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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 영월 여행
태백(太白)
태백시는 동서남북으로 1,000m 이상의 고봉으로 둘러싸인 대한민국 최고의 고원도시입니다. 남쪽으로는 태백산(1,567m)과 연화봉(1,053m), 동쪽은 삼방산(1,175m)과 백병산(1,259m), 북쪽은 대덕산(1,307m), 서쪽으로는 함백산(1,573m)이 자리 잡고 있는 태백산맥의 산 중에 있는 '하늘 아래 첫 도시'입니다. 태백산은 한반도의 등줄에 해당하는 큰 산줄기를 이루는 태백산맥 중의 큰 산입니다. 태백(太白)이란 지명은 '눈이 쌓이는 기간이 길고 적설에 의해 흰빛을 띠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태백산을 상징으로 내세운 태백시는 1973년에 각각 읍 취락으로 독립돼 있던 장성(長省)과 황지(黃池)를 통합하여 이뤄졌습니다.
태백시는 과거 석탄 도시로 이 나라에서 나는 석탄의 30퍼센트 이상을 캐냄으로써 '한국의 루르 지방'이라 불리기도 하면서, 국가 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석탄산업 합리화사업 이후 탄광은 대부분 폐광됐고 인구도 급속히 줄면서 불 꺼진 도시로 변했습니다. 대체산업에 골몰하던 태백시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낸 것이 고원 휴양과 레저 스포츠입니다. 고원으로 이루어져 평야지대에 비해 여름철 평균 기온이 5-6도나 낮고, 경관이 수려해 이제는 고원 관광지로 각광 받고 있습니다.
황지(黃池)
해발 700m의 고원에 있는 황지연못은 낙동강 1300리의 첫 여울입니다. 이 못에서 솟아나는 물은 드넓은 영남평야를 도도히 흘러가게 됩니다. 세 못이 연하여 있는데 위의 못은 둘레 100m, 가운데 못은 둘레 50m, 아래 못은 둘레 30m정도로서 하루 5천t의 물이 용출되고 있습니다. 원래 황지라 불리기 전에는 '하늘 못'이라는 뜻으로 천황(天潢)이라 하였습니다. 이곳에 살던 황부자가 시주를 요하는 노승에게 시주 대신 두엄을 퍼 주어 이에 천지가 진동하면서 집터가 연못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이곳은 한국명수 100선 중의 한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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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령(자작나무숲)
고개에 빗물이 떨어져 북으로 흐르면 한강, 남으로 흐르면 낙동강, 동으로는 오십천이 시작되는 곳. 자작나무가 하얗게 숲을 이룬 고개 이름은 삼수령(三水嶺)입니다. 곤궁했던 옛날, 삼척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이상향인 황지를 찾아 넘은 고개라 해서 피재라고도 합니다. 아침나절 안개가 끼어 있을 때가 가장 신비롭게 보이며 역광을 받은 오전에는 은색과 검은색만 존재하는 초현실적인 풍경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고한읍에서 태백시로 가는 두문동재 고갯길도 자작나무숲으로 유명합니다. 1980년대 조성된 인공림으로 고갯길을 돌고 돌아 8부 능선쯤에 숲이 있습니다.
매봉산 바람의 언덕
매봉산 아래부터 정상(1303m) 부근까지 가파른 비탈에 펼쳐진 13만 평방m(40만 평)의 고랭지 배추밭, 이와 조화를 이룬 매봉산 꼭대기 능선에 자리한 열일곱 대의 거대한 풍력발전기들이 이색적인 풍광을 연출하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발전기 외에도 조그마한 네덜란드 식 풍차가 한 대 서 있어 이국적 풍경을 연출합니다.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분기하는 매봉산 정상에서 태백의 산들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입니다.
