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은 하루아침에 세워진다!”
사 6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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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 여자가 진통을 겪기도 전에
아기를 낳는다.
해산의 고통을 오기 전에
그 여자가 아들을 낳는다.
8 누가 이런 일을 들었느냐??
누가 이런 일을 보았느냐??
한 나라가 하루 만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
한 민족이 한순간에 생길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시온이 진통을 시작하려는 순간
시온이 그녀의 자녀들을 낳는다.
9 내가 출산의 순간을 주면서
새 생명을 주지 않겠느냐?” 야웨의 말씀이다.
“내가 자녀를 출산하게 하면서
태를 닫았느냐?” 너희 하나님의 말씀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인류 문명도 그러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세상 어느 것 하나 단번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바벨탑이 하루에 세워지지 않은 이치와 같으리라. 과정과 진보와 발전이라는 게 시간과 세월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적(神的) 세계에선 무너진 도시도 하루 만에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수사학적 질문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라가 어찌 하루 만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순간에 태어나겠느냐?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으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더냐?” 대답은 물론, “없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합니다!”입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루가 아니라 순식간에라도 땅을 진통(陣痛)하게 하고, 한 나라도 한 순간에 태어날 수 있게 한다! 폐허가 된 시온, 불임의 딸 시온도 내 말 한마디에 진통이 올 것인데, 진통이 오기 전에 자녀들을 낳게 될 것이다. 그건 내게 누워서 식은 죽 먹기와 같다.”(사 66:7-9)
절망 중에 미래를 노래할 수 없었던 시온, 대(代)가 끊기는 불임(不姙)의 수치를 안고 살아야하는 시온이었습니다. 그녀에겐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희망이 있어야 한다면, 그 희망은 예기치 못하게 주어지는 선물이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하늘희망”이라 부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희망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여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아야할 이유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희망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선물이기에 우리는 그 희망을 “기적 같은 하늘 은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요점은 기상천외한 기적이 낙심 중에 있는 시온에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기적 말입니다. 불임이 너무 오래되어 자궁이 말라붙어 있는 시온, “어느 날” 그 자궁이 열리고 새 생명을 잉태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출산할 때는 놀랍게도 진통이 오기 전에 아기가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느 날”이 언제입니까? 언제이긴 언제입니까? “어느 날”입니다! 즉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어느 날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어느 날”에 구원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겁니다.
말라붙어 있는 자궁에 아기를 잉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며, 진통 없는 출산이야말로 노산(老産)의 여인에겐 하늘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로부터 줄줄이 아기를 낳게 된다는 것 역시 신비롭고 기적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7절에 단수 “남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복수형인 “자녀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로마는 하루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온은 순간에 세워집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태어나지 않지만 시온은 한 순간에 태어납니다. 잉태하고 해산하는 생명의 탄생은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행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갖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출산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서의 전반부에서 시온은 언제나 더럽고 추한 창녀와 같았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따라다니는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참조, 사 1:21-31). 국제적으로는 강대국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무력한 나라였습니다(참조, 사 9:8~10:11; 36~39). 결국 그들은 바빌론 유배라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길고 긴 유형(流刑)의 기간을 마치고 극적으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미래는 불투명했습니다. 나라 안의 갈등은 깊어만 갔습니다. 귀국 후의 정착은 예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고, 사회 구조는 불안정했고, 종교인들 사이에 골은 깊었습니다. 급진적 개혁가들과 온건한 개혁가들 사이의 갈등,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의의 급증, 종교적 안일주의와 무관심, 지체 되는 개혁 등은 시온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언제나 요동치게 했습니다. 정치와 사회와 종교 안에는 새로운 활력과 운동성은 미동(微動)조차 없었습니다. 바싹 마른 떨기 나무 같았고, 오랜 불임으로 바싹 마른 자궁과 같았습니다. 에스겔서의 한 문구처럼 “아주 마른 뼈들로 가득한 골짜기”(겔 37:1-14)와 같았습니다.
이사야서 후반부, 마지막 장에서 영원할 것 같았던 하나님의 딸 시온의 불임이 하나님의 극적 개입과 간섭으로 잉태와 출산과 가정의 기쁨 회복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위대한 반전입니다. 봉함 엽서처럼 이사야서의 첫 장과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이 반전의 접착제로 이사야서는 하나의 위대한 구원 서사를 이루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시온 회복 프로젝트는 대 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사야서는 남은 마지막 몇 개의 단락에서(10-14절; 15-17절; 18-21절; 22-24절) 시온의 회복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우주적 회복(새 하늘과 새 땅)의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기나긴 드라마 서사(Dramatic Narrative)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첫댓글 잉태하고 해산하는 생명의 탄생은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행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