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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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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스크랩 고대역사가 증언하는 `일본`이란 나라
변강쇠 추천 0 조회 136 15.05.17 15:5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고대역사가 증언하는

'일본'이란 나라

오늘 속회 주제는「갈등에서 평화로」이다.

에덴에서 마귀의 시험으로 인격이 선(善)과 악(惡) 두쪽으로 분할된 인간은, 매일매일 순간순간 마음 속에서 선과 악이 갈등하여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선택의 고민으로 나날을 살아간다. 갈등은 나만 아는 이기심에서 생긴다. 피차가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배려할 때 평화가 온다.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인간이 만든 가장 큰 집단인 국가도 상호간에 이기심의 발로로 갈등과 반목, 살육과 전쟁으로 역사를 누벼왔다. 한국과 일본은 형제국이면서 야곱과 에서 형제처럼 갈등으로 역사를 점철했다. 양국민 모두「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라고 하며 치열한 경쟁상대로 경계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양국가의 역사적 갈등은 언제 끝날 것인가 를 생각하며 한-일 고대사를 살펴본다.(오소운)

1. '일본어 뿌리는 한국어'

- 양심있는 일본학자 모두 인정 -

 

일본말의 뿌리가 한국말에 있다는 사실을 어원분석으로 규명한 박병식(朴炳植, 1928~ )박사의 '야마도말 어원사전'(도서출판 바나리)이 양심 있는 일본 학자들의 양심을 두드리고 있다.

 

일본인들은 그동안 드러내 놓고 말하진 않지만 고분 발굴 등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천황을 비롯한 자신들의 조상과 한반도의 관련성을 '몹쓸 비밀'처럼 애써 감춰왔다. '야마도 어원사전'은 이런 풍토에 일침을 가한 셈이다.

 

일본은 주후 670년부터 '일본(日本)'이라는 한자를 국호로 삼았는데 그 당시는 이를 '닙뽕'으로 읽지 않고 '야마도'라 발음했다. 그런데 이 야마도는 바로 경북 고령지방의 '위지'에 적혀 있는 야마국(邪馬), 즉 가야의 이름이라는 것이 박씨의 주장(邪의 당시 발음은 '야'). 이는 고대 일본열도를 개척해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가야족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얘기다.

박씨는 "일본말이 '마' 소리를 즐겨 쓰는 것처럼 경상도 사투리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도'를 경상도에서는 '그래도마' '케도' '케도마' 따위로 쓰는 것을 일본에서는 '게레도모' '게도' '게도모'라 하는 것도 전형적인 예라는 것이다.

 

의성어와 의태어에서는 이것이 더욱 명확해진다. '슬슬'은 '스루스루', '졸졸'은 '조로조로', 무서움에 떠는 '벌벌'은 '부루부루', 키가 크는 모습인 '쑥쑥'은 '스쿠스쿠' 등 셀 수 없이 많다.

일본어로 출간된 '야마도말 어원사전'을 읽은 일본 동경대학 은퇴교수 가도 에이찌(加藤榮一, 1932-)씨는 최근 일본 세계일보에 박 박사의 주장이 옳다는 일본인으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현대 일본어는 많은 한자어와 영어 등 외래어가 포함돼 있지만 그 근본은 '야마도' 말"이라며 '야마도말이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은 곧 '일본사람이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이라고 못박았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내놓은 어원에 대한 학설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며 "어떤 이는 히말라야 지방에서 쓰는 '레프챠語'가 일본어의 어원이라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는 인도에서 쓰이는 '타밀語'에서 어원을 찾으려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문외한들의 짓이었다"고 힐난했다.

 

그 이유로 그는 피차 왕래도 없던 멀리 떨어진 곳의 언어일 뿐 아니라 학자들이 예로 든 일본어와의 대응관계도 전혀 규칙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양식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위험하니 어원과 여성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라' 는 우스개가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가도씨는 특히 비교적 과학적 접근을 했다는 무라야마 시치로(村山七郞)마저도 한국어에 주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큰집'이고 일본은 '작은 집'이라는 시각에서 한-일간의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배워야 한다."

