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수기] 자수성가 하면서 바닥에서 시작한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편입 합격수기 (대입시험 수학 18점, 군대가기 전의 학점 2.74)
제목대로 바닥에서부터 편입을 준비했다.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정말 인생의 바닥에서부터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그리고 그것을 통해 인생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대단한 노력과 의지를 요구한다. 남들이 의심하든 말든 상관없이 정직하게 편입수기를 쓰고자 한다.
나의 가족은 삼양동 서민촌에 살았다. 알콜중독자 아버지는 가난한 건축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인형공장에서 바르질을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열악한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친누나와 나는 비뚤어지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학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단지 고등학교 수업만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기에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문과 수학 55점 만점에 18점취득.. 이것이 내가 대학입학시 취득한 수학점수이다. 전적대학 합격자 면접시 내 수학점수를 보시고 전적대학 학과장 교수님이 "왜 이렇게 수학 점수가 나쁘냐?"고 질문을 하셨다. 역대 대입시험 합격자 역사상 수학 18점으로 대학입학 합격한 학생은 내가 처음이란다. 영어, 일본어, 생물, 윤리 등은 만점이었다. 수학의 취약함을 나머지 과목으로 지탱해 온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중에 또 다시 적용이 되었다. 이래서 인생은 참 아이러니 한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기적적으로 대학에 합격했다. 그리고 1학년 1학기에 4.14의 성적으로 과수석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참고로 이 당시에는 한국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서는 1학년 1학기 때에는 다들 놀자는 분위기였었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면 높은 학점을 받기가 비교적 어려운 시절이었다. 내가 대학교 1학년이었던 그때 당시는 강의는 대충 듣고 신나게 놀러 다니는 일부 대학생들에게까지 A+학점을 삽으로 마구 퍼다주는 그런 편한 시절은 아니었다.
그 즈음 친누나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 졸업 후 당당히 청와대 경호실 ##처에서 한시적으로나마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집안의 경사는 계속 이어졌다. 20여년도 넘게 살았던 삼양동 서민촌 부모님 집에 2001년 겨울에 재개발 아파트가 생기게 되어, 20여년전에 920만원을 주고 샀던 부모님의 삼양동 18평 서민촌 집이 2007년 현재는 4억이 훨씬 넘는 33평형 새 아파트가 되었다. 친누나의 사회적 성공, 그리고 집안의 경사..그리고 군대 가기전 짝사랑의 실패, 그리고 그로인한 정신적인 방황... 군복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나는 점차 나태해졌다. 그리고 2.74라는 최악의 학점을 받은 후에 휴학을 한 후 공익근무요원으로서 군입대를 하였다. 이 시기가 나에게는 내 인생의 가장 어둡고 불안했던 방황하던 시기 중의 한때였다.
낮에는 종로구청 교통지도과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면서 밤마다 틈틈히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편입을 준비하며, 고려대학교 근처 종암동에 위치한 입시학원에서 영어강사로서 고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번번히 희망하던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시험에 낙방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영어영문학과에서 영어영문학과로 편입을 하려고 한 것이 편입 실패의 주요인이었다. 동일계열 지원을 금한다는 편입학 요강을 무시하고 영어영문학과로의 편입만 고집을 부린 것이 실책이었다. 역시 무슨 시험을 보든 입시 요강을 꼼꼼히 읽어 봐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이 당시 얼마나 정신적으로 방황을 했던가... 너무 너무 힘든 순간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두번이나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편입시험에 낙방을 하고 군제대하던 해에 영국으로 교환학생(이 당시 정식 명칭은 Business Language School Student)으로서 유학을 갔다. 참고로 내가 공부하던 Class에서 한국남자가 나 혼자 뿐이라서 영국 유학 생활 중 내 별명이 Eastern Boy, 즉 "동양남자" 였다. 이 때의 Newcastle대학교에서의 외국 경험이 내게 세계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유학을 위해 영어 공인시험 중의 하나인 G-telp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 즈음이었다. 하지만 1997년 겨울 한국을 강타했던 IMF로 인해 나는 곧 한국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 부모님께서 영국으로 학업비를 송금해도..달러나 파운드는 가치가 높아졌지만..한국 원화의 가치는 절하되어 E2 Visa를 얻어서 영국 현지에서 일을 해가며 공부하면서 돈을 벌지 않으면 도저히 영국에서의 유학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 왔다.