함백산 만항재 야생화축제
강원도에서도 심심산골인 태백, 정선, 영월 세 고장의 경계를 이룬 지점에 자리한 만항재는 우리나라 높은 산고개 중 포장도로가 되어 있는 가장 높은 곳(1330m)에 있어 차를 타고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고개입니다. 구불거리며 이어지는 고갯길의 정취도 뛰어나지만 정상에서 보는 산의 물결 또한 장관입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야생화 군락지인 만항재에 오르면 ‘하늘숲공원’과 ‘산상의 화원’이 있습니다.
정상 주위론 온통 야생화밭이어서 운치를 더하고, 길 좌우로 펼쳐진 울창한 원시림은 어떤 고갯길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가 끊임없이 피고 집니다. 여름이면 동자꽃, 하늘나리, 범꼬리 등이 숲을 밝힙니다. 힘들여 등산하지 않아도 눈만 돌리면 야생화 천국입니다. 도시락 하나 챙겨서 돗자리만 펴면 천상의 소풍입니다. 조망이 훌륭하고 트레킹 코스도 만점입니다. 숲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공부도 하고 소풍도 즐길 수 있습니다.
영월(寧越)
고려시대의 무관 정공권(鄭公權, 초명은 樞)이 읊은 시 구절대로 '칼 같은 산들이 얽히고설키어 있는' 영월군은 산이 깊은 강원도에서도 더욱 산이 깊어 이웃의 평창군, 정선군과 함께 '山多 三邑 寧平旌'(산다 삼읍 영평정)으로 불렸습니다. 높고 가파른 산이 겹겹이 솟아 있는 영월군은 강원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내륙지방으로 오이처럼 길쭉하게 생긴 땅이 옆으로 누워 있습니다. 칼 같은 산들의 골짜기마다에 흐르는 물줄기를 두고 정공권은 '비단결 같은 냇물은 맑고 잔잔하다'고 했습니다.
평창군의 흥정산과 횡성군의 태고산에서 발원하여 영월의 서쪽지방을 두루 거쳐 흘러온 서강(西江)은 영월읍을 감싸고 흐르다가 영월읍 덕포리 합수거리에서 또 다른 강줄기 곧 정선군 쪽에서 흘러내려온 동강(東江)을 만나 마침내 굵은 물줄기가 되어 남한강을 이룹니다. 암캉인 서강과 수캉인 동강이 합쳐져 이루어진 남한강은 남쪽으로 계속 흐르다가 하동면 대야리에서 옥동강을 맞은 뒤에 강원도 땅을 벗어나 충청북도 단양군으로 빠져나갑니다. 이 물줄기를 통해서 1930년대까지만 해도서울의 마포나루에서 영월까지 소금배가 드나들었습니다.
고구려시대부터 독립된 행정단위였던 이 군은 통일신라시대 흥렬왕 때에 내성현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공민왕 21년에 이 고을 사람인 연달마실리가 명나라에서 내시로 있으면서 공을 세웠다고 하여 내성현은 군으로 승격, '편안히 넘어가는 곳, '寧越'(영월)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줄곧 충청도 땅이었던 이곳이 강원도 땅이 된 것은 조선 초기인 정종 1년(1399)부터입니다. (참고: 뿌리 깊은 나무 ㆍ '한국의 발견')
칠랑이골 백운산장(숙소)
신라 때 7명의 화랑이 수련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입니다. 오염원이 전혀 없는 태백산 최상류의 청정계곡으로 수정과 같이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며, 이 계곡을 감싼 산천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룹니다. 곳곳마다 기암절벽, 우거진 숲을 이루고 있어 한국의 원시림 계곡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영월에서 태백을 넘어가는 고갯마루인 어평재(화방재) 바로 아래에 위치해, 한국에서 가장 시원한 도시인 태백에서도 가장 서늘하고, 모기도 없는 곳입니다. 심산유곡에 자리 잡은 산장의 인근에는 민가가 없어 밤이면 쏟아지는 별빛과 아침이면 온갖 새들의 지저귐에 도심 생활의 피곤함을 절로 잊게 되는 곳입니다.
