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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월 14일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영화배우 최은희가 납북되고 최은희를 찾으러 온 신상옥 감독까지 동년 7월 19일에 납북된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함께 당시만 해도 아직 베일에 가려진 김정일이라는 존재를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각인시킨 사건이다
당시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과 이혼한 뒤[2][3] 안양영화예술학교 교장직을 역임하며[4] 후학 양성 중이었다.
그 때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북한 사람들과 조총련 관계자들이 최은희에게 합작 작품 및 지원을 의논하고 싶다며 최은희를 홍콩으로 초청한다. 신상옥 감독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후원 교섭을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최은희는 학교의 발전을 생각하며 홍콩으로 갔는데, 며칠 일정대로 움직이더니 마카오로 넘어갔다가 뜬금없이 중국 본토로 가는 배에 태우고 '우리는 지금 장군님 품으로 가는 중입니다'라고 하더란다. 최은희는 울며불며 내려달라고 외쳤지만 결국 이들이 준비한 마취제에 의해 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배 안의 침대에서 깨어났는데 벽에 걸린 거대한 김일성 사진을 보고 다시 한 번 기절했다고… 신상옥 감독은 홍콩에서 실종된 최은희를 수소문하다가 자신의 지인과 친한 사이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게까지 정황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는데, '납북이 틀림없다'는 말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아무리 이혼한 사이지만 수십년을 같이 지내온 동반자가 사라졌다는 것으로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이유가 납북이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5]
결국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갔던 신상옥 감독도 납북되고 만다.[6] 현지에서 신필림 홍콩지사를 운영하던 교포 이영생이 사실은 북한의 공작원이었던 것. 거기에 신상옥의 지인이자 신필림 홍콩지사장을 맡고 있던 김규화가 그들이 쥐어주는 돈에 넘어가서 거짓 일정을 만들어준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그는 귀국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을 복역했다.
납북 루트는 홍콩에서 당시 북한 공작원의 아지트였던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북한에 들어간 것. 북한인의 홍콩 입국은 까다로운 관계로 일본으로 귀화한 조총련계 인사들을 앞세웠으며 이들은 일본 여권을 들고 있어 홍콩 이민국의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홍콩 경찰은 형사조사국(CID)을 앞세워 두 사람을 중국 본토로 끌고 간 정체불명의 일본인들을 추적했고, 이들의 정체가 북한 공작원임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3. 월북 루머
사실 신상옥과 최은희는 이제서야 납북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북한으로 밀입국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박정희와 신상옥의 불화가 배경이었다. 시작은 신상옥이 겁도 없이 전태일 분신사건을 영화로 찍겠다고 말하고 다닌 것이다. 당연히 분노한 박정희 정권은 신상옥의 영화 촬영을 방해했다. 여기에 화가 난 신상옥은 1975년 '장미와 들개'라는 자신의 영화에서 검열삭제 당한 오수미의 상반신 노출장면을 예고편에 집어넣는 반항을 했다. 이 사건으로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름'의 인가를 취소당했고, 신상옥이 여기에 행정소송을 냈다가 남산으로 끌려가는 사건까지 있었다. 결국 행정소송은 취하되었다. 최은희가 납북되는 계기인 안양예술고등학교의 경우도, 다른 사람도 아닌 신상옥이 이사장인 학교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면 정치적 외압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 사라진 것이다. 납북보다 밀입국 설이 신빙성을 갖고 회자될 수 밖에 없었다.
