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19세기 이후의 역사를 공부하는데 역점을 둬야한다.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의 역사(사건들)와 인물들의 연구는 공부에 큰 도움이 된다.많은 인물중 한 여인을 중심
으로 오늘 얘기를 풀어가 보자.왕년에 자유중국이자 타이완의 총통이었으며,국민당군의 대원수였던
장개석(蔣介石:장제스=장카이섹)의 미망인 이었던 宋美齡 여사에 대해 말해보자.그녀는 106세까지
장수를 하고,2003년 10월24일(출생은 1898년 3월 6일 광동성 광주출생)에 영면했다.그녀는 1975년
남편인 장개석이 사망을 하자 미국으로 移住하여 뉴욕주의 동남부(허드슨강 동편) 롱아일랜드 가족
사유지에서 살았다.1998년 100세가 된후에는 사유지의 邸宅과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뉴욕의 맨하튼
아파트에서 비서들과 함께 조용한 만년을 보냈다.그녀와 장개석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훗날 대만의
총통을 지냈던 蔣經國과 군사령관을 지냈던 蔣緯國은 장개석의 3번째 부인이었던 陳부인의 아들이다.
아무튼 그녀는 2003년들어 起動이 불편해지기 까지는 100세가 넘어서도 건강한 삶을 유지 했다고
한다.
2, 그런데 그녀의 장수와 건강의 비결은 바로 '散策과 書藝,그림과 讀書,茶 마시기등 규칙적이고 정신
력 집중을 요하는 趣味生活과 道家式 생활습성 때문이었다고 측근들이 전했다.아마 세계의 역사를
봐도 송미령 여사의 자매들 만큼 지명도 높은 자매들을 찾아보기 힘들다.세기의 여인들이자 자매들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일찌기 기독교인으로 전환하여 미국물을 먹은 아버지인 찰리송은 客家인 출신으로
기독교 감리회 목사이기도 했지만,사업의 귀재이기도 했었다.찰리송은 일찌기 미국을 섭렵하여 서구인
들과의 연계사업이 번창하여 마침내 상하이 재벌로 성장을 한다.그의 4번째 자식인 송여사(송미령)는
1908년에서 1917년까지 미국을 유학할 정도로 서구화된 미국통 중국인 이었다.그녀의 언니들도 어린
나이에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일찌기 미국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다.그녀는 1966년 일제시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정부로 부터 대한민국 1등 훈장을 받은바 있다.20세기초 상해
재벌의 찰리송은 돈으로 중국 지배인물을 매수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3, 상해재벌 찰리송의 첫째딸인 宋愛齡은 당시 중국최고 부호인 孔祥熙(국민당 정부의 총리격인 행정원
장 엮임)의 부인이 되고,둘째딸인 宋慶齡은 孫文(쑨원)의 부인이 되어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國家主席
이 된다.그리고 쎄째딸인 송미령은 남경정부의 주석인 蔣介石 부인이 된다.그래서 첫째는 '돈'과, 둘째는
'중국'과,셋째는 '權力' 과 결혼했다는 당대의 명언이 나왔다.장개석이 송미령과 결혼할때 그는 세번째
부인인 陳여사 가 낳은 두아들(장경국과 장위국)두고 있었으나, '혁명과업을 완수할때 까지라는 조건부'
로 진여사를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그사이에 몰래 4번째 처인 송미령과 결혼(1927년 12월)을 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9살 처녀였고 장개석은 엄연히 妻子가 있는 41살의 南京政府 主席이었다.장개석은
장차 중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재벌의 협조(돈)가 가장 필요하다고 봤던 것이다.이것은 권력자 입장에
서 볼때 전혀 틀린 얘기가 아니다.역사의 지배자들이나 정치권력자들의 대부분은 해당시대의 대부호들
이나 대상인들과 연대하여 권력을 쟁취한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그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사실 장개석
이 실패한 것은 손문이 너무 일찍 죽은탓도 있지만,본인 스스로가 대지주 집안 출신이라 소작인들과 농노
신분의 농민들에게 필요한 토지개혁에는 관심이 없었다.즉 절대다수인 농민들 지지를 얻지 못했다.그는
지주층과 도시금융업자,사업가들과 연합한 탓에 손문의 급진적인 개혁을 이어 나가는것 역시 소홀했다.