이렇게 일본 국민에게 주문했다. 미국 사람들이 영국의 작은 집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일본 사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까이(東海)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하야시 다께히꼬(林建彦)씨도

"한-일 두 민족이 형제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일본 학계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모자를 벗고 완전히 항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박병식씨는 일본 도까이대학 일본문학부 연구원과 시네마대학에서 한-일고대사와 국제문화론을 강의했다. 일어 저서로서 '지금 가야족은 슬프다' '일본어의 비극' 등 27권이 있다.

2. 일본말 바탕은 경상도 사투리

한국인과 일본인은 둘이 아니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生死不二)라고 하는 불교적 불이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요, 또 사해(四海)동포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과학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인과 일본인은 대체로 핏줄이 같다는 뜻이다.

 

지금도 동해안 어디쯤에서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해류와 바람이 저절로 일본 중서부 어디쯤에 가닿게 해준다. 동해의 해류는 북쪽 오호츠크로부터 남하해 동해안 쪽으로 서진하다 대한해협 부근에서 일본 중서부로 둥글게 돌아가는 타원형을 그리기 때문이다. 남해안에서 일본에 가는 것은 폭풍우만 치지 않는다면 식은 죽 먹기다. 아득한 그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남방에서 일본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항해술이 많은 사람을 실어 날랐으리라고 보는 것은 비과학적이다.

 

박병식씨는 일제시대에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일본인보다 일본말을 더 잘했고 월남직전 성진의전(醫專)재학시절에는 독일어나 라틴어, 중국어, 프랑스어도 익힐 만큼 어학을 좋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늘 의식 속에는 “일본말과 한국말은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잠재해 있었다고 한다.

“그래 과거는 훌훌 털고 젊을 때부터 좋아하던 어학 그중에서도 일본어 연구를 필생의 업으로 삼자”는 것이 당시 그의 심경이었다는 것이다.

뉴욕의 후미진 동네에서 세운 그의 뜻과 하루 17시간씩 공부에 매달린 실천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84년 첫 번째 저술 “지금 가야족은 슬프다”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그는 26권의 책을 냈다. 특히 86년 낸 두번째 책 “야마도말의 기원과 고대조선어”는 한-일 두 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말을 비교하여 두 나라의 말소리에는 일정한 소리변화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해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5만자의 한자음을 일일이 추적 비교한 이 연구는 학계에서도 상상 못한 독창적 성과였다.

<야마도말 어원사전>

예컨대 우리는 한자 한(韓, 寒, 汗)을 ‘한’으로 읽는 데 비해 일본에서는 이를 다 ‘간’으로 읽는다. 그런 식으로 일본의 모든 말에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언어가 건너가면서 변화되는 법칙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또 전기(前記)한 야마도 건국 사실 등에 주목해 일본의 “古事記” “日本書紀”를 중심으로 일본 고대사 연구도 병행해 “萬葉集” 등 그들의 책에 들어있는 암호와 다름없는 글귀들을 풀어냈다. 예를 들어 “日本書紀”에 있는

摩比羅矩都能 (마비라구도능)

俱例豆例 (구례두례)

於能弊陀 (어능폐타)…”

라는 구절은 일본학자는 아무도 무슨 뜻인 줄 몰랐는데 그가 해독했다. 위의 글은 일본인이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말하자면 일본식 이두로, 그 뜻은 (백제가 망하니까)

‘마 (이제) 비락뜨는(비럭질하러 떠나는)구례 (지금의 구례로 섬진강을 통로로 일본과 백제가 교류했기 때문에 백제사람을 지칭한 말)들이 어능폐타(오는 해(年)다라는 것을 밝히니까 일본학자들이 입만 벌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로 朴씨는 백제가 망하기 전까지는 우리말과 일본말이 같았다고 확신한다. 현재의 일본말은 그 후 교류의 단절로 인해 나름대로의 변화가 가속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야마도말의 기원과 고대조선어”가 발간되자 일본인들로부터

‘그러다 칼침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협박도 받았다고 한다. 또 밤 12시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려 받으면 아무 말도 없이 끊어지곤 하는 위협이 3년이나 계속됐다는 것이다. 그러다 그의 책이 계속 나오면서 과학적으로 일본인들을 설득하니까 위협은 없어지고 지금은 오히려 고정 독자가 많이 생겨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런 팬들 중에는 그에게 연구비를 많으면 1백만 엔(1,500만 원)이나 보내주는 사람도 있었고, 가난한 이는 농산물 따위를 부쳐주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어느 해에는 계속되는 일본 내에서의 강연 때문에 목이 이상이 생겨 병원을 찾았더니 그를 알아본 의사가 수술, 입원비와 약값 일체를 무료로 해주더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 치료비가 부담돼 한국에 와서 수술을 받을 생각이었다.)

