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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스스코투스
둔스 스코투스의 생애
“인간 의지가 이성보다 더 우월”
둔스 스코투스의 사상은 후대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역사 속에서 교회 내 보다 오히려 교회 밖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13세기의 귀재, 중세 사상을 종합하고 새로운 철학을 가능케 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에 필적할 만한 영국 경험론, 독일 관념론 뿐 아니라 모든 사상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
1993년 3월 2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카톨릭-성인으로 인정하기 전에 공식으로 공경할 수 있다고 교회가 인정하는 지위)에 오른 둔스 스코투스(1265/1266~1308)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더불어 중세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꼽힌다.
스콜라 철학이란? 8세기부터 17세기까지 중세 유럽에서 이루어진 신학 중심의 철학을 이르는 말. 가톨릭교회의 부속학교에서 교회 교리의 학문적 근거를 체계적으로 확립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기독교 변증(辨證)의 철학으로, 고대 철학의 전통적 권위에 의존하여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및 플라톤의 철학을 원용하여 학문의 체계를 세우려 하였는데 토머스 아퀴나스가 대성하였다. 내용이 형식적이고 까다로운 것이 특징이다.
「정교한 박사」(Doctor subtilis)라는 호칭을 지닌 그는 성모 무염시태(원죄 없는 잉태-성모 마리아는 잉태하는 순간부터 하느님의 은혜와 특권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원죄의 흠이 없이 보존되었다는 교리.) 교리를 고전적으로 옹호한 선구자로서 지식보다 사랑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천국의 본질은 하느님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고 주장했다.
불명확한 생애(Indefinite life)
그의 생애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19세기 프랑스 역사가이자 철학자 에르네스크 르낭은 중세 위대한 사상가 중 둔스 스코투스 만큼 생애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드물다고 했는데 그만큼 둔스 스코투스의 살아온 과정을 살펴보기에는 자료들이 충분치 않다.
그러나 최근 들어 특히 50년 사이에 그에 관한 꾸준한 연구가 이어지면서 많은 사실들이 발견되었는데, 14세기 초 필사본에는 둔스 스코투스가 작은형제회 소속으로 던스 출신의 스코틀랜드 사람이었고 캠브리지 옥스퍼드 파리에서 활약하다 쾰른에서 사망한 사실이 발견됐다.
1265년 12월 23일에서 1266년 3월 17일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둔스 스코투스는 스코틀랜드의 막스톤(Maxton)에서 출생, 12~13살이 되던 1278년 둠프리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련소 입회 법적 연령인 만 15살이 되면서는 착복식과 함께 공식적으로 작은형제회에 입회했고 1291년 사제품을 받았다.
학자들은 스코투스가 수도원에 있는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와 파리에서 학문적 철학적 교육을 연마하였고 특히 파리에 머무는 동안 메디아 빌라의 리챠드, 스페인의 곤잘보, 베드로 올리비 같은 이들을 알게 되고 그들로부터 많은 사상적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사제 서품 후에는 당시 철학 신학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가서 정식으로 신학을 가르칠 자격을 얻는 한편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풍부히 할 기회를 가졌고 여기서 신학 교수의 호칭을 얻은 스코투스는 베드로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을 강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03년경 프랑스 왕 필립과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사이의 갈등에서 교황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파리를 떠나 옥스퍼드에 간 것으로 추정되는 스코투스는 이후 다시 파리로 돌아와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307~1308년 독일 쾰른에서 강의하다 1308년 11월 8일 사망, 현지에 묻혔다.
뛰어난 종합력 소유
스코투스는 13세기 전반 아우구스티노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간 논쟁의 연속 상황에서 이 두 사상 체계의 종합을 극적으로 실현해냈다.