4, 아무런 하자나 이유없이 버림을 받은 세번째 처인 진여사가 쓴 手記에 의하면,당시 장개석의 남경정부
에 송씨 재벌이 스폰서(정치자금,군자금)가 되는 조건으로 송씨의 첫째딸(공상희 부인:송애령) 이 제시한
3가지 조건을 장개석이 받아 들였다고 한다.그 3가지 조건을 보면,
1), 하버드 대학 출신인 자신의 동생인 宋子文(훗날 행정원장이 됨)을 재무장관으로 채용할 것,
2), 자기 남편인 孔祥熙를 행정원장(총리)에 임용할 것,
3), 장개석 본인은 자기동생 宋美齡과 결혼에 동의할 것,
으로 되어있다.그럼에도 장개석은 진여사쪽의 처남들인 陳立夫와 陳果夫를 평생 권력의 핵심에서 오른팔
역할을 맡게 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안이다.즉 전처의 처남들을 신뢰하고 살뜰이 챙겨줬다.진립부도
1999년 100살을 넘기며 장수를 했다.長壽와 건강도 타고나는 것이지 노력한다고 되는것은 아니다.
5, 아무튼 106세까지 살았던 송미령 여사는 '斷乎한 성격과 確固不動한 信念' 에 찬 일생을 살았다.그녀의
이런 강한 정신력과 '樂天的 성격' 이야 말로 100세 노인들의 장수 공통점이란 사실은 노인병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이른바 '굳은 意志, 삶에대한 적극적인 사랑,긍정적이며 현실적인 태도,필요에 따라 타협
하는 능력' 등등이 건강과 장수를 유지시켜 준다는 것이다.그녀의 단호성과 신념에 찬 행동은 그 유명한
'西安事變의 해결사' 역할이란 업적이 잘 말해 주고있다.장개석이 國共 합작을 呼訴하는 반란군 張學良
(동북군 장작림의 아들)의 인질이 되어 서안의 華淸宮(양귀비의 화청지)에 잡혀(1936년 12월 12일~25일
까지) 있을때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당시 남경정부의 고관대작들은 반란군 진압을 위해 무력행사
를 주장했으나 남편의 생명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송여사는 국공합작에 응할 것을 각료들에게 강요하고
그녀 자신이 직접 협상대표단을 이끌고 서안으로 날아가 담판을 짓는다.여기서도 주변의 반대를 무릎쓰고
오직 남편인 장개석의 생명구출에 목표를 세웠다.그러기 위해 그녀는 '중국 없이는 장개석 없고,장개석
없이는 중국도 있을수 없다' 고 웅변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6, 서안사건의 해결사 역할을 한 송여사의 단호함은 남자 이상의 강단과 신념을 엿볼수 있다.그후 송여사
의 인질이자 장개석의 인질을 자처했던 반란군의 首魁 장학량은 남경정부에서 연금상태로 있다가,다시
대만까지 이어지는 국민당 정권에서 연금상태로 101세까지 잘 살았다.훗날 닉슨 미대통령은 송미령을 향해
아름답고 부드러운 용모와는 다르게 속은 鋼鐵 이다 하여 外柔內剛의 표본이라고 말했다.그녀는 78세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그후 재발하여 재수술을 받았어도 건강한 노년 생활을 하고 106세 까지 살았던 것은
바로 단호한 성격과 인생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정신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그녀는 명랑하고
사교적이며 외교활동가 로 외교가에도 명성이 높았다.특히 대륙의 국민당 정부가 후반기에 들어 미국 일변
도의 외교를 펼쳤던 것에는 그녀와 자매들이 어린 나이에 미국에 유학한 경력에서 맺어진 인맥들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녀와 자매들은 타고난 미모에 유창한 영어와 웅변은 미국 국민들에게 중국지지 기반을
더욱 확고부동하게 만들어 국민당 정부가 미국의 원조를 얻어내는데 큰 공헌을 한바 있다.아무튼 미국이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시,또 공산당 토벌시 적극적으로 장개석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고 후원한 이면에는
사회주의 중국을 만들지 않으려는 욕망도 있었지만 송미령과 그 자매들의 능력이 발휘 되었음을 간과할수
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