“선생님이 우리(日本) 학자들도 캐내지 못한 우리의 뿌리를 가르쳐줘 고맙습니다.”

이게 그 의사의 말이었다.

또 일본 사회당의 어느 의원은 그의 글에 매료돼 그가 월남할 때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43년 만에 평양에서 만날 수 있게 주선하기도 했다.

그의 소망은 한국말과 일본말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일본학자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모두 그의 연구를 긍정하면서도 공적 장소에서는 입을 다무는 것은 학자적 양심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과 성과를 인정해야 그 다음 단계의 양국간 연구로 발전이 될 텐데 왜 그렇게 ‘속 좁은 태도’를 보이는지 안타깝다고 했다.

그의 책을 읽은 이름 모를 많은 일본인들 중에는

‘제가 전에는 반한(反韓) 파였는데 이제 친한(親韓) 파가 됐습니다.’

라는 대범함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는 것에 비춰보면 더욱 일본학계가 섭섭하다고 했다. 그러나 히로시마대가 그에게 자극받아 ‘한국어’를 정규과목으로 채택한데 대해서는 고마움을 표했다. 우리말이 건너가 일본말이 됐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문화적 우위를 나타내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한-일 친선은 결국 문화적 교류에 바탕을 둔 상호 이해일 수밖에 없다.

박씨는 최근 22년간의 연구를 집약한 “야마도말 어원사전”이라는 책을 그의 다른 모든 책처럼 일본어로 펴냈다. 일본의 출판사가 ‘왜 일본말의 뿌리를 한국 사람에게 배워야 하느냐”는 속내를 비추며 출판을 거절해 한국의 출판사에서 발간했다. 이 사전이 일본학계에서 검토되면 현재 일본이 사전에 실린 어원 설명은 99%를 고쳐야 할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한 예로 일본사전에 쓸데없는 짓이라는 뜻의 ‘겐모 호로로(けんもほろろ)’가 있는데 그 어원을 ‘꿩의 울음소리를 의성한 것으로 꿩울음처럼 쓸데없는 짓을 말라는 데서 유래’ 했다는 식으로 설명했지만 이것도 경상도 말 ‘건 머 하러러(건 머하그러-그건 뭐하러 하나)’에서 왔다는 것이다.

朴씨는 79년 뉴욕에 건너가 일본에서 체류한 5년을 빼고는 쭉 거기서 살다 최근 영구 귀국했다.

그의 일본어 어원 연구는 그 자체 학문적으로 평가받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그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은 인간의 패기와 집념이다. 그는 ‘중학시절 60세가 넘은 분이 입학해 그 후 대학까지 마치는 것을 봤다’고 했다. 뜻을 세우는 건 정말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중앙일보] 2001년 5월 7일 字, 월요기획, ‘이헌익의 人物오디세이’에서 수정

3. "일본인의 피 속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유전학적으로 일본 본토인이 한국인과 가장 가깝다. (박병식)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은 천황을 둘러싸고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인과 고급관료들이 창작한 황국사관(皇國史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네들은 거의 무력화한 황실을 등에 업고, 황실의 충실한 보호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이어 오는 천황가(天皇家)를 지키기 위해선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국민들을 교육시켰고, 그런 미명 아래 막강한 군부독재정권을 수립 한국을 병탐,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해 왔다.

3.1. 일본의 황국사관(皇國史觀)

다행히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민주주의 사상이 일본에 상륙해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자 양심적인 일본학자들로부터 황국사관에 물든 교육이 결코 옳지 않다는 소리가 나오게 되면서, 많은 일본 사람들이 일본민족의 참다운 뿌리를 찾는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 결과 요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韓민족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게끔 되었으나, 아직도 황국사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 실정이다.

때마침 2003년 6월23일, '교도통신'이 다음과 같은 보도를 해 주었다.

