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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비 갠 뒤
숲 위에는 무거운 구름이 떠 있었다.
“비가 오려나?”
외출에서 돌아온 나쓰에는 현관문에 들어서려다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크림색과 밝은 초록색 줄무늬가 있는 모직 옷에 적갈색 허리띠를 두른 나쓰에의 모습은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유난히 산뜻해 보였다.
부엌문을 열자 얇은 스웨터를 입은 쓰기코가 차를 끓이고 있었다.
“이제 오세요?”
“손님 오셨니?”
“네, 무라이 선생님이 와 계세요.”
“무라이 선생?”
나쓰에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으나,
“쓰기코, 차를 갖다 드려, 곧 갈테니까.”
하고 말했다.
“네.”
남편에게서 무라이가 도야의 요양소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지 보름이 지났다. 그러나 나쓰에는 아직 무라이의 병 문안을 하러 가지 않았다.
쓰기코가 쟁반을 들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도오루는?”
“나쓰에는 자기 자식이라도 절대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정답고 조용조용한 말씨나 나쓰에의 아름다움을 더욱 품위 있게 보이도록 했다.
“사카베 씨 집에 그림 연극인가 뭔가를 보러 간다고 하던데요. 가서 데려올까요?”
쓰기코는 창 너머로 하늘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글쎄.”
사카베 씨의 집은 쓰지구치 집에서 3백 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아요, 아주머니.”
“글쎄 말이야.”
나쓰에는 무라이와 단둘이 있게 되는 것이 꺼려졌다.
“빨리 갔다 올게요.”
“그럼 얼른 갔다 와.”
쓰기코가 우산을 들고 나가자, 나쓰에는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았다. 무라이가 있는 응접실로 가기가 왠지 내키지 않았다. 루리코가 무참하게 죽은 날, 뺨에 무라이의 키스를 받은 것을 나쓰에는 지금도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도 쓰기코와 도오루가 집에 없다는 것이 나쓰에는 불안하기만 했다. 쓰기코가 돌아올 때까지 무라이를 기다리게 할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바람이 몰아쳤다. 창문이 덜컥거리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쓰기코와 도오루가 곧 돌아오겠지.’
무라이를 기다리게 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도 불안했다.
나쓰에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긴장한 탓인지 여느 때보다 약간 창백한 안색이 오히려 나쓰에의 미모를 한결 돋보이게 했다. 불안한 듯 더욱 커진 눈은 자신이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소파에서 일어나 잠깐 뒤못습을 거울에 비춰 보고 나서 나쓰에는 결심한 듯이 복도로 나갔다.
게이조와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토요일이었다.
무라이를 만나는 것은 루리코의 장례식 이후 처음이었다. 두 달 가까이 지났다. 나쓰에는 응접실 문 앞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 있어야 할 무라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돌아간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쓰기코가 갖다 놓은 찻잔도 보이지 않았다.
‘쓰기코가 객실로 안내한 모양이구나.’
친한 손님만 맞는 객실로 무라이를 안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쓰에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차라리 거실로 돌아갈까 하고 생각했을 때 객실 쪽에서 무라이의 기침 소리가 났다. 마음을 고쳐 먹고 객실 미닫이를 열자 흑단 테이블 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무라이의 모습이 보였다.
“외출 중에 찾아와서 실례했습니다.”
무라이는 방석에서 조용히 내려앉으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짐짓 태연한 체하는 목소리였다.
“아뇨, 저야말로 기다리게 해서……”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과 같은 무라이의 태도에 나쓰에는 어리둥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편찮으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문병도 못 가서…….”
무라이는 그다지 여위어 보이지는 않았다.
“뭐, 문병을 오실 것까지야. 얼마 동안 느긋하게 좀 쉬었습니다.”
쌀쌀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무라이는 여전히 예의 바른 말투였다. 무라이는 문병을 가지 않은 나쓰에의 무심함을 탓하는 것 같았다.
“어서 편히 앉으세요.”
“네, 실례하겠습니다.”
무라이는 나쓰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 같은 얼굴로 말했다.
‘이 사람은 벌써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쓰에는 말을 붙이기도 어려운 무라이의 쌀쌀한 표정이 역시 서운했다. 루리코 사건 이후로 마음에 몹시 거리끼는 존재인 무라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만나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무라이였다.
