으로 사리를 모시고 갔다가 다시 통도사로 옮겨오던 중에 그 중의 1과를 이곳 용연사에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1676년(숙종 2) 문신인 권해(權瑎, 1648-1723)가 쓴 「파사교주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이라는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에 석가여래 부도탑을 중수했고, 이어서 1715년에 찬화(粲和) 스님이 여러 사람들의 시주를 모아 대웅전을 비롯하여 종각 등의 여러 건물을 중수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다. 이 중수를 마친 후에 홍문관 교리인 임수간에게 청하여 그 동안의 내역을 새긴 중수비를 세웠다.
이 때가 1722년(경종 2)이다. 당시 용연사에는 경전 공부를 하는 명적암과 은적암이 있었고, 참선 공부를 하는 보제암과 법장암이 있었으며, 절 앞의 시내를 따라 용문교․천태교 등 다섯 개의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은 1726년(영조 2) 정월에 불이 나서 대웅전 및 동서 별실과 좌우 승당이 소실되었다. 그 뒤 혜조(慧照) 스님이 찬화 스님과 더불어 힘을 모아 2년 만인 1728년에 가람을 중건하고, 절의 내력에 밝은 금곡 선청 스님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적기를 쓰게 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10년 한일합방 직후 발표된 사찰령(寺刹令)으로 용연사는 동화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었다. 1934년에 석가여래 사리탑의 중수 불사가 있었는데 사리탑 주위에 석주를 세운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후 용연사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전각의 보수와 건립을 통하여 수행과 교화의 성소로서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은적암(隱寂庵), 명적암(明寂庵), 광선암(廣仙庵)이 있다
위사진 송화 사진이 아닙니다 잠시올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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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경남 봉명산 다솔사
다솔사의 창건연대는 503년 설과 511년 설이 있다. 먼저 각종 사전류와 안내 자료에는 511년(신라 지증왕 12) 창건설이 실려 있다.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이 해에 영악사(靈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솔사의 역사를 전하는 대표적 자료로 북지리산영악사중건비?(17세기 후반 진행된 다솔사의 중창 불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1704년)가 있는데, 이 비에서는 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다솔사 관련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비문에 따르면 503년(지증왕 4)에 창건 되었다고 한다. 5북지리산영악사중건비의 자료적 가치로 볼 때 503년 설을 따라야 할 것이다.
사찰명의 변화와 유래
다솔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사찰 이름이 변화되었다. 1704년에 세워진 「북지리산영악사중건비」에 의하면 다솔사는 처음 영악사(靈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며, 이후 다솔사(陀率寺) → 영봉사(靈鳳寺) → 다솔사(多率寺) → 영악사의 잦은 변화를 거쳤다고 한다. 하지만 네 번째 중창주인 도선 국사가 9세기 중후반 경 다시 영악사로 명명한 이후 오랫동안 이 이름을 유지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가람고(伽藍考)』, 『범우고(梵宇攷)』, 『곤양읍지(昆陽邑誌)』 등의 자료에는 모두 영악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본다면 적어도 18세기 후반 무렵까지는 영악사의 이름으로 존속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뚜렷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18세기 후반 경부터 다솔사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1761년에 편찬된 「다솔사명부전대양루사왕문중건기」의 내용이 현재 전하고 있는데, 이 중건기문의 제목에 다솔사의 명칭이 다시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1779년에 편찬된 「팔상전중수기」에도 다솔사의 이름이 보이고 있어 이 시기 어느 시점부터 다솔사로 이름이 바뀌어지고 있음을 알게 하여준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솔사의 사명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편, 다솔사라는 사찰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글자 그대로 소나무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인데, 이에 대한 문헌적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는 이 절이 자리한 주산이 대장(大將)과도 같아 ‘군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이러한 내용은 「다솔사명부전대양루사왕문중건기」에 전하는데, 그 관련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절의(다솔사) 주악(主嶽)은 마치 전후좌우에 대궐을 지키는 병사들이 둘러처져 있는 것과 같은 대장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사찰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것과 같다’는 데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사찰의 이름은 대개 해당 사찰과 관계된 자연환경과 역사, 사상, 인물 등을 고려하여 붙이게 되는데, 다솔사의 경우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주변의 자연환경과 관련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다솔사를 찾아가는 길에 주변에 소나무가 많이 있는지, 또는 다솔사가자리한 주산이 정말 대장 같은 위용을 갖추고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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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경남 미륵산 용화사
신라시대 선덕여왕때 은점스님이 정수사(淨水寺)로 창건하였는데 당시는 지금보다 더 위쪽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943년(태조 26) 도솔선사가 산내암자로 도솔암을 창건하였다. 그 뒤 1260년(원종 1) 큰 비로 산사태가 나서 가람이 무너져버렸고, 3년 뒤 자리를 옮겨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천택사(天澤寺)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 금강산에서 수도한 성화스님이 중창하였다. 그러나 1622년에 심한 폭풍으로 절이 허물어지자 벽담스님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서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용화사로 다시 바꾸었다. 이어서 속종 때(1661~1720) 옛 정수사 터에 산내암자로 관음암(觀音庵)을 지었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되어 발전이라는 성과물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또한 희망은 기다림을 상징하는 그 무엇을 만들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기다림을 가질 수 없지만, 부처님나라를 기다리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중생들의 똑같은 기다림이 하나의 섬이 되고, 그것도 모자랄 산을 이루니 미륵도와 미륵산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경남 통영 앞바다를 해상의 불국세계라고 말합니다. 통영 앞바다에는 부처님의 상호와 부처님나라를 상징하는 세존도(世尊島), 연화도(蓮花島), 욕지도(欲知島), 보리도(菩提島)라는 섬들로 가득합니다. 그중 미륵도(彌勒島)에는 미륵부처님이 상주하시는 미륵산이 있으며, 미륵산에는 미륵불이 용화정토를 구현할 즉 용화사가 있습니다. 용화사는 중생들이 미륵부처님의 하생을 기원하는 도량입니다. 미륵부처님을 기다리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조선 숙종 때 수군통제사 윤천뢰가 통영 미륵도에 내려와 미륵산에 성첩을 크게 쌓는데 성축공사를 가로막는 기운을 진압하기 위해 관립 사찰을 건립하고 사명을 정수사로 했습니다. 관립 사찰 정수사에는 승군들이 상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수사는 영조 때 무너져 산 북쪽으로 이전하여 중수하면서 사명을 천택사로 바꾸었습니다. 천택사도 화재로 전소되자, 다시 동쪽 골짜기에 새 터에 자리를 잡아 지은 절이 용화사입니다. 당시 용화사로 사명을 바꾼 것은 미륵산에 미륵불이 하생하여 용화법회를 베풀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용화사에 미래에 하생하실 미륵부처님대산 봉안한 미륵불은 시민들의 마음을 감싸 안듯 충무시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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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충남 태조산 성불사
