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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인근이 자생지인 달리아는 추위에 약해서 겨울 동안 온실에서 뿌리를 보호해줘야한다.
영국에 사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어느 나라에서 왔니?”라는 것이었다. 이름보다 먼저 내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묻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데 가장 빠른 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똑같은 질문을 식물에게도 적용해 그 식물의 자생지가 어디인가, 어디에서 살았던 식물인가를 아는 것이 식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에게 자생지란 어떤 의미일까?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가 대한민국에서 왔다고 하면 어떤 역사적 분위기에서 자랐고, 어떤 문화적 특징을 지니고 있을지, 어떤 날씨의 나라에서 살았을지가 대강 짐작이 된다. 결국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출신 국가는 나의 중요한 특징이 되는 셈이다. 이걸 식물에 도입해보면, 예를 들어 달리아Dahlias나 칸나Canna와 같은 식물은 자생지가 멕시코 인근의 열대지방이다. 멕시코의 기후를 떠올려보자. 뜨거운 태양과 바람, 비옥한 토양. 이런 기후를 자생지로 두고 있는 식물은 태어날 때부터 추위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다. 그러니 추위에 약할 수밖에 없다. 이건 씨를 가져와 추운 지방에서 싹을 틔운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전적으로 달리아의 씨에는 자생지에서 살았던 특징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식물을 우리나라처럼 겨울이 매섭고 추운 나라에서 키우고 싶다면 추위가 오기 전, 식물의 뿌리를 캐두었다가 온실에서 보관한 뒤, 다음 해 봄 추위가 완전히 물러갔을 때 다시 심어주는 방법밖에는 없다.
지구에서 가장 큰 잎을 지닌 식물 중에 하나인 건네라Gunnera는 자생지가 브라질의 숲 속이다. 때문에 습기가 많고 기온이 22~29℃ 사이에서 왕성한 번식을 하고 추위에는 매우 약하다. 영국인들은 수백년 동안 이 건네라를 영국에 정착시키기 위해 애를 써왔고, 드디어 특별한 월동 방식을 연구하여 건네라 정착에 성공했다.
건네라의 큰 잎 수십장을 덮어 일종의 텐트를 만들어주고, 그 위에 줄기를 꽂아 텐트가 겨울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덮어준다. 이 방식은 영국 정원사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 원예방법으로 11월 경에 이뤄진다.
식물에겐 스스로 움직일 방법이 없다. 때문에 자신이 태어난 지역을 벗어나 이동을 하는 것은 온전히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식물이 자랐던 자생지와 똑같은 환경 속에서만 그 식물을 키우고 싶어하질 않는다. 열대식물을 온대기후에서도 키우고 싶어하고, 추운 북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와 같은 식물이 아열대 기후 속에서도 자라게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식물들이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발생한다. 사실 정원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정원사는 자생지를 떠난 식물이 환경을 이겨내고 잘 살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정원사를 ‘식물의 의사’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자생지를 떠난 식물이 다른 환경 속에서도 잘 자랄 수 있게 하는 방법들은 무엇일까? 이 방법을 알려면 우선 식물들의 한계점을 알아두는 것도 필요하다. 정원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식물에겐 ‘이제 더 이상은 못 견뎌!’라는 지점이 있다. 예를 들면 영하 몇도까지 견디느냐, 혹은 어느 정도 더운 온도까지 참을 수 있느냐, 또 어느 정도까지 비와 눈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느냐 등이다. 바로 이 식물의 ‘견뎌줌’을 영어로는 ‘식물의 hardiness’, 우리나라에서의 용어로는 ‘식물의 내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식물의 hardiness는 기후 중에서도 특히 온도에 큰 영향을 받게 되는데 추위를 얼마나 견디느냐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식물군을 분류한다.
1) Hardy Plants (내성이 매우 강한 식물군)
영하의 추위를 견디는 것은 물론이고 이름 봄, 4~6도의 온도 이상이 확보되면 싹을 틔울 수 있다. 우리나라 자생의 다년생 목본 식물군은 대부분 이 군에 속해있다.
봄,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Magnolia도 대표적인 하디 목본 식물 중에 하나다.
2) Half-Hardy Plants (추위를 이기지만 월동대책에 필요한 식물군)
하디식물이 특별한 조치 없이도 영하로 떨어지는 추위까지도 견뎌낼 수 있는 식물군이라면 half‐hardy plants는 따뜻한 지역을 자생지로 두었지만 찬겨울을 견딜 수 있도록 적응을 한 식물군을 말한다. 이 군에 속한 식물들은 겨울을 날 수 있게 적응을 하긴 했지만 강추위를 이길 순 없기 때문에 월동을 위해서 땅에 볏짚이나 담요 등을 덮어주거나 줄기를 따뜻한 소재로 감싸주는 월동조치가 필요하다.
