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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121편 1-8절
찬송 / 245장 · 시온성과 같은 교회
성서 / 창세기 2장 15-25절, 요한복음 14장 15-26절
말씀 /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창세기 2장 18절)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4장 16절)
“키다리 아저씨”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912년 미국 여류작가 웹스터가 쓴 아동문학 작품이지요. 한 고아 소녀가 자신의 후원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소설입니다. 주인공 소녀는 후원자의 이름도 성도 모르고, 나이도 얼굴도 모릅니다. 다만 그의 다리가 길다는 인상이 남아 있었지요. 그래서 그냥 ‘키다리 아저씨’라 부릅니다. 이 ‘키다리 아저씨’는 후에 애니메이션과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이 ‘동화가 발표되기 직전인 1907년에 미국은 대공황이라 불리는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었습니다. 수많은 은행이 파산하고 기업이 도산했지요. 서민들의 일상이 파괴되어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길거리로 내몰렸습니다. 이런 힘겹고 어려운 시기에 무엇이 필요할까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막막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중요했을까요? 무엇보다 집도 잃고 부모도 잃어버린 고아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잡아주는 사람, 돕는 사람, 후원자입니다. 키다리 아저씨는 그런 후원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습니다. 조용히 그림자처럼 뒤에서 도와줍니다. 이런 후원자,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언제든 든든하게 지지해주고 응원하는 키다리 아저씨, 참 멋진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키다리 아저씨 이야기 배경에는 당시 미국의 상황이 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금융위기를 계기로 금융재벌들이 급부상했습니다. 이른바 금융재벌들이 지배하는 세상,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열린 것이지요. 돈은 곧 권력이요 명예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돈으로 정치도 지배하고 문화예술도 농락하고 사회도 조정하고 종교까지 쥐락펴락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이 후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대통령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뒤에 숨어서 그림자처럼 세상을 지배하던 자본이 이제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노골적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다른 이름이 바로 ‘후원자’입니다. 스폰서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들은 실제로는 ‘지배자’였습니다. 당시의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키다리 아저씨’는 어쩌면 지배의 야욕을 숨긴 음흉하고 탐욕스러운 후원자를 희롱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숨기는 후원자,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하지만, 그러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 후원자, 그런 따뜻한 후원자가 있다면 정말 든든하지 않을까요? 그런 후원자가 있다면 팍팍한 세상도 좀 살 만하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절의 말씀으로 요한복음의 말씀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일까요? 하나님께서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누구를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그분은 바로 ‘보혜사’입니다. 보혜사, 도와주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는 ‘보혜사’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보혜사’일까요? 사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은 어려움을 당할 때였습니다. 요한복음 9장 22절은 보면, 그때가 어떤 때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대 사람들이 이미 결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당시는 로마가 지배하는 시기였습니다. 기원후 70년 유대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완전히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지요. 그런데 로마는 식민지의 종교문제에 대해서 유화정책을 폈습니다. 본디 로마의 대표적인 신전 ‘판테온’은 그 말 자체가 ‘모든 신’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신을 다 수용한다, 그런 말입니다. 다만 한 가지 전제가 있다면, 신들의 위계질서를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로마의 최고 신의 대리자인 황제의 지배와 통제를 받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원후 90년에 유대교는 로마의 공식 종교로 인정을 받고, 유대교의 율법 학교를 세우고, 유대교의 본격적인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유대교가 합법 종교가 된 것입니다. 로마의 후원하에 유대교는 성장과 부흥을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은 본래 유대교 안에 있었으니까, 그냥 유대교 회당 안에서 법적으로 보장된 신앙생활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와 바울의 편지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지도자인 바리새파 율법학자들과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부딪혔지요.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이방 사람 문제였습니다. ‘이방 사람’ 중에서도 본디 유대 사람이었지만 바빌론 포로 이후 태어난 유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래도 할례를 받으면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부계나 모계 하나만 유대 사람이라도 할례를 받으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유대 혈통과 상관없는 완전한 이방 사람도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할례가 문제가 아니었지요.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이방인들은 유대 회당은 언감생심이고, 교회 안에서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심각하게 다툰 것도 주로 이 문제였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정말 다행히,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문제를 피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서 해결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정말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이방 사람들도,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사도행전 15장 11절) 정말 지금 들어도 가슴 벅찬 고백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멋진 결정 아닙니까? 마땅하고 마땅한 결정입니다. 이게 2000년 전에 내린 교회의 결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은 동시에 교회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 결의는 제 발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死生의 결의였습니다. 안전한 보금자리, 회당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바깥으로 추방당할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게다가 더해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라는 위험한 징표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당시에도 로마는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자들을 ‘십자가’로 위협하고 처단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한꺼번에 수천 명을 십자가에 끔찍하게 처형한 일도 있습니다. 로마제국 안에서는 ‘십자라’는 말 자체가 ‘빨갱이’보다 더 위험한 금기어였습니다. 그런데 대놓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선포한다면,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제국은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종교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안전이 보장된 회당에서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할례 문제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이방인까지 받아들기로 결의함으로써, 율법의 문자가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따름으로써,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습니다. 어떻게 거룩한 율법을 훼손하는 무리를 신성한 회당에 들일 수 있겠습니까? 