그 즈음 친하게 지내면서 함께 동대문 김영 편입학원에 다녔던 N**이라는 친구가 편입시험에 먼저 합격을 하게 되고, 그 친구의 편입합격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며 자극이 되었다. 편입에 번번히 떨어진 것을 벌충하기 위하여 Toefl, Toeic 등의 공인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즈음이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 친구는 M전문대학교 부동산학과에서 4년제인 M대학교 법학과로 편입에 성공하여 M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후 국제 변호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이 친구의 셋째 형은 35살이라는 교수로서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M **대학교(서울 캠퍼스)의 ####학과 전임교수가 되었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내 편입준비에 큰 자극제가 되었음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시 전적 대학교로 복학한 나는 불량 학점을 재수강으로 메우고 다시 편입공부에 매진했다. 군대 가기 직전에 받은 2.74라는 치명적인 불량학점 때문에 엉망이 되었던 성적을 4년 평균 4.0대 이상으로 끌어 올린 것은 탁견이었다. 더구나 그냥 4.0대 이상의 학점도 아니고 무려 "160학점"에 4.0대 이상의 학점을 달성하여 주변사람들을 다시금 놀라게 하였다. 정말 엄청난 노력과 땀이 필요했다. 매 학기마다 학점을 많이 신청할수록 그만큼 높은 학점을 취득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전체 학점 평균 4.0 이상의 학점을 취득한 학생들에게 대학교에서 소위 '조기졸업'기회라는 혜택의 일환으로 주는 추가학점 신청제도를 이용하여 매 학기마다 23학점 이상을 신청할 수 있었던 나는 매 학기마다 23학점 이내에서 10과목 정도를 수강신청하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주중에 수업이 너무 많아서 밥을 먹을 시간이 없어서 샌드위치로 밥을 대신하며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중간, 기말고사때마다 수강신청을 했던 10과목이 넘는 수강신청 강의들의 중간, 기말고사 시험을 치루느라 엄청 고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학년 2학기를 4.28로 장식하며, 4년 총평점 4.0을 초과한 학생에게 주는 성적 우수상을 받고, 전적대학인 한양대학교에서 중등교사 2급 영어 교원자격증을 취득하자마자 졸업 예정자로서 학사편입을 하여, 한양대학교를 졸업한지 1주일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3학년으로서 당당히 편입학 시험에 합격을 하였다.
그러나 고려대학교에서 다시금 교만하여져서 나는 학점을 엉망으로 받고 졸업을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후회가 되는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창시절이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자 편입을 한 것인데..영어영문학을 그렇게 오랫동안 전공했던 내가 영어영문학과에서 그렇게 학점을 못 받다니... 정말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도 이 당시 나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고 싶어서 틈틈히 Teps시험 준비를 하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애쓰기도 했다. 학업에 대한 나의 열의는 결코 시들줄을 몰랐던 것이다.
아무튼 영어영문학만 6년이나 전공한 나는 돈을 벌기 위해 4년동안이나 입시학원에서 고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영어강사로 일했다. 하지만 근무하던 학원들에서 그리 오랫동안 근무하지도 못하고, 번번히 학원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며 실패를 거듭하자, 사귀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지면서 나는 다시금 수학 18점 받던 고3 때처럼 폐인이 되었다. 4년간 학원에서 돈을 열심히 벌었지만, 돈 씀씀이가 헤펐던 옛날 여자친구에게 흥청망청 돈을 마구 허비했었기 때문에, 4년간 학원 영어강사로 근무할 때 당시 내 통장에 남은 돈은 경제적 독립 비상자금 5000만원을 제외하고는 항상 탔?은행잔고가 없는 상태였다. 그때 당시 나는 거의 거지나 다름없었다. 결국 내 돈이 바닥이 나 버리자 그 옛날 여자친구는 내가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나를 버리고 나이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 버리고 말았다. 그때 당시 얼마나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던지...인생의 쓴맛을 처절하게 느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지금에와서 다시 생각해보건대 진정한 인연이 아니었기 때문에 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좋은 교훈을 배웠으니 잘된 일이라고 자평해 본다.
