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순상쟁
시위심병
- 거스름과 따라감이 서로 다투는 것
이것이 마음의 병이다
송
두 가지 상쟁하는 마음은
결국 내가 만드는 고락의 업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며 중도의 마음을
유지하도록 마음을 추스려야 한다.
강설
위는 어긴다는 뜻으로 즐거운 마음에 어긋나니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순은 따른다는 뜻으로
내 마음에 맞는다는 말이다. 위와 순을 예로 설명하면,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마음의 즐거움을 따라가는 것이니
순이 되고, 음식을 싫어하는 것은 마음의 즐거움을 거스르고
괴로움을 따라가는 것이니 위가 된다.
비위에 거슬리는 것과 비위에 맞는 것이 싸우게 되면
그것이 곧 마음의 병이 된다. 좋고 싫은 모순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여 위순상쟁이라 하고
이를 마음의 병, 심병이라 하고 화병이라고도 한다.
모두가 무진 애를 쓰며 살아간다. 좋은 것을 따르고 싫은 것을
거스르려고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의 항상 상쟁하면서,
고락의 인과가가 짧게 또는 길게 작동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운동경기를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무언가에 푹 빠졌을 때는 고락의
감정이 격렬하게 생멸 윤회하고 있는 상태라는 말이다.
어떤 사건에 연루가 되었다고 하자. 그때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락 감정의
인과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 자체는 공업의
일환일 뿐이고, 엄밀히 말하면 개개인의 고락 없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락의 분별심을 내지만 않는다면, 사건을 사건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으로 하나의 인과 연으로 볼 뿐이다.
어떤 일련의 사태가 있다고 하자. 복잡한 사정들이 혼재하여 몹시 마음의
혼란스러울 법도 하지만, 인과 인연의 흐름으로 보고 시비의 마음을
놓아버리면 된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갑론 을박을 하는 것을 두고
고락 시비의 마음이 드는 순간 이 또한 인과의 흐름이려니 생각하고
이를 보는 불편한 마음까지 내려놓는다.
이렇듯 두 가지 상쟁하는 마음은 결국 내가 만드는 고락의 업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며 중도의 마음을 유지하도록 마음을 추스려야 한다. 하나의 사건 또는
대상을 바라볼 때, 그 사건 그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보는 각자의 고락 업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불편한 것이 아니고 사건을 불편하게 보는 사람이 불편한 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하상 '둘'로 보이게 한 다음 하나는 버리고
다른 하나는 취하게 하는 마음의 병, 그것은 바로 '이원성'이라는 병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이 병에 걸려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그와 같은 이원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음에도 이원성이라는 우리 마음의 병은 눈앞을 가로막아 ' 있는 그대로의'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 자신을 매순간 '가려서 택하게'함으로써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고 메마르게 하므로, 내 마음 안에서
반드시 치유되고 사라져야 한다.
승찬스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 '치유의 길'만을 이 <신심명> 속에서 거듭거듭 강조하며 가리켜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만 승찬스님께서 가리키는 그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위순상쟁
시위심병
- 거스름과 따라감이 서로 다투는 것
이것이 마음의 병이다
신심명 강설 중에서, 진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