4. 북한에서의 생활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북한에 끌려왔지만 비교적 환대를 받으며 생활했다. 최은희의 경우 남포항에 도착하자마자 김정일이 인사하러 직접 나와서 기다렸고 최은희를 보자마자 크게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7] 최은희는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겨 악수를 했고 공식 사진도 남아 있다. 최은희는 주변에서 자꾸만 사진을 찍어대서 움찔움찔 놀라고 신경질적으로 찍지말라고 외치며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신 감독의 경우에는 납치된 이후에 처음엔 배후를 북한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생각하여 박정희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8] 자신을 납치한 것이 북측의 공작원들이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죽일 속셈은 아닐거라 여기고 여유있는 모습을 취하며 배 안에서 영화를 보는 등 공작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누렸다. 북한에 끌려온 다음엔 벤츠 승용차를 탈취해서 청천강까지 달려간 후 정주 즈음에서 기차로 갈아타서 중국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석탄간 위에서 꼬박 잠드는 바람에 기관사에게 들켜 끝내 잡히고 수용소에서 상당한 고생을 한다. 하지만 수용소를 나오자마자 다시 숙소의 군관 방에 숨어 2차 탈출을 시도하려다가 몇년이나 수용소에서 사상교화를 빙자한 고문을 당했고[9] 큰 고생을 하곤 교화소로 이동했다. 거기선 대접이 좀 나아서 비곗덩어리도 제공되었는데 이웃 죄수들과 대화하는게 금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웃 죄수들과[10] 수다를 떨며 정보를 얻다 걸려서 징계를 받는다. 눈에 띄게 형편없어진 식사에 저것들이 설마 나를 죽이려나? 싶어서 그들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 단식을 했다. 처음에 간수들은 그래봐야 당신이 손해다. 단식질 하다가 나중에 빌던 놈 많다, 나중에 그쪽에서 밥달라고 애원할걸?이라고 비웃었지만 6일을 내리 굶은 신상옥이 똥오줌을 싸고 기절하자 온 교화소가 발칵 뒤집혔고 정치보위부장[11] 김병하가 달려와서 "저 사람 죽으면 너희들도 죽는다!"라고 길길이 날뛰어 그를 의무실로 옮겨 그때부턴 잘 대우했다고 한다. 이후 김정일은 신상옥의 '반성문'을 접수한 다음에 그를 풀어주어 최은희와 재회하게 한다.
이후로 이들은 북한에서 재결합했고, 부부는 매우 대접을 잘 받아 최은희의 경우에는 납치된 직후에 심지어는 아무나 못 간다는 김정일 생일파티에 김정일 본인이 초대해줬다고. 당시 김정일은 북한의 공식 후계자로 아버지 김일성에 못지 않은 최고의 실권자였다. 당연히 김정일의 생일파티에는 북한에서도 엄청난 상류층이 아니면 절대 갈 수 없었다. 최은희의 감시원인 강해룡과 김학순은 자기들도 아직 못가본 자리라고 엄청나게 부러워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시 7세였던 김정남과 성혜림까지 만났으며, 최은희가 김정남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자 감히 자신의 이름을 묻는 사람을 처음 본 김정남이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남의 이름을 다 물어?"라고 중얼거리면서 꽁무니를 빼자 곧바로 김정일이 "어른이 말씀하시면 예 저는 누굽니다 이렇게 대답하는거야."라고 타일렀다고.
이렇게 환대를 받고 김정일과 가깝게 지냈다 해도[12] 가족들이 한국에 있는 마당에 억지로 끌려와서 경험하게 된 북한에서의 생활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다. 우선 탈출 우려 때문에 늘 도청과 감시를 받고 있었고 언제라도 자신들이 필요없다고 여겨지면 제거될지 모른다는 스트레스에 최은희는 이동만 시켜도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였다. 또한 사상 교육과 개조를 한다며 주체사상과 김일성 교시 등을 교육시켰는데 이걸 수시로 받는것도 고역이었다.
