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의 민주주의 도입과 한국 기독교의 역할
한국 민주주의와 한국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정치사와 교회사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민주주의라는 개념의 수입과 기독교(여기서는 개신교)의 선교는 19세기 중반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역사적 우연 혹은,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섭리로써 이 시기부터 민주주의와 기독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반도의 역사를 다채롭게 엮어나가고 있다.
19세기 중엽에 원래 한국어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들 예컨대 민주주의, 공화정, 입헌주의, 자유, 민족 등의 민주주의 관련 개념들이 일본어 번역을 통해 한반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매우 생소한 개념들임에도 불구하고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한반도 정치사상의 주류가 되었다는 점이다. 1919년 3월의 삼일독립선언서와 그해 9월에 선포된 「건국헌법」을 보면 대한민국이 국민 주권의 민주공화국이라 규정하고 있다. 그 시기 다수 민중들이 조선의 무능한 전제주의와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얼마나 진저리를 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들 사이에 민주주의 사상이 이토록 빨리 뿌리를 내린 데는 한국 교회가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아직 도착하기 전 자국민 전도자들의 노력으로 성경의 한글 번역이 이루어진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교회 조직을 통해 자국어로 된 성경을 번역하고 배포하고 학습함으로써 민족적 정체성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적 정체성과 함께 평등과 자유 및 인권에 대한 서양 선교사들의 가르침이 새로이 설립된 근대적 교육기관을 통해 새 정치 체제의 비전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1915년 일제사립학교규칙 선포 이전까지 종교계 사립학교는 무려 829개 교에 달하였다. 혹자는 개교회의 자립을 강조하는 네비우스 선교 방법이나 장로교회의 대의적 민주주의 정치 체제, 1907년 교회 ‘헌법’ 채택 등이 민주주의의 선행 학습 과정으로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1948년에 선포된 「제헌헌법」은 한국인들이 꿈꾸던 새로운 민주 체제의 구현이었다. 1919년의 「건국헌법」을 계승하고 미국 헌법과 바이마르 헌법, 삼민주의 등을 조합한 대한민국 헌법이 탄생하였다. 입헌주의, 법치주의, 삼권분립, 보통선거, 대통령제, 의회정치, 종교/언론/결사/집회/신체의 자유, 토지개혁, 사회적 시장경제, 등 당대의 세계 헌법 중에서 1917년의 멕시코 헌법에 버금가는 진보적 헌법이었다. 민주주의 선행 학습뿐만 아니라 제헌의회 의원들의 종교적 구성을 보더라도 한국 기독교가 이 헌법의 제정에 적지 아니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2. 한국 민주주의 성장과 한국 기독교의 한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체제를 정착시키려면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러한 시행착오의 역사이다. 문서로서 헌법은 민주주의를 선언하고 있었지만 지나온 70여 년의 현실은 개인 혹은 군사독재로 점철되어 있다. 수입된 개념들이 토착화하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었다. 또한 해방 직후 발생한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체제의 생존을 위해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해야 했다. 친일파 청산은 물거품이 되었고 반공을 내세운 독재가 정당화되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민주주의 추구와 상황을 앞세운 독재자의 가혹한 탄압이 교차하고 있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안정적 민주 체제를 선호하는 중산층이 국민 다수로 자리를 잡으면서 체제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 기독교는 대부흥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 근대화의 선봉으로서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의료와 문화에서도 시대를 선도하였다. 민중들은 교회에서 삶의 희망을 보았다. 특히 분단과 전쟁으로 고통이 편만하였을 때 교회는 그들에게 영적인 위로와 함께 서구 교회가 제공하는 물질적 자료들의 통로가 되어주었다. 산업화와 함께 도시화가 진행되자 도시 교회들은 시골에서 이주한 교인들로 대부흥을 이루었다. 세계적 크기의 대형교회들이 등장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번영신학이 교단을 휩쓸었다. 국제화의 흐름에 발맞추어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의 주역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한국의 민주화와 관련하여 한국 교회에서는 세 가지 흐름이 나타났다. 첫째는 교회 부흥에 몰두하는 성장제일주의 흐름이다. 이들은 군사독재와 밀착하여 민주주의를 폄훼하고 정교분리를 강조하면서 종교적 권력 증대를 위한 사제주의를 채택하였다. 둘째는 한국 교회의 역사적 전통에 따라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는 온건한 복음주의 흐름이다. 이들은 교회 부흥뿐만 아니라 사회정의와 민주주의 실천에도 관심을 보였다. 다양한 교육기관과 시민 단체를 조직하거나 지원함으로서 한국의 민주화를 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셋째는 조속히 군사독재를 청산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출발하여 세계적 수준의 진보 이론을 수용한 급진주의 흐름이다. 군사독재의 분단적 성격, 국제적 자본주의의 착취 등 총체적 상황의 종식을 희망하였다. 이들의 열렬한 투쟁이 민주화와 남북 관계에서 많은 돌파구를 만들었다.