나쓰에는 남에게 냉대를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누구나 나쓰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무라이도 전에는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래야 했다. 무라이의 돌변한 태도에 나쓰에는 점점 마음의 평정을 잃어 가고 있었다. 너무나도 큰 모욕을 받은 것 같았다.
마루의 유리창 너머로 나뭇가지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내일 드디어 도야로 떠나야 되어 인사차 들렀습니다.”
무라이는 뜰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딱딱하게 말했다.
“어머, 내일요?”
나쓰에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교태를 느꼈다. 무라이의 쌀쌀한 태도와 문병하거 가지 않은 자신에 대한 노여움 때문인지를 알고 싶었다.
갑자기 함석 지붕에 또르르 하고 조약돌이 굴러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쏴하고 비가 쏟아졌다.
굵은 빗방울이 땅에 내리 꽂히더니 금세 땅을 파헤치고 은빛을 내며 튀었다. 마루의 유리창을 씻어 내리는 듯한 억수 같은 비였다. 유리창이 바람에 흔들려 심하게 덜컥거렸다.
“굉장한 비군요.”
나쓰에의 목소리가 함석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에 지워졌다.
‘이렇게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데 도오루는 돌아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게이조도 어디선가 이 비를 맞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자 나쓰에는 몸이 달아올랐다.
뜰은 금세 연못으로 변했다.
나쓰에는 무라이가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퍼붓는 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것이 나쓰에의 불찰이었다. 깜짝 놀라 어깨 위에 놓인 손을 뿌리치려고 했을 때 귓전에 대고 무라이가 속삭였다.
“용서해 주세요. 이게 마지막 이별일지도 몰라요.”
“왜 이러세요. 이거 놓으세요.”
바람이 미친 듯이 유리창을 흔들어댔다.
“놓을 수 없습니다.”
무라이의 눈빛은 필사적이었다.
“부탁이에요, 제발 놓아주세요.”
나쓰에는 쓰기코를 밖으로 내보낸 것을 후회했다.
“죽어도 못 놓겠어요.”
무라이는 애원하는 나쓰에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루리코가 죽은 날의 일을……”
여기까지 말하자 나쓰에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흘러넘쳤다.
“생각해 내라는 말인가요?”
무라이는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루리코가 죽었는데……”
나쓰에는 어째서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루리코를 죽인 건 우리가 아니잖아요?”
나쓰에를 껴안은 팔에 더욱 힘이 주어졌다.
“아, 놓으세요, 놔.”
나쓰에는 뿌리치려고 결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조용히 하세요. 절대로 나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놔요. 쓰지구치가 곧 돌아올 거예요.”
“괜찮아요, 원장 같은 건. 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신을 가까이하고 싶소.”
“마지막이라고요?”
갑자기 무라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반짝이는 조약돌이 굴러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눈물인 줄 알게 되자, 나쓰에는 무라이의 손을 뿌리치려던 동작을 멈췄다.
빗소리가 더욱 세차게 들려왔다.
“나쓰에 씨, 당신은 차가오면서도 다정한 여자였어요.”
어느새 나쓰에도 무라이의 등에 팔을 감고 있었다.
“나쓰에 씨!”
무라이는 나쓰에의 흰 목에 강하게 입술을 눌렀다.
“굉장한 비였어. 길이 완전히 개울이 되어 버린 곳도 있었소.”
전에 없이 밤늦게 귀가한 게이조가 잠옷으로 바꿔 입으면서 말했다.
“저, 오늘 무라이 씨가 찾아왔었어요, 인사하러.”
나쓰에는 무라이가 떨어뜨린 눈물을 떠올렸다 .어쩐지 무라이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 나쓰에의 담담한 말투에 게이조도 거리낌없이 말했다.
“내일 떠난다지?”
“네, 내일이래요.”
루리코가 죽은 후에는 무라이의 얼굴을 보는 것도 쑥스럽게 생각한 나쓰에였다.
그러나 “난 결핵 환자니까”하며 입술을 요구하지 않고 목에만 키스하고 돌아간 무라이를 생각하니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마음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당신 얼굴만 보고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애써 남남 같은 태도를 취한 건데, 비가 세차게 퍼붓는 바람에 그만 내 결심이 흔들리고 말았군요.”
무라이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사납게 퍼붓는 비에 충격을 받은 듯한 순간에 나쓰에는 몇 번이나 떠올렸다.
“아기를 언제 데려올까?”
먼저 잠자리에 든 게이조가 정답게 말했다.
“어머, 정말이세요?”
