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당당한
인순이
1959년 4월 5일 경남 진해 출생 / 163cm / 50kg / 중졸
"열네 살 때까지 간혹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미국에 있는 아버지를 직접 느껴본 시간은 전혀 없었어요. 사실 전 아버지의 자상함이나 엄격함 같은 걸 모르죠.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주변 사람들을 통해 간접 경험한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아버지들을 떠올리며 노래할 때도 많아요.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짓눌려 무뚝뚝해 보일 때도 많지만 '사랑합니다' 한마디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런 아버지들이죠."
그런 그에게 거대한 무대가 다가왔다. 미국의 유명 공연장인 뉴욕 카네기홀 주공연장인 아이작 스턴홀에서 콘서트가 잡혔다. 주로 실력을 인정받는 클래식 뮤지션들이 서는 무대다. 인순이로서는 1999년 이루 두 번째 기회였다. 남들은 한번 잡기도 어려운 기회를 두 번씩이나 잡았다.
"유쾌한 심정이었지요. 첫 공연 할 때는 엄청 부담스러웠죠. 신경성 장염, 위염 때문에 한 달쯤 밥을 제대로 못 먹었어요. 단 한 번 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제가 어머니의 힘만으로 얼마나 잘 자랐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잔뜩 흥분했었던 거죠. 달나라에 태극기 꽂고 오는 듯한 거창한 감회가 밀려들었어요."
그녀는 첫 공연 때, 되도록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많이 모셔 달라고 부탁 하고는, "저 같은 사람 때문에 미안해하지 마세요. 저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아버지들 모두 사랑합니다." 라고 했다. 그는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 貸館 심사에 잇따라 탈락한 뒤, 지난해 기자회견을 열고 전문 공연장이 대중가수를 외면한다며 비판,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그는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에 못 서니까 다시 카네기홀을 뚫은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까 두려웠다며, 어쨌든 오페라 극장에서 노래하는 건, 아직도 제 꿈이라고 했다.
"쉽게 이뤄지면 그건 꿈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한국 내 혼혈인의 희망적 상징으로 통하는 인순이는 피부색으로 인해 겪었던 힘겨운 세월에 넌더리를 내며 15년 전, 미국에서 딸을 낳았다. "혹시 아이가 저를 많이 닮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됐던 거죠. 그래서 미국 시민권이라는 안전장치를 마련해주고 싶었어요. 이민 갈 마음은 전혀 없었고요. 원정출산이라고 볼 수도 있죠. 아이를 낳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라디오에서 이런 사연을 전부 공개했어요. 청취자들에게 '마음껏 욕해 달라'고 했었죠.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이었으면 꽤 논란이 커졌을 텐데…."
△딸 박세인과 카메라 앞에 선 인순이
하지만 인순이는 이제는 한국 사람들이 급속도로 다문화 가정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있어 안심이 된다고 했다. 자신의 세월을 극복한 그의 관심은 요즘 오히려 아버지의 세월에 쏠려 있다. 어떻게 보면 본인과 상관없는 나라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 아니냐며 그런 측면에서 아버지와 동료들을 인정해줘야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런 그는 최근 공군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군인의 딸' 자격으로. 이날 그의 마지막 한 마디에 수백 명 군인들이 뒤집어졌다. "외국에 파병 나가도 책임지지 못할 씨는 뿌리고 오지 마세요." 인순이는 "저니까 할 수 있는 얘기" 라며 입을 앙다물고 눈으로 웃었다.
6.25 60주년 기념 KBS 1TV `나라사랑 음악회` 녹화에서 인순이는 “전쟁이라고 하면 저 인순이가 떠오르겠죠. 저에게 있어 아버지라는 단어는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어요” 라며 그녀의 사부곡 `아버지`를 열창했다. `아버지`와 `You raise me up`을 부르는 인순이의 눈시울이 점차 붉어지고 객석에 있던 참전용사들도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뉴욕 카네기홀 공연에 이어 2번째로 참전용사와 자리를 함께 한 인순이는, 아버지를 모르는 내겐 참전용사 모두가 아버지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남기며 앞으로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