이것은 각 학설들을 종합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서도 특출한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런 만큼 당대의 사상가로서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견될 만큼 뛰어난 종합력을 소유한 사상가로 소개되고 있으며 프란치스칸주의와 토마스주의 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노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모든 사상적 흐름들을 하나로 묶어 이해하고 새로운 종합으로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사상적 견해는 아우구스티노, 안셀모, 보나벤투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지주의적 경향에 반대해서 의지를 강조하는 주의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어린시절과 성장과정
19세기 프랑스 역사가이자 철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에 의하면 중세의 위대한 사상가 중에서 둔스 스코투스만큼 생애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없다. 그래도 지난 50년간의 꾸준한 연구로 많은 사실들이 발견되었다. 일례로 14세기초의 필사본에는 요한네스 둔스가 탁발수도회(Friars Minor : 아시시의 프란키스쿠스에 의해 설립)의 영국교구에 속하는 던스 출신의 스코틀랜드 사람이었고, "케임브리지·옥스퍼드·파리에서 활약하고 쾰른에서 죽었다"고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비록 어린시절의 교육과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입문에 관한 설명들이 믿을 만한 것은 못되지만 "지금 13세 소년이 원시 그리스도 교회의 20세 어른보다 종교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그 자신의 말은 그가 어린 나이에 종교에 관심을 가졌고 수도회에 들어갔음을 말해 준다. 수련수사로서 그는 성체 때 그리스도에 대한 성 프란체스코의 인격적인 사랑, 사제직에 대한 존경심, 교황에 대한 충성심 등을 배웠고, 이는 그의 신학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주제가 되었다. 또한 성 프란체스코의 사상에 대한 해석, 특히 신비한 사랑의 연합에서 절정에 달한다는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이 프란체스코의 이상이라고 본 성 보나벤투라의 사상을 공부한 듯하다. 초기의 〈옥스퍼드 강의 Lectura Oxoniensis〉에서는 신학은 사변이 아니라 신에 관한 실제적인 학문이며,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랑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느님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이러한 연합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알려지지만 철학은 무한한 존재를 증명할 수 있고, 바로 이것이 신학에 대한 철학의 공헌이자 임무라고 보았다. 신에 관한 그의 지적인 여정은 마지막 저서로 보이는 〈제1원리인 하느님에 관하여 Tractatus de primo principio〉(1966)에서 발견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영국 교구에 소속되어 있었고, 이 교구의 주요한 학문연구기관은 옥스퍼드 대학교였는데 그는 신학의 대가가 되기 위해 정확히 13년간(1288~1301) 이곳에서 공부했다. 이 과정에 들어가기 전 8년간의 예비철학교육(학사 4년, 석사 4년)을 어디서 받았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4년간 신학연구를 마친 후 링컨 주(州)의 주교(옥스퍼드가 소속된 교구) 올리버 서튼에게서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이 서품식은 1291년 3월 17일 노샘프턴의 세인트 앤드류 성당에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제가 될 수 있는 연령제한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이전 역사가들이 주장했던 1274년 또는 1275년이 아니라 1266년 3월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다.
13년의 신학과정 중 마지막 4년 동안에는 이미 신학사가 되어 있었는데 첫해는 중세대학의 신학 교과서인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신학명제집 Sentences〉에 관한 강의를 준비하였고, 두번째 해는 이를 강의하면서 보냈다. 당시 학사의 역할은 이 책에 대해 문자적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롬바르두스의 주제 구분에 따라 자기 자신이 문제를 제기하고 푸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옥스포드 강의〉에서 논의한 문제는 신학의 전분야에 관한 것이었다. 과정을 끝낸 후 그는 출판을 목적으로 강의 내용을 개정하고 확대했다. 이 개정판은 그의 강의 초고(lectura)나 실제 학생의 강의 보고서(reportatio)와 구별해서 '오르디나티오'라고 불렀다. 만약 그 강의보고서를 강의자 스스로 수정했다면 'reportatio examinata'가 되었을 것이다. 머리말에 언급된 날짜로 볼 때 그는 이미 1300년에 〈신학명제집〉에 관한 기념비적인 옥스퍼드 주석서인 〈오르디나티오〉 또는 〈Opus Oxoniense〉에 착수했음이 분명하다.