유대교는 공식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들의 회당에서 추방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길거리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겠다.”(18절)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제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고아처럼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아처럼 아무도 의지할 수 없이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 말씀입니다. 실제로 교회는 성전도 회당도 없이 이 집 저 집 떠돌면서 모였습니다. 그것도 위험해서 심지어 땅속 무덤에서 모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도 작은 무리였습니다. 그 쪽수라도 많으면, 그래도 좀 위로가 될 텐데,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작고 너무 약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시고 나면 예수님을 미워했던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서 내쫓기고(16:2)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참 어렵고 막막한 때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이 슬픈 길이며 고난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 고아처럼 덩그러니 내던져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그 어려움, 그 박해와 고난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누가 있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혜사’입니다. 여기서 보혜사라고 번역한 그리스말 ‘παρακλητο’는 변호사, 대변자, 후원자라는 뜻입니다. 특히 로마가 지배하는 세계시장에서는 극한의 경쟁이 벌어졌지요. 돈이 지배하는 시장(아고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후원자/보혜사가 중요했습니다. 서로 속고 속이고 등쳐먹는 정글 같은 세상에서, 만약 김앤장 같은 후원자를 둘 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재벌이 뒤에서 지지한다면, 아니지요, 술 잘 처먹는 검사가 뒤에 있다면, 못할 일이 없겠지요? 뒤에 있는 사람, 후원자, 이른바 “빽”이 관건이었습니다. 정치에도 후원자가 중요하고, 예술에도 후원자가 필요하고, 교육에도 후원자가 문제고, 종교에는 더욱더 후원자가 간절했습니다. 후원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패와 생사의 관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실제로 로마의 황제는 후원자들이 만들어낸 희대의 걸작 중의 걸작이었습니다. 따라서 황제는 언제나 후원자들의 이익을 창출하는 그 자신의 거룩한 소명에 충성을 다해야 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를 약속하셨습니다.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 고아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켜주시고 위로하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성령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또 다른 이름 보혜사는 그렇게 험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과 함께하셔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분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물론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혜사 성령은 저 세상의 ‘후원자’들과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제 세상의 후원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자신들의 돈과 권력으로 후원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의 권력과 돈을 무한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탐욕스럽고 음흉한 스폰서일 뿐이었습니다. 도우려는 자가 아니라 지배하려는 자입니다. 무엇보다 저 세상의 후원자는 온갖 불법과 불의와 거짓을 무기로 삼고 횡포를 부립니다. 그렇지만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를 지지하고 후원하셔서 진리로 이끄시는 영입니다.
보혜사, 후원자, 돕는 분!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이 보내 주신 성령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봅니다. 하나님의 영, 거룩하신 성령이 보혜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보혜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 또한 서로 후원하고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보혜사 성령의 진정한 열매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숨을 불어넣으셨지요. 그래서 사람은 비로소 산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창조된 아담, 곧 사람은 아직 완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지으시고는 ‘참 좋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돕는 사람/짝’을 지으시기로 합니다. 어떤 짝이 좋을까요? 하나님은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새들을 빚으셔서 데려오셨지만, 그중에는 그를 ‘돕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맞는 짝이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마침내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사람의 창조가 완성되었습니다. 사람은 본디, 그렇게 혼자가 아니라 짝(one + one?)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이 첫 사람의 창조 이야기는 뭘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더불어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애초부터 서로 ‘돕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돕는 사람’이 무엇입니까? 바로 ‘후원자’입니다. 사람은 서로 지켜주고,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어려움에 함께 맞서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의 얼굴도 모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그 어떤 형상도 만들어서 모실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모세가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았다지만, 하나님이 다리가 긴 키다리 아저씨인지 아니면 숏다리 아저씨인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하나님, 그 얼굴도 모르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 우리의 후원자,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시인이 노래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병자들을 어루만져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식탁에서 떡을 떼어 나누어주신 분입니다. 우리를 섬기러 오신 분,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아니지요. 돕는 정도가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하여 다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영, 성령은 또 어떤 분입니까? 성령은 보혜사,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이지요. 또 우리 한민교회 창립기념 주일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한민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우리 교회는 무엇보다 보혜사 성령의 교회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든든히 지켜주시는 후원자, 보혜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 다만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지요. 우리가 함께 모이고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드리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그리고 또한 앞으로도 변함없이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위로하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든든한 우리의 후원자, 보혜사, 진리의 영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과 함께, 보혜사 성령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보혜사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후원자’가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보혜사가 되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서로 위로하며 사는 사람들, 서로 지지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서로 기도하고 서로 돕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의 간곡하게 당부하신 마지막 계명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 이 계명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험한 세상에서 서로 돕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