잇다른 실패와 폐인 생활을 접고, 나는 '배용준, 앙드레김, 표인봉' 등을 배출한 서울 강동 소재의 명문고등학교인 (서울) H*고등학교의 기간제 영어교사가 되었다. 전적대학에서 영어 교원자격증을 받은 것이 큰 힘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실직하기 쉬운 학원 영어강사보다는 보다 안정적인 고등학교 영어교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영작문 수업을 들었던 것도 좋은 경험이 되었다. 결국 그 다음해에 나는 (서울) **외국어 고등학교의 영어교사로 근무하였고, 2007년 현재 (서울) **고등학교에서 영어 정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정말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쓰러지면 또다시 일어나는 오뚜기같은 기사회생이란 바로 나같은 경우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하지만 또 다시 교만은 내 인생을 뒤틀어 놓았다. 조부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시고, 조부께서 살고 계시던 전주 시골집에 불이 나서 조부님 집이 전소되고, 이 일로 화병이 나신 백부인 아버지일로인해 불화가 잇다르면서 우리 집안은 다시금 절망의 도가니로 빠져 들었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따로 떨어져서 살게 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나까지도 집에서 독립해서 이전에 학원강사와 기간제 교사로 지내며 모았던 5000만원으로 길음동에 전세방을 얻어 혼자서 전전긍긍하며 억척같이 저축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이 당시 연이은 집안의 불화로 인해 심적으로 너무 괴로웠었다. 이때 소리없이 나를 위해 기도로써 도움이 되어주며, 열심히 사는 모습의 모범이 되어준 시집간 친누나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집안 불화에도 불구하고 억척같이..정말 억척같이 밥도 굶어 가면서 억척같이 저금을 하여 약 3년 6개월 만에 억대가 넘는 돈을 저금하여 서울 7호선 **역 앞에 있는 역세권 대단지 아파트를 한채 샀다. 32살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억대가 넘는 돈을 모아 서울에 역세권 대단지 아파트를 사다니.. 나는 다시금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 당시 나는 하루에 저녁 한끼만 먹었고, 봉급을 받으면 거의 쓰지 않고, 세금을 제외하고 거의 다 정기적금에 투자를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 "영어"라는 주요과목의 특성상 방학기간 동안은 물론 각 학기 동안 영어 보충수업 강의는 기본으로 다 했고, 야간 자율학습 감독 등 합법적으로 돈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 다 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여자를 만나 돈쓰는 것은 무조건 자제했다. 그리고 남는 방학 기간에는 영어교사 영어회화 합숙연수를 다니면서 방학기간 동안 식비도 절약하고, 연수가서 만난 외국인 강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영어회화 공부도 하면서 연수 학점도 쌓아갔다. 그 덕분에 32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서울 7호선 역세권 대단지 내 아파트를 살 때까지 나는 여자친구도 없이 솔로로 외롭게 지내면서도 억척같이 열심히 살았다. 정말 억척같이 살아온 세월이었다. 아무리 나쁜 상황에 있어도 결코 삶을 포기하거나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긍정적인 자세...그런 긍정적인 마음이 나에게 최악의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다시금 꿋꿋하게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남들이 들으면 놀라게 될 일들이 계속 이어졌다. 이전에 화재로 전소되었던 전주 조부님 집터에 아파트 재개발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조부님으로부터 유산으로 물려 받은 그 불탄 초라한 집터가 금싸라기 땅이 되어 그 지역 땅값이 마구 치솟았다. 더구나 내 아파트 주변에 있는 삼성 래미안 아파트, 현대 아파트 등의 집값이 크게 올라서 2005년 10월에 내 이름으로 사두었던 역세권 대단지 내 아파트의 집값이 여러가지 지역발전 호재등으로 인해 지난 2005년 10월에서 2006년 10월까지 1년 사이에 1억이 훨씬 넘게 급격히 올랐던 것이다. (1억 천만원주고 산 그 아파트가 매매한지 3년안에 3억정도로까지 올랐다!) 억척같이 저금하여 30대 초반에 억이 넘는 돈을 저금하여 아무런 은행 융자 없이 내가 저축해 둔 돈만으로 내 아파트를 사 두었기를 정말 잘한 것 같아 요즘 들어 보람을 느꼈다.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나를 힘들게 했던 일련의 가정불화가 나중에 모두 복이 되어 돌아왔다. 끝까지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에 얻게 된 결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장은 고난이고 힘든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편입도 마찬가지이다. 당장은 어렵고 공부하는 과정이 고난처럼 보여도..결코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면 나중에는 결국 찬란한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고3 대입시험에서 수학 18점으로 대학 합격을 했던 나였다. 2.74라는 최악의 성적을 극복하고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에 합격했던 나였다. 4년간의 방황했던 일용직 학원 영어 강사생활을 접고, 당당하게 (서울) **고등학교의 영어 정교사가 되었던 나였다. 3년 6개월만에 아무런 융자나 빚없이 순수하게 저금한 돈으로 32살이라는 아파트를 사기에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서울에 역세권 대단지 내 아파트를 샀던 나였다. 36살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해서 4억원 가까이 재산을 모았던 나였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 나처럼 인생의 밑바닥에 수차례 쓰러졌던 폐인도 이렇게 기사회생하여 오뚜기처럼 다시,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는데, 하물며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못할 것이 그 무엇이 있겠으며, 지독하고 험란한 인생의 여정을 걸어왔던 나보다는 더욱 더 평탄한 인생을 살아 왔을지도 모르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못할 것이 그 무엇이 있겠는가?