상동 이끼계곡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울창한 숲과 바위마다 초록빛 이끼들이 가득한 풍경이 있는 곳. 서늘한 흙냄새와 피톤치드 향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태고의 자연이 거기에 있습니다. 길 끝까지, 왼쪽 개울은 흙도 바위도 모두 이끼로 뒤덮여 있습니다. 숨을 죽인다면 들리는 소리는 오직 물소리밖에 없습니다. 삼척 무건리 이끼계곡, 평창 장전리 이끼계곡과 함께 강원도 3대 출사지로 이름 높은 곳입니다. 크고 작은 바위들에 이끼들이 초록융단을 깔아놓은 것 마냥 신비로운 모습을 자아내고 있고 작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시원한 물소리와 산새소리, 풀벌레소리의 화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마치 열대우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환상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솔고개 소나무
영월 청령포에 갇혔다가 사약(賜藥)을 받은 단종은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습니다. 산을 지키려 고개를 넘다가 들른 곳이 산솔마을입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그를 배웅한 이가 마을 소나무였습니다. 오른편엔 맑은 옥동천이 흐르고 왼편 언덕에는 기품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이곳 솔고개 소나무는 수령 280년으로, 둘레가 3.3m에 수고가 14m라고 합니다. 청도 운문사 처진소나무와 속리산 정2품 소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품 소나무로 꼽힙니다. 솔표 우황청심환의 제약회사 조선무약이 이 소나무를 모델로 기업 로고를 만들고 주변을 관리합니다. 옥동천 물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수달길 트레킹코스는 소소한 산책을 즐기기에 좋고, 수달도 만날 수 있습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영력이 있으며, 특히 득남에 대한 소원은 꼭 들어준다 하여 ‘소원소나무’라고도 불립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소나무는 암소나무로, 남편이 되는 수소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본디 솔고개는 양지와 음지 솔고개로 나뉘는데, 음지 솔고개는 도로를 사이에 둔 목우산 밑에 있습니다. 바로 이 음지 솔고개에 이 소나무의 남편인 수소나무가 있습니다. 음지고개 수소나무는 350살로 훤칠한 키와(20m) 미끈한 몸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잔가지를 치지 않고 하늘을 향하여 곧장 위로위로 끌어 올린 기상과 남성미 물씬 풍기는 자태가 왜 수소나무라 하는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청령포(淸泠浦, 국가 명승 제50호)
조선 제6대 왕인 단종(1441-1457)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 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 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습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六六峯)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입니다.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 땅으로 유배되어 온 단종은 서강이 삼면을 돌아 흐르고 나머지 한 쪽도 깎아지른 절벽으로 가로막힌 이 적막한 '물의 감옥'에서 1457년 여름 두 달을 보내고 늦장마의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자 강 건너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겼다가 음력 10월 24일 사약을 받습니다. 청령포나루터로 내려서면 강 건너편에 청령포가 섬처럼 떠 있습니다.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해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루고 있는 청령포 풍경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경치가 오히려 슬픈 역사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탓으로 이제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50명까지 태울 수 있는 동력선이 강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 주고 있습니다. 슬픈 역사와는 달리 청령포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뱃놀이를 하는 유람객처럼 즐거운 표정들입니다. 강폭이 그리 넓지 않아 배는 타자마자 뱃머리를 돌리고 곧 건너편에 닿습니다. 옛날에는 나룻배로 건넜지만 바람이 다소 거칠어지면 물살이 급해져서 위험하기 때문에 동력선으로 바꾸었습니다. 배에서 내려 강모래와 자갈밭을 지나 솔숲으로 들어섭니다. 숲은 깊고 어둡다는 느낌이 듭니다. 먼저 단종이 기거했던 단종어소를 찾습니다. 담장 안에는 '단종이 이곳에 계실 때의 옛터'라는 뜻의 글이 영조 임금의 친필로 음각돼 있는 '端廟在本府時遺址'(단묘재본부시유지) 비석이 있습니다. 단종 임금은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파란 비단 옷을 입고 독서 중입니다. 단종(밀랍인형)의 얼굴은 무표정합니다.