한국 기독교가 보여준 심각한 한계는 지도력 양성의 실패이다. 제헌헌법 제정과 민주화 과정이 보여주듯이 한국 기독교는 한국의 민주적 체제 구성에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사회가 도리어 한국 기독교의 게토화를 우려할 지경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된 첫째 고리는 일제 잔재 청산의 실패이다. 일제의 신사참배 압력에 굴복하여 신앙을 훼절했던 다수 기독교 지도자들이 분단과 전쟁의 흐름에 편승하여 종교 권력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목회자들이 도리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둘째 고리는 부실한 목회자 양성이다. 교회 부흥기에 수많은 군소 교단이 분립되었고 이들이 자신의 조직 보존을 위해 세운 미인가신학교들은 부실한 목회자를 양산하였다. 이들은 성장제일주의와 이단적 사제주의, 반지성주의에 쉽게 경도되었다.
3. 민주주의 위기의 한국적 맥락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세계적 수준에서 민주주의의 실패가 목격되고 있다. 전통적 민주주의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에서 극우 파시스트들이 득세하고 때로 정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파시즘이란 불만을 가진 대중을 선동하고 탈법적인 폭력의 행사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운동이다. 나치의 경우가 전형적인데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불만, 대공황의 공포, 우생학, 루터교 신학, 니체 철학, 바그너 음악, 반유대주의 음모론, 지도자 숭배, 나치 친위대의 폭력 등을 결합하여 “민주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최근 미국에서 보듯이 유대인들 대신 동성애자나 이민자 혹은 외국인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공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두려움에 떠는 약자들이 강자들의 선동에 넘어가 다른 약자들을 공격하는 데 동원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재벌 중심의 경제성장으로 인해 사회적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으나 유럽이나 미국만큼 심각하지 않다. 인종적 동질성이나 경제적 상황도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나 봄직한 동성애자와 이민자, 외국인을 향한 극우세력의 혐오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다. 특이하게도 한국에서는 한국 기독교의 성공제일주의적 교회들이 이러한 극우 캠페인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일방적인 선전과 노골적인 거짓말, 혐오와 폭력의 정당화가 바로 파시즘의 전조라고 볼 수 있다. 반지성주의이고 왜곡된 신앙에 젖은 교인들과 함께 무지를 도리어 자랑하는 목회자들이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전당이 되어야 할 교회를 더럽히고 있는 중이다. 한국 교회가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4.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방법
많은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개신교 신앙과 민주주의는 본질적 친밀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권 사상, 인간의 죄성에 기반한 견제와 균형, 이웃사랑으로 나타나는 공동체적 이상 추구, 관용에 바탕을 둔 종교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신학적 기반이다. 경험적 자료를 보아도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민주주의일 가능성이 크다. 니버의 멋진 표현대로 인간은 정의의 능력 때문에 민주주의가 가능하고 불의의 성향 때문에 민주주의가 필수적이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 민주주의를 보호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가 이 시대에 파시즘의 문을 열어 한국 사회를 파멸로 이끌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당장에 해야 할 몇 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 폭력, 협박, 선동의 비신앙적 행태를 신속히 과감하게 교회에서 몰아내야 한다. 목사/장로/집사를 막론하고 아무리 신앙적 언사로 포장을 한다 해도 이러한 행태를 교회 안에서 용납해서는 안 된다. 둘째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복음에 합당한 정치 체제의 쌍두마차임을 분명히 강조해야 한다. 특정 정파를 고려하여 가치 기준을 모호하게 버무리는 순간 파시즘이 파고들어 대중을 기만하기 때문이다. 셋째, 각종 정보의 비교 대조를 위해 언론의 통로를 확장해주어야 한다. 파시즘은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을 뿐 아니라 정보를 통제하려 든다. 그러므로 진실의 파악이 가능한 통로 유지가 중요하다. 신뢰할만한 주요 매체 소개와 더불어 관심 주제에 해박한 찬반 양측의 전문가를 초청하는 목회자 혹은 평신도 세미나야말로 이 혼란의 때에 각 교단들이 능동적으로 제공해야 할 서비스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