"동경대학의학부 인류유전학교실 도꾸나가 가쓰시(德永勝士) 교수는 인간의 6번 염색체 내에 존재하는 ‘HLA유전자군’을 이용한 인간유전자(게놈)를 비교 연구한 결과, 일본 본토인과 가장 가까운 집단이 한국인과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도꾸나가 교수는, 일본인, 한국인, 중국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12개 민족(집단)을 비교분석한 결과,

“일본 본토인은 오키나와인이나 혹까이도의 '아이누족'보다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에 가장 가까웠다”고 밝혔다.

이 같은 연구 내용은 7월 중 도꾜대출판부가 출판할 예정인 ‘공개강좌’ 총서에 수록된다. 도꾸나가 교수는 HLA 유형을 기준으로 일본인 한국인, 한(漢)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과 대만 원주민 등 동아시아 12개 민족(집단)을 비교분석한 결과 일본 본토인은 오끼나와(沖繩)인이나 북쪽 혹까이도(北海道)아이누 민족보다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에 가장 가까웠다고 밝혔다. (중략) 주로 유물이나 인골, 혈액형 분포 등을 활용한 그동안의 연구는 한계가 지적돼 왔기 때문에 최신 게놈 연구 결과를 응용한 이번 연구는 ‘뿌리 학설’의 결정판으로 평가되고 있다. 도꾜=조헌주 특파원

한편, 돗도리대학(鳥取大?) 의학부 이노우에다까오(井上貴央))교수팀은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 전래로 상징되는 '야요이'시대(彌生時代)에 살았던 사람들의 DNA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돗도리대 연구팀은 '야요이' 시대 유적인 돗도리현 아오야가미절(靑谷上寺) 터에서 출토된 '야요이'인 유골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배열을 분석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얻었다. 돗도리대 연구팀은 '야요이'인 유골 29점 가운데 7점으로부터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한 뒤, 그중 4점에서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배열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이들이 한국의 현대인 및 혼슈의 일본인과 동일한 그룹에 속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와 같은 ‘교또통신’의 보도는, 오랜 세월동안 일본학자들이 음폐해 온, 일본인의 혈통에 관한 비밀을 더 이상 궤변을 늘어놓을 여지없이 폭로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우리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오늘날 일본열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일들을 거치면서 오늘의 모습으로 변화돼 왔는가를 살펴보는 일이어야 한다.

4. 일본열도의 원주민들

오늘날 '일본열도'라고 부르고 있는 섬들은 지금으로부터 1만 년∼1만2천 년 전까지만 해도, 북으로는 사할린의 북단인 옛 '소비에트연방의 아무르강' 하구부근에서 대륙과 붙어 있었고, 남쪽은 북규슈와 한반도 남단이 연결된 '대륙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지질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진 지 오래다.

인류의 발상지가 어디였는지 아직 확실한 정설은 없으나, 인류 최고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지방, 즉 '이라크'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유역에서 시작됐으리란 것이 정설이다.

그 지역에서 원시 문명생활을 하던 고대인들은 바벨탑 언어혼란으로 더 이상 한 곳에 머물 수 없게 되자 동서로 대이동을 시작, 서쪽으로 간 사람들은 서양인의 조상이 됐고, 동쪽으로 온 무리는 동양인의 선조가 됐다는 것이 인류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그런 가운데서 동쪽으로 오다가 지금의 흑룡강과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정착한 사람들이 '한민족'의 조상이 됐다.

그러나 동쪽으로 온 무리 가운데에는 '바이칼호' 부근에서 오래 살다가 '시베리아'를 거쳐 일본열도의 5배만큼이나 넓은 분지였던 '베링해'를 지나 '알래스카'로 넘어가서 계속 남하, 남미대륙까지 도달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무식한 콜럼버스가 명명한 '아메리칸 인디언'의 선조요 우리의 피붙이다.

한편, 어떤 무리는 그곳까지 가지 않고 도중에서 '사할린'을 거쳐 지금의 일본열도에 이르러 거기에 정착했다. 이들이야말로 일본열도의 주인의 일부가 된 북방계 원주민이다.

몽골지방을 거쳐 중국대륙의 동북지역에 정착한 무리들과 중국 서부의 삼위지역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이동해 온 무리들 가운데 한반도를 따라 남하, 북규슈를 거쳐 일본열도의 중앙부로 동북진한 부족들도 있었으니 나는 이들을 남방계 원주민이라고 부른다.