단종어소에서 나와 ‘천년의 숲’으로 명명된 청령포 솔숲길을 걷습니다. 청령포의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는 유난히 우아한 자태의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1000여 그루 소나무들의 한가운데 우뚝 선 높이 50m, 줄기 둘레 5m, 수령 600년의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단종이 두 갈래로 갈라진 이 나무에 걸터앉아 쉬면서 시름에 잠기곤 했다 하는데, 생멸하는 물체로서는 유일하게 단종의 유배를 지켜 본 존재입니다. 곧, 당시 처절하였던 단종의 생활을 보았으니 관(觀)이요, 하염없던 단종의 오열을 들었으니 음(音)이라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어 왔습니다.
이곳 청령포 수림지 안에는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은 왕이 계시던 곳이므로 뭇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출입금지 푯말인 금표비(禁標碑)가 있습니다. 구의산은 봉우리가 예순여섯 개나 되어 육육봉이라고 불립니다. 육육봉은 청령포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육로지만, 험하기도 하고 많은 봉우리 때문에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육육봉으로 오르는 길목의 층암절벽 위에는 단종이 강 건너 세상을 보러 오르거나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던 노산대(魯山臺)와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망향탑이 있습니다.
단종의 천년 유택(幽宅), 장릉(莊陵)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청령포에 유배된 후 열일곱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해 그 주검이 동강에 버려졌습니다. 엄기원의 역사소설 '단종과 엄흥도'란 글에서는 장릉에 단종이 묻히게 된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 부부와 아들 삼형제, 며느리가 수의와 관을 마련하고 제사 음식, 삽과 괭이, 낫과 도끼 등을 지게에 얹어 동강으로 나갔습니다. 떠내려가지 않고 여울진 곳에 머물러 있던 시신을 건져 염을 하고 수의를 입힌 후 입관시키고는 지게에 지고 깊은 산속으로 찾아들었습니다. 엄흥도와 아들 삼형제가 무거운 관을 번갈아 지고 가다가 영월 엄씨들의 시조인 내성군을 비롯하여 10대에 이르는 많은 조상 묘들이 있는 동을지산(冬乙旨山)에 이르렀습니다.
소나무 아래 숨어 있던 노루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노루가 누웠던 자리를 찾아보니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포근한 풀밭이었습니다. 눈이 녹아 있는 그곳에 지게를 내려놓고 쉬고 있다가 더 깊은 산골로 옮기려 했으나 지게가 움직이지 않자 이곳이 명당인가보다 생각하고 그 자리에 시신을 암장했습니다. 땅을 파니 노란 황토가 나왔습니다. 대명당 자리였습니다. 봉분을 만들 수 없으니 평장을 하고 푯돌을 묻어 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뒤 엄흥도는 공주 동학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단을 쌓은 뒤 매월당 김시습과 함께 노산군의 삼년상을 치른 다음 깊숙한 산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역사상 가장 슬프고도 애환이 많은 단종의 능은 처음부터 택지된 곳에 조성한 능이 아니기 때문에 여느 조선 왕릉의 구조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 첫째, 조선 왕릉은 한양 백리 안에 모시는 것이 관례였지만 단종의 능은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왕릉이라고 합니다. 둘째, 대부분의 왕릉이 봉분, 정자각, 참도, 홍살문이 일직선상에 조영되지만 단종의 능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가 'ㄱ'자형으로 꺾여 있으며, 봉분은 신좌을향으로 모셔졌기 때문에 정자각에서 능의 옆구리를 향해 절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장릉 주위의 소나무가 모두 능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선돌
방절리 소나기재 주차장에서 출발해 선돌을 보러 갑니다. 방절리(芳節里)라는 지명은 단종이 이곳에 와서 귀양살이를 할 때 그를 따르며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지어졌으며, 소나기재라는 지명은 옛날 청령포로 떠나는 단종을 보고 하늘도 서러워 소나기를 내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선돌은 서강 절벽에 두 갈래로 우뚝 솟은 70m 높이의 큰 바위가 말 그대로 우뚝 높이 서있는 것입니다. 두 개의 바위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마치 큰 칼로 바위를 쪼개 놓은 듯 우뚝 서 있는 모습은 정말 장관입니다. 푸르디푸른 강과 깎아지른 층암절벽, 수수한 인삼밭과 집들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집니다. 선돌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아름다워 신선암으로도 불립니다.