대학 법규에 따르면 3번째 해에는 〈성서〉에 관한 강의에 집중해야 했고, 학사배출(formatus)이라고 부른 마지막 해에는 자기 스승과 다른 선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개적인 토론에 참여해야 했다. 둔스 스코투스의 경우 2명의 신학석사인 하우든의 아담, 브리들링턴의 필립과 함께 22명의 옥스퍼드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 가운데 그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이 마지막 해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아담과 필립은 1300년 7월 26일 교수가 되기 위해서, 또는 옥스퍼드에서 프란체스코 성당에 모여드는 수많은 군중들의 고해를 들을 수 있는 허락을 받기 위해서 달더비 주교에게 갔다. 탁발수도회에는 신학교수 자리가 하나밖에 없었고 학위를 받으려는 학사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선임석사들은 매년 바뀌었다. 아담은 28번째, 필립은 29번째 옥스퍼드 석사였고 필립의 교수직이 막 시작된 때가 둔스 스코투스의 13년 과정 중 마지막 해와 일치했음이 분명하다. 현존하는 브리들링턴 석사토론 문서에 따르면 둔스 스코투스가 학사토론 응답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1301년 6월에 둔스가 신학석사에 요구되는 모든 것을 완수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석사학위를 받으려는 사람이 여럿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10년 내에 옥스퍼드에서 석사로 임명될 희망은 거의 없었다.
파리대학교에서 보낸 기간
명성있는 파리대학교가 프란체스코 신학교수 후보를 찾게 된 절호의 기회가 생겼을 때, 둔스 스코투스가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파리대학교 강의 보고서(reportatio)에 따르면 그는 1302년 가을 〈신학명제집〉에 대한 주석을 쓰기 시작해 1303년 6월까지 계속했다. 그러나 이 기간이 끝나기 전에 파리대학교는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사이의 오랫동안 누적된 불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것은 필리프 4세가 영국과의 전쟁 지원자금을 얻기 위해 교회 재산에 과세하려고 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교황이 필리프 4세를 파문하자 국왕은 교황을 해임하기 위해 교회총회를 소집하여 프랑스 성직자들과 대학의 지지를 얻어냈다. 1303년 6월 24일 대규모 교황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탁발승들은 파리 거리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오를레앙의 주교이자 파리대학교의 전학장이었던 생드니의 성 베르톨두스가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 2명,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 2명과 함께 집회에서 연설하자 그 다음날 왕실위원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각 수사들이 왕권에 반대했는지 찬성했는지를 조사했다. 주로 프랑스인이었던 70명의 탁발승들이 필리프 왕 편에 섰고, 둔스 스코투스와 마스터 곤잘부스 히스파누스를 포함한 나머지 80여 명은 교황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이에 대한 벌은 3일 이내에 프랑스를 떠나는 것이었다. 이에 맞서 보니파키우스는 대학의 신학과 교회법 및 시민법에 대한 학위수여권을 중지시키는 칙령을 8월 15일에 내렸다. 그러나 국왕의 부하들이 교황을 고문하고 감금시켜 10월에 교황은 죽었고 베네딕투스 11세가 교황이 되었다. 베네딕투스는 평화를 위해 1304년 4월 대학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했으며 국왕은 곧 학생들이 대학에 복학하도록 촉구했다.
둔스 스코투스가 어디서 망명기간을 보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케임브리지 강의들은 파리에 오기 전인 1301~02년에 작성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이 망명기간에 쓴 것 같다. 어쨌든 당시 둔스의 전임자 리그니의 자일스가 공개토론을 할 때 둔스가 학사토론응답자였기 때문에 1304년 여름 이전에 그는 파리에 돌아와 있었다. 같은 해 11월 18일 오순절회의에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성직자 대표로 뽑힌 곤잘부스는 "칭찬할 만한 생활태도와 뛰어난 지식, 탁월한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오랜 나의 경험과 도처에서 들려오는 좋은 평판을 통해 우수한 자질들을 지닌 수사 요안네스 스코투스"를 자일스의 후임으로 지명했다.