충남 천안 성불사 적멸보궁
성불사(成佛寺)는 천안시 안서동 106번지 태조산(太祖山) 청소년 야영장 동북쪽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문화재 소개후면쪽)에는 겨우 형체만 알아 볼 수 있는 불입상이, 우측면에는 석가삼존과 16나한상이 각각 부조로 새겨져 있다. 불입상은 고부
천안시 안서동 소재 성불사(문화재자료 제10호)는 고려 태조 4년 연기 도선 또는 고려 태조때의 혜선국사, 혜조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대웅전 뒤편 산자락 끝에 우뚝 서있는 口꼴 바위의 양측면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는데, 암반의 전면(법당 조(高浮彫)상이나 바위의 절리현상으로 인하여 얼굴부분과 신체의 전면이 크게 떨어져나가 윤곽만 살펴 볼 수 있는데, 어렴풋이 남아있는 육계와 손의 형태, 의문 등은 고려시대의 불상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아래가 넓게 벌어진 대의 하단으로 발가락..
공식명칭 |
천안성불사마애석가삼존16나한상및불입상 |
주소 |
충남 천안시 안서동 1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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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169 |
전화번호 |
- |
지정일 |
2002.08.10 |
휴무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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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칭 |
天安成佛寺磨崖釋迦三尊16羅漢像및佛立像 |
이용요금 |
- |
테마 |
유물, 불교조각, 석조, 불상 |
주차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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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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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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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충북 구룡산 안심사
안심사는 법주사에 딸린 작은 절이다. 통일신라 혜공왕 11년(775)에 진표율사가 지었다고 하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제자를 길렀다 해서 안심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원명국사가 다시 짓고 인조 4년(1626)에 송암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하며 한말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있는 대웅전은 확실하게 지은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979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와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인조 때의 건물로 보인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 놓은 이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원래는 맞배지붕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러 차례 수리를 통해 건물이 축소·변형되면서 지붕 형식도 바뀐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아 만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안심사 세존 사리탑, 사리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
삼성각(三聖閣)의 왼편 뜰에 있는 세존사리탑은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이 절을 창건할 당시 직접 조각하여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리탑 앞에 있는 세존사리비 추기(追記 : 1781, 정조 5년)에 의하면, 탑은 행방을 모른 채 오랜 세월동안 내려오던 중 구룡산에서 발견되어, 광우(廣祐)ㆍ등원(等元) 두 스님이 다시 이 절로 옮겨왔다고 한다.
대웅전 서쪽 뜰에 봉안되어 있는 탑비(塔碑)로서 탑비는 높이 17㎝의 비좌(碑座) 위에 높이 150㎝, 너비 60.5㎝, 두께 26.5㎝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높이 30㎝, 가로 95㎝, 세로 69㎝의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屋蓋石)을 올린 조선후기의 일반적인 비 형식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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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전북 대둔산 안심사
전라북도 도립공원 대둔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안심사는 세월의 무상함을 한껏 느끼게 해주는 고찰이다.
이러한 안심사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무려 30여 채의 전각과 13개의 암자가 세워져 있던 거찰이었는데, 이제 그 번성했던 사찰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고 불에 타다 남은 석재들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때문에 현재의 안심사를 작은 사찰로 여기겠지만, 진신사리가 모셔진 계단과 1759년에 세운 사적비 및 1760년에 제작된 범종 등으로 미루어볼 때 고찰 안심사는 결코 작지 않은 사찰이 아닌 것을 알 게 된다.
특히 안심사는 부처님 진리사리 10과와 치아사리 1과를 안치하고 있는 적멸보궁으로서 그 이름이 높다. 부도탑은 높이 175cm, 탑신 둘레 315cm의 석종형이며 지대석은 연화문으로 장식하였고, 상륜으로 보주를 올려 놓은 형식이다. 그런데 이 진신사리를 모신 석가모니 부처님 사리탑, 즉 안심사 계단의 사방에는 호위신장 역할을 하는 사천왕상을 각각 세워 놓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진신사리탑의 미술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근래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였던 데에서 승격되어 보물 제143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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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전북 모악산 금산사
방등계단 옆의 옛 나한전 자리에 세워진 예배각(禮拜閣)으로 유리벽을 통해 방등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경배하며 예불을 드리는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불전 내부에는 따로 불단을 차려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는 불보사찰(佛寶寺刹)인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경우이다. 즉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 곧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에 별도의 불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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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봉정암과 아직 인연이 안닿네요....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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