어떻게 이런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요? 기본적으로 도담삼봉이 만들어진 원인과 같다고 합니다. 선돌이 위치한 곳은 서강의 공격사면에 해당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하천 침식(浸蝕)과 지하수 용식(溶蝕), 그리고 지반 융기(隆起)가 반복되면서 선돌과 절벽 사이의 약한 부분이 깎여 나가 지금과 같은 지형이 형성됐다고 합니다. 이 선돌은 같은 석회암 지역인 중국의 계림지방 일부를 옮겨 놓은 듯한 형상입니다. 계림이나 선돌이나 석회암 지역의 공통된 특징은 봉우리가 우뚝 선다는 점입니다.
한반도 지형
태기산(1261m)에서 흘러내린 주천강과 평창에서 달려온 평창강은 영월군 서면 신천리에서 새로운 물 '서강'을 이룹니다. 주천강과 평창강이 만나 서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인 옹정리는 아름다운 서강 경치의 절정을 이루는 곳입니다. 주차장에서 800m의 숲길을 따라 걸으면 선암마을의 뒷산전망대에 올라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가 휘돌며 만든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습니다. 한반도를 그대로 축소한 지형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동쪽은 깎아지른 절벽, 서쪽과 남쪽은 흰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백사장. 신기하게도 동고서저(東高西低)형 지형까지 한반도와 닮았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 모두가 '아!'하는 감탄사를 토합니다. 한반도를 그대로 축소한 지형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위성에서 내려다본 한반도의 모습 꼭 그대로입니다. 한반도를 휘돌아나가는 서강은 바다를 연상케 합니다. 북쪽은 만주 벌판에서 뻗어 내린 듯한 산줄기가 이어집니다. 백두대간을 연상케 하는 무성한 소나무 숲과 땅끝마을 해남과 포항의 호미곶과도 같은 형상이 오묘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하늘이 내린 감투를 세 개나 쓰고 있습니다. 국가지정 명승 제75호, 람사르 습지 보존지역, 고생대 국가지질공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암마을 뗏목타기 체험
우연이라기엔 참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리 봐도 한반도와 꼭 닮은 저 지형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신비로운 자연의 경이를 눈에 담았으면 영월의 서강이 굽이쳐 흐르며 빚은 한반도 지형의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기 위해 한반도 지형 주위를 유유히 떠도는 뗏목을 타러 ‘한반도 뗏목마을’로 갑니다. 한반도를 꼭 빼닮은 이곳 지형은 2009년 행정구역 명칭을 2009년 '서면'(西面)에서 한반도면으로 바꾸게 할 정도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어 2011년에는 명승 제75호로 지정됐습니다. 흰색 한복을 입은 사공 두 분이 동승해 뗏목을 조종하고 한반도 지형에 관한 설명도 해줍니다. 뗏목을 타고 한반도 지형을 빙 돌아갔다 되돌아오는 데에는 30분가량 걸립니다.
뗏목 위에서는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것과는 또 다른 한반도 지형의 풍광을 마주합니다. 이곳은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한반도처럼 서강 강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동쪽은 나무가 울창한 고지대이고, 서쪽은 갯벌처럼 완만한 모래밭이 펼쳐진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입니다. 중간 중간 실제 대한민국 지형과 비교해 여긴 부산 앞바다, 여긴 제주도 하는 식으로 설명을 해주는데 제법 그럴듯합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지형입니다. 뗏목에서는 노를 저어보는 체험을 할 수 있고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을 강물에 담근 채 뗏목을 타는 특별한 경험도 해볼 수 있습니다. 뗏목에는 물에 젖은 발을 닦을 수 있는 페이퍼 타월이 비치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