남미의 멕시코에서 '마야문명'을 꽃피우고, 페루에서, 신비스러운 '잉카문명'을 남긴 민족들 모두 다가 그랬듯이 일본열도에 정착한 이들 원주민들도 태양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다.

5. 숭문토기·빗살무늬토기 '비슷'

'승문(?文)토기'란 토기에 새끼줄로 무늬를 만든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일본학자들이 일컫는 말인데, 그런 토기와 거의 비슷한 무늬의 토기를 우리 고고학자들은 '빗살무늬토기' 라고 부르고 있다. 이름이야 무엇이라 하든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발해연안을 비롯한 중국대륙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초기 토기의 무늬와 일본열도에서 발굴된 토기의 무늬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은 그것을 제작한 사람들이 같은 문화를 지녔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뜻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열도에서 이와 같은 초기토기를 만든 사람들은 오늘날 '아이누'라고 불리는 북방계 원주민과 왜인(倭人)이라고 부르는 남방계 원주민이었다. 훗날 일본열도의 주인공이 된 왜인들은 '승문토기'를 일찍이 '아이누식 토기'라고 불렀다. 오늘날 일본인 스스로 '아이누'라고 부르는 이 부족은 극히 적은 수의 후손들이 사할린과 북해도 지방에서 오랜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는데 그들이 처음부터 북해도 이북지방에서만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근세에 와서 왜인들에게 쫓겨서 그곳으로 몰린 것이다.

지금도 그들 '아이누족' 사이에는 왜인에게 빼앗긴 일본열도의 동북지방 땅을 되찾아 '아이누 독립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격렬파가 있다고 전한다.

6. 아이누말과 한국말의 연관성

그런데 이 '아이누'라고 하는 말의 원형은 '태양의 자손'인데, 소리바꿈을 거쳐 오늘의 모습이 된 것이다. 즉 그들 역시 태양숭배족이며 '아리안' 민족의 일파인 것을 알 수 있다. 사할린이 아무르강=흑룡강 하구지역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기, '아무르강=흑룡강' 유역에서 살고 있던 우리 조상들이 '사할린'으로 이동해 왔으리라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논리다. 아니 무엇보다도 '사할린'이란 지명은 '사하라→사벌=사벌'과 똑같은 발상에서 만들어진 이름 아닌가.

더구나 지금도 연해주의 '아무르강=흑룡강' 하구지역에는 '계림(鷄林)'이란 조선족 마을이 있다 하고 러시아 혁명 초기에 이곳에서 조직된 조선족의 유격대 이름이 '사할린대대'였다고 한다. '계림'이란 것은 '신라=사벌(沙伐)'의 별명이다. 먼 훗날, 왜인들이 섬이 되어 버린 사할린에 온 우리 선조는 이곳 이름을 '가라하터'라고 지었다. 가라 하터란 것은 '가라=가야'의 '하터=가장자리=끝나는 터'라는 뜻인데, 후대 일본사람들은 이것을 '가라후도'라고 표기하게 됐다. 어원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 현대 일본학자 중에는

'이 섬에 당(唐)나라 사람이 건너와서 장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가라(唐) 히도(人)라고 하였던 것이 변해 가라후도라고 하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말도 안 된다.

'가라히도=당인(唐人)'가 가라후도로 둔갑했다는 설명은 웃음거리는 될망정 옳은 말일 수는 없다. 더구나 당나라를 '가라'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사람들뿐이지, 중국사람들 자신이 '가라'라고 한 일은 한 번도 없으니 '가라'는 '가라=가야'일 수밖에 없다. 일본 역사에서 '가라'는 '가야'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남방계 원주민인 왜인과 '아이누'는 먼 조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인데 '아이누'는 일본열도에 도착하기 이전에 서양화한 무리들과 같은 신체적 변화를 거치면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남방계 원주민의 그것과 많은 차이를 가지게 되어 서로가 같은 종족이란 의식은 전혀 느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본열도 안의 우리 민족은 이들 '아이누족'을 포함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민족과 같은 시기에 같은 무늬의 토기를 생산했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그토록 변화해 버린 '아이누' 언어 속에서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어휘가 우리말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원주민이 일본열도에 넘어온 것은 이곳이 아직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던 때이며, 그것은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2만∼3만 년 전이었으리라고 일본학자들은 짐작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전제할 때, 그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고 나서 약 만년이 지난 즈음부터 지구의 온난화가 시작, 그때까지 육지였던 곳이 바다로 변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지구해빙기의 침수현상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고, 일본학자들은 이 시기를 '승문해진기(?文海進期)'라고 부른다. 앞에서 말하였듯이, 일본열도가 지금 같은 섬이 된 것은 약 1만 2천 년 전이라지만 바닷물이 하루아침에 불어나서 육지를 물로 덮어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니, 세월이 지날수록 조금씩 물속으로 가라앉아 가는 땅을 보며 사람들은 중대한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리라.