최은희는 밤 11시에 한국의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들었는데[13] 자신의 실종 소식을 안타까워하는 라디오 진행자[14]가 울먹이며 "언니, 어디 있어?"라고 하는 목소리를 듣고 수도꼭지를 틀고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이들은 북에 끌려온지 5년이 지난 후에야 김정일의 주선으로 재회하게 되는데 그들은 너무도 큰 충격으로 너무도 어색하게 서로를 쓸어안았다. 신상옥 감독은 만약 자기 배우들이 그랬으면 화 내면서 컷 외쳤을 동작이라고 했다.[15] 파란만장했던 북한에서의 생활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상옥 감독이 자신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북한에 똑같이 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 모든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16]
여차저차 하던 와중에 목적을 가지고 이들을 납치했던 김정일의 권유를 받고 전폭적인 지원 아래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촬영소를 차리게 된다. 애초에 김정일은 문화, 특히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17] 영화분야를 발전시키고 싶어 이들을 납치했다고.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 신필름이 허가 취소를 받은 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 신상옥 감독이 납북되었고 몇 년 후에 북한에서 신필름을 차리게 된 것인데 참 여러 가지로 영화같은 이야기.
사실 분단 당시에 많은 문화예술 인력들이 당대 연예인들이나 문화예술인에 대한 대우가 그야말로 형편이 없었고, 딴따라, 저급문화라며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어 공산주의 사상에 감화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북한이 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적이었던지라 인재풀 자체는 북한이 남한보다 더 풍부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차츰 차츰 권력을 강화했고 대중문화 부분에 있어서 그야말로 세세한 부분에까지 일일이 간섭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최승희, 안막, 임화처럼 정치투쟁에 휘말려 숙청된다든가 백석이나 심영처럼 중앙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좌천당하거나 하방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또한 그 과정에서 소재제한도 강화되었는데 북한의 문화예술인들이 한직으로 내몰리거나 예술계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소재제한을 의식해 연극과 영화, 노래, 소설, 만화, 드라마 등을 만들었고, 결국 문화예술 부분으로는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해 있었다. 실상 따지고보면 남한도 영화나 만화, TV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이런저런 제약이 많았기는 했고 실제로도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출연이 끊기거나, 배우들이 강제로 반공영화, 반공드라마에 출연시킨다 하는 등 온갖 말도 안되는 전횡들이 횡행하던 시절이었지만 국가에서 배우와 작가들의 일거리를 보장해주지는 않았기에 어떻게든 벌어먹을 방법을 찾아야했고, 또한 북한이 검열의 끝판왕급이었던지라 그나마 북한보다는 상대적으로 제약이 덜했기는 했다. 여하튼 북한의 김정일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노력하지 않는 북한의 예술 관련 인민들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하고 경쟁하는 예술인들이 더 뛰어나더라"는 사실을 본인의 입으로 인정하게 된다.[18] 분명 깨닫기는 잘 깨달았는데 갈수록 더 막장을 만들었지
김정일은 대외 선전용으로 영화 예술의 힘을 빌리고 싶었으나, 북한 내부의 인력들은 수많은 제약에 길들여져 있고 이런 분야로는 워낙 인재가 없었기에 두 부부를 일찍이 점찍어 놓고 납북을 계획했다고….[19]
신상옥 감독과 한국 언론에서는 김일성에게 바치기 위해 최은희를 납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최은희도 이미 50대, 김일성 역시 칠순을 앞둔 노인이었다. 애초에 기쁨조가 있는데 뭐….[20] 김정일은 오히려 최은희를 어머니 대하듯 깍듯하게 모셨으며[21] 최은희의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기 위해 "최은희씨 저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니까"라며 자기성찰 개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신상옥 감독에게는 '내가 최 여사를 아버지한테 바치려고 데려왔다는 소문이 돈다던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렇게 깨끗이 최 여사를 돌려드립니다'라고까지 했다.