1305년 석사학위를 받은 후 둔스 스코투스는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다. 비서와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옥스퍼드·케임브리지·파리 강의를 토대로 옥스퍼드에서 처음 시작했던 〈Ordinatio〉를 완성하기 위해 연구에 착수했다. 필사본들에 따르면 그의 석사학위 토론은 도미니쿠스 수도회 석사인 기욤 피에르 고댕을 토론 상대자로 하고 있다. 둔스 스코투스는 질료(質料)의 개별화 원리(동일한 종류의 다른 대상으로부터 개별 대상을 구별하게 하는 형이상학의 원리)라는 논제에 반대했는데, 공개적으로 질문을 놓고 토론한 〈ordinarie〉(대학의 다른 석사들에 대한 정식적인 반대)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질문들이 있었고 이 질문들이 결국 〈Ordinatio〉에 포함되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둔스 스코투스는 진지한 자유토론을 벌였는데, 어떤 논제에 대해서든지, 어떤 학사나 석사가 질문을 하든 간에 해당 석사가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토론이라고 불렀다. 그가 다룬 21개의 질문들은 이후 신과 창조라는 2개의 주요논제로 개정·확대되어 정리되었다. 관점에 있어서는 〈Ordinatio〉만큼 포괄적이지는 못하지만 이 〈자유 토론집 Quaestiones quodlibetales〉은 그의 가장 성숙한 사상을 나타내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의 명성은 이 두 저술에 의거한 것이다.
이성이 신을 증명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하고 있는 짧고도 중요한 〈제1원리인 하느님에 관하여〉는 〈Ordinatio〉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믿을 만한 저작들은 철학이나 신학을 연구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학생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토론한 문제들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선집 Collationes〉(옥스퍼드와 파리에서 강의한 내용)·〈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문제들 Quaestiones in Metaphysicam Aristotelis〉 외에 신플라톤주의자 포르피리우스의 〈Isagoge〉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관하여 De praedicamentis〉·〈해석에 관하여 De interpretatione〉·〈De sophisticis elenchis〉 등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룬 일련의 논리적 질문들이 있다. 이 저술들은 〈옥스퍼드 강의록〉보다 후기에 쓰였고 파리 시절에 나온 듯하다. 파리에서 둔스 스코투스 밑에서 배웠던 제자 안토니우스 안드레우스는 자신이 포르피리우스와 〈De praedicamentis〉에 관해 쓴 주석서는 둔스 스코투스의 〈sedentis super cathedram magistralem〉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쾰른에서 보낸 마지막 생애
1307년 둔스 스코투스는 쾰른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곤잘부스가 그의 안전을 위해 쾰른으로 보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가 원죄를 짓지 않았다는, 논쟁의 소지가 많은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구원교리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완전한 중재는 단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예방하는 것임을 보이고자 노력했다. 무원죄잉태설에 대한 그의 탁월한 변론은 교리사(敎理史)의 전환점으로까지 기록되지만 곧바로 재속 수사와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들의 도전을 받았다. 이 문제가 정식 자유토론에서 거론되었을 때 재속수사 장 드 푸이는 스코투스의 주장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단이라고 선언했으며, 무엄하게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논쟁이 아니라 다른 조처를 취해서" 반박해야만 한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공정왕 필리프 4세가 부유한 성당기사단에 대한 이단재판을 시작했을 때 푸이의 말은 불길한 조짐이 되었고, 어쨌든 둔스 스코투스가 서둘러 파리를 떠날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스코투스주의자였던 보루용의 기욤은 1세기 뒤의 글에서 둔스 스코투스가 학생들과 산책하고 있을 때 각료의 편지를 받고서는 거의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서둘러 쾰른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쾰른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쾰른 대성당 근처의 프란체스코 교회 네이브[身廊]에 묻혀 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은총을 입은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파리를 갑자기 떠난 이유야 어떤 것이었든 간에 〈Ordinatio〉와 〈자유 토론집 Quodlibet〉을 미완성인 채로 남겨놓았다. 그후 열성적인 제자들이 그가 강의하지 않고 남겨둔 문제들 대신 〈reportationes examinatae〉를 보충하여 그 저술들을 완성했다. 1950년에 시작된 바티칸의 비평본은 원래는 그가 수정·교정한 〈Ordinatio〉를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들은 광범위하게 배포되었다. 