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와 베아트리체
천국편에 들어가기 전에, 왜 천국에서 안내하는 이가 베아트리체일까?
단테가 사랑한 피렌체
피렌체 대성당 돔에서 본 조토의 종탑과 피렌체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베키오 다리에서 본 단테가 사랑하는 아르노 강, 트리니타 다리
우피치 미술관에서 본 베키오 다리
베아트리체는 단테에 의해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의 여인으로, 꿈의 뮤즈로 탄생되었습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신곡>에 영감을 준 여인이며 <신곡>은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연옥 정죄산에서 올라가는 길이 험하고 가파르면, 베르길리우스는 '베아트리체가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 벽만이 너와 베아프리체를 가르고 있다'는 등 베아트리체의 이름을 불러 용기를 줍니다. 베아트리체가 없었으면 단테의 <신곡>은 어떤 식으로 꾸며졌을까?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단테는 아홉 살이었던 1274년 봄에 아버지와 플로포르티나리 잔치에 갔다가 여덟 살의 소녀를 보고 보는 순간 평생의 연인으로 마음에 담았습니다. 9년 뒤 길 위에서 스치듯 보았을 뿐 베아트리체는 129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 헨리 홀리데이, 워커 아트 갤러리, 리버플 미국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났던 산타 트리니타 다리
그들이 대화를 나누었는지,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알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베아트리체와 죽음으로 헤어진 단테는 중세의 기사들이 아름다운 여인을 평생 가슴에 품듯, 단테도 가슴에 담아 그의 문학 작품에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승화되었고, 단테에게 영감을 주는 단테의 꿈의 뮤즈가 되었습니다.
단테는 보니파시우스 8세의 음모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형 선고까지 받아 피렌체에서 쫓겨 난 뒤 망명의 길에 <신곡>이라는 대작을 구상하였습니다. 이때 베아트리체가 단테의 <신곡>에 영감을 주었고 <신곡>에 자신의 영원한 연인으로 베아트리체가 나오고 그리고 천국을 안내합니다.
베아트리체는 <신곡>에서 단테만의 사랑이 아닌 모든 이의 연인이자 사랑의 구원자가 되어 손길을 뻗칩니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조금 더 올라가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에서 본 피렌체 야경입니다.
성당 아래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보는 피렌체도 무척 아름답습니다.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입니다.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은 미켈란젤로 광장을 지나 조금 올라간 피렌체의 가장 높은 곳에 있습니다. 길 옆으로 높은 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을 올라가면 대리석 문양으로 된 성당이 뾰족 얼굴을 내밀다 계단을 다 올라가야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에서 보면 피렌체 야경이 무척 아름답게 보입니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본 베키오 다리와 피렌체 야경
비가 올 듯 흐린, 해지기 직전의 시각입니다.
피렌체 사이로 흐르는 아르노 강과 강 위의 베키오 다리와 성당의 종탑 그리고 강 양쪽의 붉은 지붕의 예쁜 집들이 불빛을 반짝이며 여행자인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늦가을로 단풍 또한 예뻤습니다.
미켈란젤로 광장위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 에서 본 피렌체 야경
단테는 126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14세기 후반 피렌체는 황제파의 기벨린당과 교황파의 겔프당이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싸우던 시기였습니다. 겔프당은 또 흑당과 백당으로 갈리었습니다.
단테는 세 사람의 사절 중 한 사람으로 로마에 사절로 파견됩니다.
그 사이 피렌체에서는 흑파가 정권을 잡고 백파를 추방합니다. 백파에 속한 단테는 방랑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단테의 <신곡>은 이 방랑의 시기인 1307년 그의 나이 42세에 시작하여 1321년 (56세) 그가 죽기 직전에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신곡>이 지옥, 연옥, 천국의 사후를 배경으로 정쟁의 권력다툼이 심하던 당대 이탈리아의 현실의 비판과, 인간의 비겁함을 특히 경계하며 죄짓기와 죄사함 그리고 사랑과 구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테는 이 <신곡>에서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만이 구원을 약속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지옥에서는 별을 그리며 연옥에서는 별을 올려다보며 천국에서는 별과 함께 단테는 길을 만들어 갑니다.
단테는 일반 대중들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당시 라틴어어에 비해 속어에 불과했던 피렌체어(토스카나방언)을 사용하였다는 것 또한 <신곡>의 위대한 힘입니다.
피렌체 산타마리아 피오레 대성당에서 본 단테의 초상화입니다.
자신의 '신곡'을 들고 있습니다.
단테 초상화, 도메니코디 미켈리노, 산타마리아 피오레 성당, 피렌체
망명자 단테, 도메니코 페테를리니
단테는 정쟁에 휘말려 36세에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그는 5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피렌체에 가지 못하고 망명객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단테의 망명이 단테에게는 극히 슬픈 일이지만 <신곡>의 탄생으로 그의 망명이 인류에게는 더없이 복된 일이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단테는 일생을 유랑의 삶을 살았지만 그는 온 인류에 가장 값진 선물인 <신곡>을 남겼습니다. 그는 <신곡>을 세상에 남기려고 피렌체에 태어나 망명생활을 했던, 단테와 피렌체는 하늘이 내린 만남이었나 봅니다.
라벤나에 단테의 무덤이 있습니다.
단테는 피렌체에서 정치 싸움에 휘말려 추방당해 이탈리아를 떠돌다 라벤나에서 세상을 뜹니다. 당연히 단테의 무덤이 라벤나에 있습니다.
라벤나는 피렌체에서 오랫동안 단테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하나 끝까지 거부하고 단테의 시신을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모시고 있습니다. 지금도 라벤나의 단테의 무덤 앞에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이 있어 피렌체 시에서는 별도의 예산을 세워 라벤나 시에 기름 값을 속죄의 의미로 보낸다고 합니다.
라벤나 성 프란체스코 성당
단테의 무덤
라벤나에 있는 단테의 박물관
라벤나에 있는 단테의 박물관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입니다.
이곳에 단테의 가묘가 있습니다.
라벤나는 피렌체에서 단테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하나 끝까지 거부하고 단테의 시신을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모시고 있습니다. 피렌체는 언젠가 돌아올 단테의 유해를 기다리며 산타크로체 성당에 단테의 가묘를 만들었습니다.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 있는 단테의 가묘입니다.
단테의 묘 오른쪽에 있는 여인은 월계수로 만든 관을 들고 단테를 기다리다 지쳐 버린 모습입니다. 피렌체에서 단테를 모셔오려다 피렌체에 모시지 못함을 기리는 상징적 의미가 담긴 듯합니다.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단테의 가묘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 앞에 있는 단테의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