그리하여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게 되고, 유럽 쪽의 영화제에 여러 편의 작품들을 출품한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소금' 등을 출품, 그 외에도 '춘향전', '불가사리' 등 여러 작품을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22] 하에 제작했다. 최은희, 신상옥 부부의 작품은 당대 북한 영화계 기준으로는 블록버스터급 작품이거나 참신한 영화들이었기에 북한 인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줌과 동시에 큰 인기를 얻었고,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도 흡족해할만큼 작품성도 뛰어난 작품들도 찍어서 해외영화제에서 상도 타게 된다. 최은희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고, 신상옥 감독은 감독상 타고… 이러던 와중에 런던의 영화제에서 한국의 영화배우 남궁원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23]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측 감시원들에게 신뢰를 주고 훗날 계획해둔 탈출을 쉽게 하기 위해 남궁원에게 북한 체제 찬양과 김일성의 찬양을 했다고.[24] 이렇게 북한에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한편 한국 정부는 체제경쟁, 보도통제 등의 명목으로[25] 이들의 납북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이들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납북 6년 후인 1984년 4월 2일에 와서야 이 사실을 공개하게 된다. 당시 세간에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과 배우가 동시에 사라진 후 난데없이 북한에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지금 예를 든다면 박찬욱이나 이영애가 실종되었다가 6년만에 북한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게 공개된 것이나 같은 일, 사실 박찬욱이나 이영애 이상으로 1960~7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신상옥 최은희의 비중은 컸다.
이 때 증거로 제시된 건 두 사람이 북한의 명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육성 테이프 그리고 자필 편지였으며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이 미국 입양(혹은 유학)을 미끼로 신상옥의 두 아들을 해외로 유인 납치하기 위해 두 사람을 사주해 조총련과 연계된 일본인을 통하여 서울로 사진 등을 보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실 그 일본인은 멀쩡한 교도통신 기자 에노키 아키라(榎彰, えのき あきら)로 신상옥의 지인이었으며, 우리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북한에 살게 됐다는 암묵적인 언질까지 서울의 가족들에게 넌지시 전해준 상태였다.[26] 즉 신상옥은 북한의 추가 납치 공작을 역으로 이용해 부부가 함께 납북되었음을 전세계에 공표한 셈. 이쯤 되면 무서운 사람이다.
5. 탈출 과정
1986년 3월 13일에 영화 촬영과 관련하여 중립국인 오스트리아의 빈을 방문하던 중 미국 대사관으로 기습 입장하는데 성공하여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망명한다.[27]
신상옥은 앞서 언급한 에노키 아키라에게 빈에 갈 것이라고 알렸으며 점심 약속을 핑계로 불러냈다. 그리고 북한 감시원들의 감시를 따돌린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에노키 기자가 탄 택시가 도착하자 같이 동승하여 숙소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숙소에서 멀리 떨어졌음을 확인한 이들은 택시 기사에게 미국 대사관으로 방향을 바꿔 줄 것을 요구했고, 에노키 기자에게 자신들은 자진 월북한 게 아니라 납북당했으며, 자신들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빈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택시에서 뛰쳐나와 뒤도 안돌아 보고 미국 대사관 안으로 뛰어들었다.[28] 이렇게 망명에 성공한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곧장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거주하였다. 바로 한국으로 갔다간 워낙 북한과 지척이라 배신자를 처단하라는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추격자나 스파이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고도 한다. 또한 북한의 이름으로 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하여 해외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아서 한국에서는 이들이 배신, 변절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또는 영화사 허가 취소를 받은 신상옥 감독이 최은희를 찾을 목적 겸 해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진 월북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납북수기에서 살기 위해서 한 행동들이라고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말 그대로 영화처럼 탈출에 성공한 이 부부는 미국으로 망명하는 길을 택해서 북한의 암살공작원들이 자신들을 해코지하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리고 한국 정부(정확히는 국가안전기획부)가 자신들을 북한의 영화 발전에 기여하고 동조했다면서 추궁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책임을 물을 걱정들을 영화처럼 일거에 날린다. 실제로 안기부는 훗날 신상옥 감독을 취조하면서 무조건 그가 자진 월북했다고 멋대로 결론 짓고 "십수년 전 홍콩에서 머문 호텔 방번호를 불어라!" 라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심문을 했고 신상옥 감독이 써낸 탈출기는 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수사나 심문기법이 후진적이었던데다가 눈돌리기에 눈이 멀어 살인범을 영웅으로 만들고 살인 피해자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을 때가 이 때였는데 못된 버릇이 신상옥 감독에게도 도진 것이다. 정작 일본의 뉴 오타니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도쿄 경시청장은 신상옥 감독을 보고 "선생님이 쓰신 수기를 모든 직원들이 돌려 보고 있습니다." 며 그에게 존경을 표해 신상옥은 한동안 벙쪘다고 한다.