7. 왜인(倭人)의 작은 키는 식량부족 때문

'땅이 자꾸만 물에 잠겨 가는데, 앞으로 물줄기의 저편에서 살아야 좋을까. 아니면 이쪽에서 사는 것이 나을까.'

일가친척이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라질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그들은 어느 쪽에 살기로 결정한다 해도,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이 보고 있는 물줄기가 지금처럼 큰 해협이 되어 서로의 왕래를 불가능하게 만들기까지는 수천 년이 걸렸으므로 저들이 이렇게 될 줄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처음에는 징검다리를 놓고 넘나들 수 있었겠지만 어느새 물은 깊어지고, 수폭이 넓어지더니 건너편 집들이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하여 헤어지게 된 친척이나 친구의 소식이 끊어지고, 세월 따라 망각의 언덕을 넘은 지도 몇 천 년이 지났다.

'승문해진기'라고 불리는 때, 지금으로부터 6천5백∼5천5백 년 전의 관동평야와 5천∼4천 년 전의 '오사까' 평야의 해면 꼭대기 고도는 현재의 해면보다 5m 가량 더 높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면적이 지금보다 훨씬 좁았던 일본열도에 살게 되었던 원주민은 말할 것도 없고, 쌀을 외국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식량확보가 어려웠던 시기의 일본사람의 키는 한반도의 우리보다 약 10cm 이상 작았다.

그것은 섬사람이 되어 버린 이들은 아직도 수렵으로 생활하는 불안정한 시기에 있었고, 식량공급이 불안한 상태의 좁은 지역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되면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신장이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나는 자연의 섭리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8. 고대 일본은 한국의 속국

주후 173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239년에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등 국제외교 무대에서 이름을 남긴 왜의 여왕히미꼬(ひみこ、卑彌呼, ? ~ 247년)는 이상하게도 일본 황실의 명령으로 편찬된 [古事記, 712년 완성)와 [日本書紀, 주후 712년 완성)에는 그 이름마저 보이지 않는다. [위지(왜인전)]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실재 인물인 여왕히미꼬가 일본 국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여왕히미꼬 뿐 아니라, 그가 다스리던 나라 자체가 일본 국사에서 말살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일본 황실이 [古事記]와 [日本書紀]를 편찬할 때 여러 호족가문에 전해 오는 문서를 제출하도록 엄명해 그것들을 말살시켜 버린 사실이다. 일본 황실이 그때에 없애버린 옛 문서에 어떠한 역사가 적혀 있었는지 확실한 것을 알아내기는 일본 황실의 자발적인 협조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근년에 이르러 일본의 여러 곳에서 신비스러운 내용이 담긴 괴문서가 속속 발견돼 그 진상의 일부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들을 일본 학자들은 '수수께끼의 고문서(謎の古文書)' 라고 부르면서 위서(僞書)라고 무시해 버리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 문서들이 결코 위서가 아니라는 이유가 있다.

①그것들을 비밀리에 보관해 온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황족이거나 옛날부터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유서 깊은 가문이라는 사실

②그러한 문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눈치 챈 황실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온갖 협박과 학대를 해서 대대로 내려오면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③이들 문서를 세상에 공개하려고 하자 일본 정부는 경찰과 헌병을 동원하면서까지 저지해 큰 소동이 벌어지고, 관계된 사람들은 투옥과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 등이 증언되고 있다.