게이조가 벗어둔 옷을 옷걸이에 걸면서 나쓰에가 말했다.
“응,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는데, 당신이 그렇게 간절히 원한다면 데려와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런데 당신 마음이 혹시 변하기라도 한 거요? 요즘은 전혀 아기 얘기는 입밖에 내지 않는군.”
“아뇨, 전 한번 마음먹으면 좀처럼 단념하지 못해요.”
나스에는 게이조에게 등을 돌린 채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좀처럼 잊지 못하거나 단념하지 못하는 점은 부부가 서로 닮았군.”
“네, 다쓰코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하지만 부부는 별로 닮지 않은 편이 좋대요.”
하고 게이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쓰에는 말을 이었다.
“다카기 씨가 어떤 아기를 주선해 주실지 모르겠군요. 기대가 커요.”
“응, 내가 먼저 가서 보고 오겠소.”
게이조는 엎드린 채 나쓰에가 잠옷으로 갈아입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쓰에는 옷 위에 잠옷을 걸친 채 옷을 벗더니 재빨리 잠옷 끈을 맸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쓰에의 목에 게이조의 눈길이 멎었다. 보랏빛 반점 두 개가 뚜렷이 보였다. 게이조는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게이조는 무라이가 찾아와서 아내 나쓰에와 보냈을 시간을 상상해 보았다.
‘뭐야, 그 반점은?’
하고 호통을 치고 싶은 것을 게이조는 꾹 참았다. 그는 화가 폭발하게 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위험을 예감했다. 지금 큰소리로 나쓰에를 꾸짖으면 그 성난 목소리가 자신의 내부에서 더욱 거세게 분노의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 같아 두려웠다.
게이조는 때때로 송곳이나 가위나 메스를 보기만 해도 아무 이유 없이 발작을 일으켜 그것들을 흉기로 사용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곤 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그런 뽀족한 날붙이 같은 것은 책상 속에 넣어 두어 눈에 띄지 않게 했다.
“정말 다카기 씨한테 가실 거예요?”
게이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벌써 주무시나 봐.”
나쓰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모처럼 무라이의 일도 물에 흘려 보내고 사이 좋게 지내려고 했는데…..’
게이조는 나쓰에를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루리코가 죽은 데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면, 목에 키스 자국을 남기는 따위의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할 게 아닌가.
‘나쓰에, 그래도 넌 루리코의 엄마라고 할 수있느냐?’
게이조는 이렇게 호통을 치고 싶었다. 갈기갈기 찢긴 가슴에서 정말로 피가 뚝뚝 떨어지지 않나 하고 생각될 정도로 게이조는 못 견디게 괴로웠다.
나쓰에가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게이조는 나쓰에 쪽을 쏘아보았다. 방금 전에 본 보랏빛 반점이 눈에 선했다. 나쓰에와 무라이가 취했을 여러 가지 자세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런 상상 속에서 보는 아내의 모습은 음탕하기 짝이 없었다.
게이조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악착같이 일해야 하는가?’
갑자기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평소 자랑스럽게 여겼던 인술(仁術)도 허무하게 생각되었다. 새로 환자가 온다. 소변이나 혈액 검사, 진단, 처방, 처치를 하고 나면 환자의 병이 낫는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치료해도 새로운 환자는 그칠 줄 모른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나 다름없다. 게이조는 오늘밤에는 환자의 목숨을 구해 준다는 긍지를 느낄 수 없었다. 아내인 나쓰에의 배신이 게이조에게서 살아가는 보람을 빼앗아 간 것이다.
빛을 잃고 바라보는 모든 것은 암흑이었다.
‘나쓰에를 죽여 버리고 나도 죽어 버릴까?’
게이조는 싸늘하게 누워 있는 자신의 시체를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지금 게이조의 마음 같아서는 나쓰에는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오루를 죽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도오루만 남겨 두고 죽는다는 것은 더욱 못할 짓이다.
많은 환자를 수용하고 있는 병원의 원장인 게이조가 갑자기 자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많든 적든 사회인으로서 살아갈 책임, 목숨을 연장할 책임이 게이조에게 지워져 있었다.
‘나쓰에! 네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짓을 저질렀는 줄 아느냔 말이다!’
목에 선명하게 보랏빛 반점을 지닌 채 옆에서 자고 있는 나쓰에를 게이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기를 데려다 주나 봐라!’