6. 미국에서의 생활
미국의 CIA는 자국에 망명한 이들 부부의 목숨에 50만 달러의 현상금이 북한에 의해 걸려 있는 상황에 맞서 언제나 그들을 경호해 주었으며, LA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집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북한은 영화 제작 비용으로 쥐어준 230만 달러를 횡령하기 위해서 부부가 배신했다고 날뛰었지만,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돈을 돌려 주자 말을 바꾸어[29] 미국의 납치극이라고 날뛰었고 신상옥에게 없던 일로 할테니 돌아오라고 수차례 접촉하기도 했다. 신상옥은 그래도 북에서 잘 대접받은 것 때문에 북측에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자 북한 측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CIA가 그럼 경호하기가 어렵다고 허락하지 않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 부부는 CIA에 중요한 정보로 활용될 수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일상적인 대화[30]를 녹음해 왔는데, 그야말로 희귀한 육성 테이프를 미국 정보기관 CIA에 제공하는 대가로 미국 정부는 이들 부부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한다. 정말 영화도 이런 영화가 없다. 그야말로 각본 없는 제대로 된 한 편의 시나리오다. 해피 엔딩.
이듬해인 1987년에 《김정일 왕국》이라는 납북 수기를 써서 동아일보의 김일수 특파원의 도움을 받아 출판한다. 8년간의 북한에서의 생활과 김정일과 고위층들과의 만남, 여러가지 북한에서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소망하던 탈출을 이루기까지 적나라하게 밝혀낸 서적이지만 앞서 말한대로 시기가 시기인지라… 1989년 노태우 정부의 방한을 권유받아 일시 귀국하였다. 이 때 국가보안법에 따라 안기부에서 21일 간 조사를 받았다. 상술한 말도 안 되는 심문이 벌어진 것이 바로 이 때다.
이후 신상옥 감독은 1990년에 대한민국 복귀작을 내놓는데, 북한의 KE858기 폭탄 테러 사건을 영화화하여 마유미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에 개봉한다. 영문 제목은 《Virgin Terrorist》.[31] 마유미의 촬영은 한국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김현희가 김승일과 머물던 부다페스트 호텔 씬을 현재 그랜드 힐튼 호텔이 된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 촬영했다. 이후에도 미국에서 계속 활동했다.
후일 신 감독은 1994년 증발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극중 이름은 다르지만 노골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디스하는 영화로서 지금까지 말이 많은 김형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과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실상을 전달하려 했다. 한국에선 일부 장면이 가위질당하고 흥행엔 실패했지만 칸 영화제 초청작에 오를 정도였다.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날선 비판이 어느 정도였냐면 본인이 북한에 납치당했던 감독이 영화 속 대사를 통해 "북한도 있는데 어디서 데모질이나"하냐고 중앙정보부에서 여대생 강리나를 고문하고 강간 하는 장면이 나오고 북한을 빌미로 독재를 시행하는 군사정권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사실 1990년대 중반 정도면 꽃잎이나 모래시계, 제3공화국, 제4공화국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크게 민감했을때였다. 그런데 신상옥의 증발 수위는 지금으로 봐도 상당한 수준이라서 권력자들이 나체의 여성을 덮치는 장면이 수두룩하게 나올 정도였으니 한국 배우들은 아무도 대통령 역을 맡으려 하지 않아 미국 배우 조지 타케이[32]가 대통령 역을 맡았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역은 대배우 김희라가 맡았다. 초기 시놉은 아시아의 어떤 국가라고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고 한국어를 쓰며 무엇보다도 마지막 장면 뉴스 영상에서 대통령 유고후 미국은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항모를 파견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미국에 살던 신 감독은 몇차례 영화를 만들어 성공을 했지만[33] 아시아계 감독이란 이유로 미국에서 그에게 주어지는 감독직은 싸구려 무협물을 비롯한 뻔한 자리였고 만들고 싶은 영화를 못 만들던 신 감독은 매우 괴로워했다고 한다. 2000년에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했다. 그리고 2006년에 신상옥 감독이 지병으로 인해 사망했고 2018년 최은희도 세상을 떠났다..