보편개념은 개별자 속에 있는 '공통의 속성'에 바탕을 둔다는 그의 주장은 일반적인 유형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인지 실재인지에 대해 14세기 실재론자와 유명론자가 벌인 논쟁에서 핵심적인 문제점의 하나였다. 후에 이같은 스코투스주의의 원리는 둔스 스코투스를 중세의 위대한 사변가 내지는 "오늘날까지 가장 심오한 형이상학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둔스 스코투스는 왕권신수설을 반대하고 교황권을 강력하게 옹호했기 때문에 16세기의 영국 종교개혁가들에게 호평을 받지 못했고, '바보'(dunce=Dunsman)라고 불릴 정도로 불명예스런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스코투스의 직관적 인식이론은 제네바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에게 하느님이 어떻게 '경험'될 수 있는가를 시사해주기도 했다. 16~18세기의 가톨릭 신학자들 중에서 둔스 스코투스의 추종자들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추종자들과 경쟁했고, 17세기에는 다른 모든 학파를 합친 것보다도 그 수가 많았다.
토마스의 철학을 읽고 있으면 그 구상과 방대한 체계 내용이 꼭 성베드로 교회나 밀라노의 성 안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이든다. 그 모든 것이 카톨릭과 스콜라 사상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당의 많은 벽화와 조각 그리고 구조가 마침내는 신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상징되고있듯이, 토마스의 거대한 철학도 마침내는 하느님에 대한 영광과 구원의 역사적 완성에 맞추어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단테의 "신곡"을 읽으면서 또 한번 토마스를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단테 자신도 토마스를 '지식있는 사람들의 종사' 라고 불렀듯이, 중세적인 풍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 세계관이 신에의 영광과 찬양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시대와 사회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뒤를 따르는 사람도 많이 있었으나, 반대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이 일어났다. 도미니크 교단을 따르는 사람들은 토마스의 뒤를계승했으나, 이미 완성된 체계였기 때문에 새로운 학설은 나오지 못했다. 이에 비하면 반토마스 운동은 대립적 위치에 있었던 프란체스코 교단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된 특성이 있다. 무조건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던 토마스와는 다르게 플라톤 철학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근거로 토마스를 비판했는가 하면, 토마스의 주지주의를 비판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후에는 자연히 근대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중세기의 대표자인 토마스를 뒤로 돌리게 된 것이었다. 어떤 이는 책 제목 자체가 "수사 토마스를 시정함"이라고 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 사람들 중에 토마스와 맞먹을 정도의 대표적인 한 철학자가 나타났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1270-1308)였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옥스퍼드에서 가르치다가 명성과 걸맞게 쾰른으로 초청을 받았으나, 부임하는 해에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만일 토마스만큼의 긴 세월을 학문에 바쳤다면 또 한 사람의 토마스가 태어났을지도 모를 인물이었다. 그는 토마스와는 다르게철학과 신학, 이성과 신앙을 상호보완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구분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논리와 교리는 서로 자주적인 위치에서 학문적 본질이 평가받아야 한다. 자기 의식은 유일한 확실성의 원칙이며, 다른 모든 것은 그 주변을 돌고 있는 진리의 움직일 수 없는 중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수학을 연구했기 때문에 논증에 대한 엄격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의 내용까지도 논증을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에게는 참이 될 수 있는 것이 신학에 있어서는 거짓이 될 수도 있다. 신앙과 신학의 차원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논증을 초월한 은총과 신이 베푸는 내적 체험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후계자답게 인간성의 근본은 의지라고 본다. 의지가 지성보다 우위를 차지한다는 주장이다. 인식도 그렇다. 의지가 주의력을 집중시키면 외부적 대상을 받아들이지만, 주의력을 해산시키면 지적 노력은 사라지고만다. 강하게 의지가 알기를 요구했을 때 그 대상은 지적 내용으로 부각될 수가 있다. 사유와 지적 활동은 그 의지의 부차적인 협조작용을 할 뿐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꼭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읽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모든 결정력은 영혼의 욕구를 대신하는 의지가 내리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소중한 것이며 신의 가호를 받는 것이다. 이 자유의지 때문에 윤리학은 가능해지며, 지적 활동은 그 의지의 머슴에 지나지 못한다. 선은 참보다 우위에 있다. 