게이조는 나쓰에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그녀가 원하는 아기를 데려와서라도 다시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쓰에가 기뻐할 일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다.
“범인의 자식을 맡아 기르겠다니 그런 어리석은 짓은 그만둬. 그 말을 나쓰에 씨에게 어떻게 꺼낼 거야?”
하고 반박하던 다카기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그 말을 나쓰에에게 불쑥 꺼내 볼까? 범인의 자식이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나쓰에는 화가 치밀어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바로 미쳐 버리면 생활에 지대한 위협이 따를 것 같았다.
‘그렇다! 의논하지 말고 아이를 데려오는 거야. 나쓰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귀여워할 것이다. 비밀은 절대로 지켜야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기른 아이가 범인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쓰에는 대체 어떤 얼굴을 할까? 귀엽게 기른 만큼 더욱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사랑을 쏟아 부어 기른 아이가 루리코를 죽인 범인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쓰에는 자신의 과거 몇십 년 동안의 헛수고를 얼마나 원통해할까? 하지만 그래도 싸지 않은가. 범인의 자식은 귀여움을 받으면서 커가게 된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나의 시도는 어쨌든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수의 자식인 것을 알고 기르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나쓰에보다 더욱 괴로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을 에고 뼈를 깎는 괴로움도 참아야 한다. 진상을 알게 되었을 때 나쓰에가 발을 구르며 원통해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게이조는 지금 자신의 마음 밑바닥에 어두운 동굴이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누구보다도 사랑해야 할 아내에게 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 것인가. 이런 무서운 생각은 자신의 마음 밑바닥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어두운 동굴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의 밑바닥에 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아직 괜찮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동굴 속에서 나 자신도 미처 상상하지 못한 더욱 무서운 속삭임이 들려오지 않을까?’
게이조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동굴은 자신이나 나쓰에에게도 그리고 누구의 가슴속에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게이조는 간밤의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일을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게이조는 나쓰에에게 말했다.
“오늘은 다카기에게 가볼 생각이오, 일요일이니까.”
“어머나!”
나쓰에는 기쁘다는 듯이 자신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런 어린애다운 몸짓은 나쓰에가 자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게이조의 눈에도 그런 나쓰에가 상큼하고 순진해 보였다. 그러나 게이조에게는 무라이와의 사랑이 나쓰에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저도 함께 가면 안 돼요?”
“얘기가 잘되면 전화할께. 적당한 아이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게이조는 오늘 아침에도 나쓰에의 흰 목덜미에 남아 있는 보랏빛 반점을 목격했다.
‘나는 환자 이외에 다른 여자와는 손 한번 잡아 본 적도 없어. 그런데 나쓰에는 능력도 있고 다정한 나를 어째서 배신한 것일까?’
신혼 시절에 잘못해서 목에 키스 자국을 낸 이후로 게이조는 조심해 왔다.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대기만 해도 나쓰에는 기분 좋은 듯이 눈을 사르르 감았다. 무라이에게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늘 아침에도 게이조의 가슴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나쓰에는 자신의 목덜미에 남아 있는 반점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저귀든 무엇이든 루리코가 쓰던 게 그대로 있어요. 전화만 주시면 금방 달려갈게요. 가능하면 영리하고 귀여운 아기로 부탁해요.”
게이조는 나쓰에의 예쁜 입술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배신한 입술이었다.
‘저 입술이 무라이의 어디에 닿았을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괴롭기 짝이 없었다.
“그러지. 최고로 예쁘고 혈통도 좋은 아기를 데려오도록 하지.”
게이조는 기분 좋은 듯이 대답했다.
‘그렇지. 오늘은 무라이가 떠나는 날이야.’
그 사실이 생각나자 게이조는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삿포로까지 무라이를 배웅할 거요. 당신도 정거장까지 나와 주겠지?”
나쓰에는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어떡하는 게 좋을까요, 전?”
“당연히 배웅해야지.”
눈을 내리깐 나쓰에의 마음속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게이조는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네….., 하지만……”
애매한 대답이었다. 나쓰에는 행주로 식탁의 한 군데를 집중적으로 닦으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배웅해야지.”
게이조가 어느 정도 결정을 내리듯이 말하자 나쓰에는 얼굴을 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요.”
“왜?”
“……제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던 거, 병원 사람들이 다 알고 있잖아요? 왠지 창피해서……”
구실은 그럴싸했다. 게이조는 말없이 식탁 앞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