여러모로 영화 같은 삶을 살던 사람들이다. 실제로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탈출 계획을 짤 때도 신상옥 감독이 직접 영화 시나리오처럼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탈출했다고 직접 이야기했다.
7. 매체에서
최초로 다뤄진 건 1984년 6월 19일 KBS 1TV에서 방영된 6.25 전쟁 특집 연속기획 9탄 드라마 '함정'이었는데[34] 불과 두 달 전인 4월에 안기부가 두 사람의 납북 사실을 발표했을 뿐 그 외 자세한 정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지라, 최은희가 홍콩에 가서 납치되는 과정까지만 실제 사실과 똑같고 그 이후 북한에서의 행적은 그냥 창작에 불과했다. 최은희가 북한 수뇌부의 온갖 겁박에 도리어 독기를 품고 대남 방송을 강력히 거부하자 김정일이 부들부들거리는가 하면, 손목을 그어 자살 시도를 한 게 미수에 그친 뒤 군인들의 감시 속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누워있는 모습으로 드라마 끝. 앞서 언급했듯이 실제로는 김정일이 최은희를 깍듯이 대하며 조심스럽게 어르고 달랬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어차피 실제와 차이가 있었더라도 반공드라마라서 그렇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1995년 12월 MBC에서 방영된 제4공화국 19~20화에서는 두 사람의 증언을 기반으로 시나리오가 진행된다. 신상옥은 박영태, 최은희는 양금석이 맡았는데 실제 인물과 비교해보면 외모가 꽤 흡사했고 엔딩 화면에는 두 부부의 실제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나왔다. 특히 20화에서는 두 부부가 납북 후 처음으로 서울에 귀국한 모습이 나오기도.
다만 실제 두 사람의 증언 일부가 반영되지 않았는데, 일례로 신상옥 감독이 탈출 시도를 하는 건 최은희를 만나기 이전 딱 1번만으로 묘사되었고 김정일·김일성과 대화할 때 녹음기를 켜는 모습도 생략되었으며 나중에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할 때는 지인인 에노키 아키라 기자가 직접 몰고 온 승용차를 타고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내용으로 나왔다.
덧붙여 그들의 납북과 탈출에 대한 논픽션 영화를 만든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는데, 2016년 Ross Adam, Robert Cannan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The Lovers and the Despot 이 이 영화인것으로 보인다. [35] 아래는 영화 예고편. 한국에서는 2016년 9월 연인과 독재자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였다.
그런데 한국어 자막이 심각할 정도로 개판이라서 영어가 되는 사람이면 그냥 영어로 듣는게 훨씬 나을 정도다. 얼마나 개판인지 예시를 조금 언급하자면, 조선혁명을 한반도 개혁으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를 노동위원회로 번역하는 등 용어를 다 개판을 만들어놨으며 북한에서 최은희를 납치하기 위해 홍콩에서 영화 사업을 하는 부자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최은희를 꾀어냈다는 대사를 이해를 못해서 홍콩은 영화하는 사람과 부자인 사람이 많은 도시라고 오역할 정도. 근데 중간중간에 신상옥이 일본어로 회고를 한 대목은 영어 번역에 비해서는 수준이 높다. 일본어 번역가를 쓴건지....
2022년 4월에는 SBS 리얼리티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둘의 납북과 탈출이 다루어졌다.