출신초등학교 : (서울 삼양동 소재의) 서울 미양초등학교 6년 개근 출신중학교 : (연세대학교 건립자인 언더우드 목사님이 1885년에 설립한 서울 혜화동 소재의) 경신중학교 3년 개근 출신고교 : ('김한국, 송승헌' 등이 졸업한 서울 미아삼거리 소재의) 영훈고등학교 3년 개근 전적대학 : 한양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유학경력 : 영국 Univ. of Newcastle (뉴캐슬 대학교 ; Newcastle은 지명이니까 New와 castle은 붙여씀) Language Course 교환학생 (이 당시 정식 명칭은 Business Language School Student) 편입대학 : (서울 안암동 소재의)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편입 합격 군복무 : (서울) 종로구청 교통지도과 공익근무요원 9기 (이 당시 별명 : 검프 / Gump) 사는 곳 : 서울 7호선 ****아파트 **단지 ****동 ***호 (역세권 대단지 아파트) 경력 : 학원 영어강사 4년, 학교 영어교사 8년 (2009년 기준) 기간제교사 (서울 강동구 H고등학교), 영어 정교사 (서울 K구 ** 외국어 고등학교), 영어 정교사 (서울 K구 ** (남자)고등학교) 영어 정교사 (서울 K구 ** 여자고등학교) 2008년 12월 29일 - 2009년 2월 6일 : 서울특별시 교육청 제 1급 (영어) 정교사 연수
현 근무처 : (서울) **여자고등학교 영어 정교사 (2009년 3월 기준 교원 19호봉)
연락처 englishmania@hanmail.net
[P.S.] 나는 2007년 5월 5일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다. 신혼 여행은 5박 6일동안 몰디브로 다녀왔다. 지금은 아내와 막 100일이 지난 갓난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며, 더 넒고 쾌적한 역세권 40평형대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가기 위해서 변함없이 열심히 저축을 하고 있다. 결혼하고 난 후 열심히 저금해서 1년 6개월동안 나 혼자서 6300만원 넘게 모았다. 아내는 1년 동안 700만원을 저금했다. 2009년 기준으로 내 나이 36살에 4억 가까이 재산을 모은 셈이다. 학업에 대해서는 평소에 바라던대로 내가 원하는 (서울소재) ** 대학교 ****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고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틈틈히 열심히 영어 공부와 전공 공부를 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이 편입을 준비하면서 이 글을 읽음으로 인해 많은 용기와 격려를 얻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편입합격은 열심히 성실하게 준비한 자의 결실임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말이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한 두번의 좌절과 실패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 한 두번의 좌절과 실패를 성실과 노력으로써 잘 극복할 수 있을 때, 궁극적으로는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넝무 좋은 수기라 퍼왔습니다.. |
첫댓글 대단한 사람이네요..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해야겠어요..
정말 정말 대단하시네여..... 보면서도 빠져들면서 봤습니다... 정말 저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네여...
대단 하심 ㅎㅎ
와~~
불가능이란 없다.. 도전이 되었어요
우아~
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