의지는 실천을 전제로 하기때문에, 논리적 지식보다 윤리적 실천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신학은 지식을 주는 데있지 않고 신앙적 실현을 뒷받침 하는 것이다. 즉, 토마스의 이론과 학설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결과가 되었다. 이 의지의 핵심은 사랑에 있기 때문에 신앙은 신의 사랑의 실현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세계해석이나 보편논쟁의 문제에 관해서는 특이한 설명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많은 후계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콜라 철학의 주류는 교회의 후원을 얻는 토마스 학설로 되돌아간다. 교회는 언제나 전통적 권위를 지켜야 하며, 그것이 교권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반토마스적인 학설이 일어났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중세기의 종말을 예고해주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 계열의 이원론적이고 초월적 신앙관 보다는, 내재적이며 자연주의적 신앙을 새롭게 부각시켜 강조하기 시작한, 다소 진보적인 토마스의 신학적 주장에 대해 파리의 주교단은 이단의 단죄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단죄의 분위기 속에서 엑카르트는 참된 지성적 자유와 용기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이러한 단죄가 이미 파리의 신학 교수였던 겐트(1276-1292재직)와 옥스퍼드 대학 교수였던 철학자 둔스 스코투스(1300-1304재직)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5-1308)는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할 정도로 엑카르트와 관련하여 중요한 인물입니다.
둔스 스코투스는 엑카르트 보다 5살 아래인 동시대인으로서, '보편자'는 단지 이름에 불과 할 뿐이고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자 윌리엄 오캄(William Ockham, 1280-1349)과 함께,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적 계보를 부분적으로 잇거나 반대했던 중세 철학사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특히 스코투스는 이성의 우위를 강조한 아퀴나스에 반대하여, 신(神)에 내재하는 '의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를 강조하였고, 엑카르트는 아퀴나스의 이성적 구성에 반대하여 영적 수련에 의해 신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경험 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를 주장함으로써 모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룬 신학과 철학의 종합적 체계를 다시 분리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스코투스가 말하는 주의주의를 조금 더 말씀드리면, 아퀴나스가 신과 인간의 의지(意志)가 지성(知性)에 종속 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대 입장을 말하는 것으로, 신은 지성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신의 지성보다는 신의 의지에 더 원초적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지요. 이 말을 더욱 확대해석하면 신의 의지와 명령은 비이성적이기도 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토마스에 의하면 도덕도 이성에 의해 발견되는 한에서 선한 것이라고 한다면, 스코투스는 도덕이 이성이 아닌 의지에 기초한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그런 점에서 도덕은 철학의 주제가 아니라, 신앙과 수용의 문제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신의 존재 증명 또한 개연적 논증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철학적이기보다는 신앙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유명론을 주장한 오컴 또한 신앙과 이성을 구분하면서, 스코투스가 주장하는 주의주의적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오컴에게는 오직 구체적인 개별 사물만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人間性, humanity)'과 같은 보편적 개념은 오직 '이름(名目)'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없고, 철수나 순이 같은 개인 존재만이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인간 이성도 개체의 세계에만 국한 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컴이 "보편자는 인간의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점에서 보편자가 '개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ante rem)' 신의 정신 내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적 이데아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신학적 진리와 철학적 진리의 건널 수 없는 분리를 야기하기도 한 셈입니다. 오컴의 사유 방식은 철저히 경험주의적 방식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아퀴나스가 이룩했던 이성과 신앙의 종합은 다시 각각 철학과 신학이라는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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