그러한 문서가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기까지에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숨은 곡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 문서에는 어김없이 ‘부처님이 일본에서 태어났다’ 라든가, ‘예수가 일본에서 죽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허무맹랑한 말이 첨부되어 있어서주) 그 문서의 신빙성을 손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古事記]와 [日本書紀]에 보이는 제1대 神武天皇 이전에 약 73대에 걸친 우가야왕조(ウガヤ王朝)가 존재했음을 증언하고 있는 이들 문서의 일치된 기록이다. 다음은 그러한 기록을 보이는 고문서들이다.

1. 우에쓰후미(上記)

이 책은 13세기에 가마꾸라 바꾸후의 창시자인 미나모도노 요리도모(源?朝)의 서자이며, 분고국의 태수를 지낸 오오도모 다까나오가 만든 것이라 한다. 이 고문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명치유신이 일어나기 전인 주후 1838년에, 지금의 오-이다겐오-이다시에 살고 있었던 일본국학자인 사찌마쓰하에사가이다.

이 책의 특징은 현재 일본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본 글씨와는 다른 모양의 글씨체로 쓰여 있는 점인데, 지금도 이 글씨가 어디서 전해온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이것은 주후 1,223년에 오오도모 다까나오에 의하여 편찬되었다고 하며 일본열도의 창세기에 '니니기 왕조'가 있었고, 그 다음에 '야마사찌히꼬 왕조'가 있었으며, 그 뒤에 '우가야후기아에즈 왕조'가 73대 계속되었다는 역사가 담겨 있다.

또 일본의 초대 천황으로 국사에서 가르치고 있는 神武天皇은 제73대 우가야 왕이라고 적혀 있는데, 주목을 끄는 것은 '니니기 왕조'가 성립되기 전에 스사노오노미꼬도가 건국한 이즈모국이 7대 계속되었다고 적혀 있는 점이다. 특히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모로고'라는 표현이 씌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우리말로 '…모양으로/…하는 것과 같이'와 같은 뜻인데, 요새 경상도 사투리에 '…매로=…하는 모양으로'라고 쓰이고 있는 말의 옛 형태가 '모로'이다. 거기에 덧붙여진 '고'는 '…모로로=…모양으로'의 '로'인데, ㄹ→ㄱ 변화법칙에 따라 '고'로 소리바꿈 된 것이다.

그와 같은 변화는 '구더기'를 '구더리'라고 하는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 그리고 요새는 '따오기'라고 부르고 있는 새를 지방에 따라서는 '따오리'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로 뒷받침된다. 즉 이 문헌을 만든 사람은 경상도 사투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2. 후지미야시다문서(富士宮下文書, 神皇紀)

이 책은 현재 야마나시현 요시다시에 살고 있는 미야시다 요시다까가 보존하고 있다. 이 문서의 특징은 후지산 기슭을 근거지로 삼은 '우가야 왕조'가 있었으며, 그 가운데 51대가 남자 왕이고, 24대는 왕비에 의한 섭정이 행해서 결국 합계 75대에 걸친 '우가야 왕조'가 존재했다고 하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서 이 문서는 앞에서 말한 우에쓰후미(上記)보다 2대 더 많은 '우가야 왕조'의 존재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에쓰후미에는 16명의 여왕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는 것을 볼 때 왕비에 의한 섭정이 아니고 당당한 여왕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3. 다께우찌 문서(竹內文書)

이 고문서는 이바라끼현 이소하라에 있는 황조황태신궁의 아마쓰 교관장인 다께우찌가에 대대로 전해져 오는 신대사관계 자료다. 이 문서에도 우가야왕조(ウガヤ王朝)가 73대 계속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주목할 점은 神武天皇이 72대 우가야 왕에게 양위를 받아, 마치 평화적인 왕조교체가 있은 것처럼 꾸며 놓은 것이 특징이다.

다른 고문서들은 '우가야왕조'가 신무천황에게 멸망당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 문서에서만 유독 평화적인 왕조교체가 있은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은 원래 신대문자로 씌어 있었던 이 문서를 5세기 후반에 제25대 부레쓰 천황의 명령으로 다께우찌스꾸네의 손자뻘 되는 사람이 이두문자로 바꿔 썼다는 사연이 있은 것으로 미루어, 그때에 평화적인 왕조교체가 있은 것처럼 조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가 해방 후 공개되자 그 내용 가운데 일본정부가 극비에 부치고 있는 천황가의 뿌리에 대한 것이 나타나 있었던 탓에 공개자인 다께우찌 교마로(竹?巨?, 1875?-1965)는 1937년에 불경죄로 기소되고 아마쓰교(天津敎)는 해산당하고 말았다.