8. 사건 이후
김정일 사망 직후 최은희는 "납치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지만 죽었다니 안됐다."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했다.(기사)
김정일 육성녹음 1부 김정일 육성녹음 2부 이것이 김정일의 육성파일이다. 조갑제 기자가 입수한 뒤 정리해서 최초로 일반에 공개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녹취를 바로 최은희가 몰래 녹음하였다. 김정일의 육성은 생전에 일반대중에게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데 이유는 김정일이 연설을 싫어했고 발음이 안 좋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라 한다.[36][37] 해설 기사 네 부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기사 1부, 2부, 3부, 4부
참고로 최은희가 납치되기 1년 전인 1977년에도 프랑스에 살고 있던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가 북한으로 납치될 뻔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다행히 백건우 - 윤정희 부부는 납치 직전에 눈치채고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해 위험을 면했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블로그로.
신상옥, 최은희 부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간혹 이들이 납북된 게 아니라 자진 월북을 하였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위에도 상술 되었듯이 지금도 이들 부부의 입북에 대해 납북이냐, 월북이냐 말이 많은데, 특히 어떤 감독은 자신의 회고록에 자신이 신상옥으로 부터 월북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써놓았다. 물론 그 감독의 회고록 내용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지만,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에 눈 밖에 난 신상옥은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기는커녕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도 힘든 지경에 있었다.
최은희가 먼저 납치되자 당시 한국의 어떤 언론은 신상옥이 돈문제로 최은희와 다투다가 최은희를 살해하였다는 황당한 내용을 보도하기도 하였고, 박정희 독재 정권은 어떻게든 신상옥을 영화계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매장 시키려고 하였다. 이 상황에서 신상옥은 정처 없이 해외를 떠돌다가 급기야는 망명을 타진하기도 하였으며[38] 결국 납북이든 자진 월북이든 북한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이와 별개로 성혜랑은 자신의 회고록 '등나무집' 에서 이들 부부의 납북, 탈북에 대해 잠깐 언급하는데, 최은희에 대해서는 김정일 비위를 저 정도로 잘 맞추는 걸 봐서 대단히 똑똑한 여자인 것 같다고 했지만, 신필림의 영화에 대해서는 저리 비싼 돈을 들여 찍는데 영화에 저리 돈을 낭비해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맞이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면서 대단히 냉소적으로 본다. 그리고 자본주의 나라에서 온 두 사람이 북한이 얼마나 숨막히는지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라면서 탈출한 것에 대해서 이해는 표하지만, 둘이 달아나서 차라리 속이 시원하다는 식으로 언급한다. 한번은 김정일에게 저 둘은 북한에 적응 못하고 달아날 것이라고 하자 김정일이 눈을 끔뻑이더니 세상에 영화 찍고 싶다고 기차까지 터트려줄 정도로 지원해주는 사람이 어딨겠냐면서 영화인으로서 그럴리가 없다고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둘을 잘 대해준 김정일이 불쌍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영화에 대해서도 북한에선 환영받지 못했으며 다들 두 사람이 떠나서 속이 시원했다고 주장한다.[39] 여기서 최은희, 신상옥 두 사람의 수기에는 없는 내용까지 언급하는데, 성혜림의 서울말씨를 눈치챈 최은희가 술에 만취해서 성혜림의 무릎을 붙들고 제발 집에 보내달라고 울고불며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에 김경희가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에서 왜 나가고 싶어하느냐?라고 체제선전을 하자 최은희가 김경희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시끄럽다! 나가라! 라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탈북 후 <김정일 왕국> 이라는 납북, 탈북 수기를 발표하였는데, 이 수기에서 나오는 북한이라는 나라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너무나도 말이 안 되는지라 신상옥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적떼들 소굴'이였기에 당시에 "세상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미친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거 다 나중에 영화로 만들려고 지어낸 얘기 아니냐." 며 수기의 내용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뭐, 엄밀히 얘기하자면 이 때는 북한의 경제가 제대로 돌아갔던 시절이었기에 그나마 인세지옥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말이 안되던 일이 많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기는 했다.
AVGN이 영화 불가사리 리뷰를 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고도 꽤 깊이 있는 언급을 한 바가 있다. 한국 괴수물 역사까지 파악한 것을 봐서는 리뷰를 위해 상당히 연구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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