9. 건국신화 들여다보기

우선 古事記와 日本書紀에 적혀 있는 건국신화부터 들여다보자.

"하늘나라로부터 내려온 천손(天孫) '니니기노미꼬도' 일행은 가고시마현 노마반도 끝에 이르러 '가사사(笠狹崎)허구리' 앞을 바로 지난 데에 있는 이곳은, 가라국(加羅國=伽倻國)를 향해 있을 뿐 아니라 아침 해가 찬란히 쬐고 석양빛도 아름답게 비쳐주는 곳이니 매우 좋다고 하며 그곳에 대궐을 지어 정착했다."

이 기록은 천손(天孫) '니니기노미꼬도'와 그 일행이 부모형제를 남기고 온 고향 가라(加羅=伽倻)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잘 표현한 대목이다. 더구나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을 가라구니다께(韓國岳)라고 이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황실은 고대로부터 궁중에 가라가미(韓神)를 받들어 모시고,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가라가미마쓰리(韓神祭)를 지켜오고 있다. 주후 927년에 당시 국무총리 격이었던 후지와라 다다히라(藤原忠平)가 편찬한 연희식(延喜式)에는 가라가미마쓰리(韓神祭)를 지낼 때 제사상(祭床)에 올리는 제물의 종류와 제사(祭祀)의 절차가 자세히 기술돼 있으며, 근년에 와서는 가라가미마쓰리(韓神祭)를 봄에 지내는 2월 21일을 건국기념일로 제정해 놓고 황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축제를 지내고 있다. 천손(天孫)이라고 하는 황실이 가라(加羅=伽倻)에서 온 가라족(加羅族=伽倻族)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라족(加羅族=伽倻族)이 개척한 일본열도가 독립하여 자치령이 되어 스스로 '야마터(日本)'라고 일컫기 시작한 것은 주후 663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부터다. 그 때 고국 백제 땅에 있는 조상의 무덤은 누가 돌보나, 하는 가슴 아픈 노래가 일본 고대 시가집 망요슈(萬葉集)에 우리말로 읽도록 이두로 기록되어 있다.

'야마터(日本)'는 원래 위지(魏志)에 기록돼 있는 야마국(邪馬國)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경북 고령지방을 중심으로 번영한 가라(加羅=伽倻)의 종주국 '우가야 =上伽倻'를 지칭한다. 즉 자치령이 된 일본열도에 살게 된 그들은 저들이야말로 종주국 '우가야 =上伽倻'를 계승하는 나라임을 내세운 것을 알 수 있다.

요시다도오고(吉田東伍)가 펴낸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의 국호론과 명치 33년 정월에 발간된 '역사잡지' 제101편 1호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①“일본(日本)이라는 국호는 원래 한국인들이 일찍부터 써 온 것인데, 우리나라가 그 이름이 아름답기 때문에 국호로 정했다. (伴信友).”

②'일본' 이라는 문자는 상고(上古)로부터 씌어 온 '히노모도' 라는 말에 한자를 충당해서 쓴 것이며, '일본' 이라는 이름 그 자체는 삼한(三韓)사람들이 시작한 것이다. (星野恒)

③'일본' 이라는 국호는 원래 한국인들이 쓰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 국호로 더욱 적당하기 때문에 만세불변의 호칭이 됐다. (木村正辭)

박병식(한민족문화연구원 학술고문)의 글에서 발췌하여 주해하고 추가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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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5.19 17:24

    첫댓글 경남김해중심가야국은ᆢ현해탄중심으로ᆢ경남과 일본규슈를ᆢ다스린 나라였고ᆢ후일ᆢ백제가ᆢ일본열도로ᆢ밀려오자ᆢ같이ᆢ반신라 세력으로ᆢ연합왕조 형성함ᆢ일본지역은ᆢ한반도에서ᆢ정치적역학에서ᆢ밀린 세력들의ᆢ피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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