자생지가 중국의 따뜻한 남부지방인 배롱나무Lagerstroemia는 남부지방에서는 겨울을 나는 데 문제가 없지만, 중부 이상에서는 가지를 싸주는 등 별도의 월동 조치가 필요한 half-hardy 식물 중의 하나다.
3) Tender Plants (추위에 약한 식물군)
대부분 자생지가 열대기후이거나 혹은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인 식물들이 이 텐더식물군에 속한다. 추위에 약한 이 식물군은 온도가 12도 이하로 내려갈 경우 성장을 멈춘다. 또 낮기온이 크게 올라가는 여름이라해도 일교차가 클 경우, 밤 동안 온도가 12도 이하가 되면 그 영향으로 쉽게 죽는다. 추위에 매우 약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실내 혹은 온실에서 관리를 해줘야하고, 싹을 틔울 때에도 온실에서 키운 뒤에 추위가 완전히 사라지고 밖으로 옮겨 심어야 한다.
라벤더Lavender와 같이 지중해 지역이 자생지인 텐더 식물군은 추위가 사라질 때까지는 온실에서 키운 뒤 밖으로 내가는 것이 좋다.
Tip point 온실(Glasshouse)의 역사는 눈물겨운 과학의 역사!
따뜻한 지역에서만 자라는 식물을 추운 지역에서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원초적인 관심과 노력이 온실이라는 독특한 정원의 영역을 발달시켰다. 그렇다면 온실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역사적으로 추적을 하자면 인류 최초의 온실은 1619년에 오렌지 나무를 심기 위해 지어졌던 독일 하이델베르크 성의 온실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온실은 탈부착이 가능한 형태로, 더운 여름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지붕과 벽체를 떼어두었다가 겨울이 되면 다시 설치를 하는 방식으로 사계절 열대 과일을 길렀다.
온실의 역사는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열대의 과일인 파인애플, 바나나, 오렌지 등의 열매를 수확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열대기후에서나 재배 가능한 식물을 가을과 겨울이 존재하는 온대 기후의 유럽에서 키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온실발달의 역사는 수많은 실수와 그 극복의 역사였다.
사실, 유리가 발명되기 전, 온실은 종이에 기름을 먹여 그것을 덮어 사용했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유리로 바뀌게 되었고, 유리만으로는 겨울을 이기는 데에 한계가 있자 온실을 덮히는 히팅시스템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초기 히팅시스템이 개발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온실에 온기를 만들어냈을까? 영국인들의 경우는 온실을 덥히기 위해 소나 말의 분(糞)을 이용했다. 소나 말의 분을 썩히게 되면 열이 발생하는데, 바로 그 열을 이용해서 온실의 온도를 높인 것이다. 그러나 지독한 냄새로 인해 결국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두번째 단계로 개발된 것이 온실 안의 ‘스토브’, 즉 난로였다. 그러나 문제는 스토브의 열기가 온실 안의 공기를 목이 탈 정도로 바짝 건조하게 만들어 식물들을 말라버리게 했고, 또 나무나 석탄을 태우면서 발생하는 유독가스가 식물을 몰살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스토브가 실패하자, 다시 도입된 히팅시스템이 ‘스팀’이었는데 이번에는 식물을 아예 데쳐버리는 효과로 식물이 죽는가 하면, 지나치게 많은 석탄을 소비하는 문제가 생겨 이것 역시 실패로 끝난다.
결국 오늘날까지도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겨지는 ‘뜨거운 물 순환 시스템’이 개발되었는데, 이것은 물을 데워 수도관을 통해 온실 전체를 지나가게 하는, 일종의 물을 이용한 보일러와 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뜨거운 물 순환 시스템을 개발한 사람이 프랑스의 의사로, 그는 인큐베이터 연구를 위한 실험으로 달걀 부화 장치를 개발하면서 혈관에 피가 돌고 있는 현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 장치를 개발해 외과협회에 보고했다. 바로 이 의학보고서를 보고 샤벤느라는 사업가가 아예 중앙난방 온수 순환 시스템을 발명해 상품화시켰고, 이로 인해 온실은 커다란 혁신을 맞게 된다.
사실 온실의 히팅시스템은 지금도 연구가 계속되고 있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때문에 앞으로 10년 후 쯤에는 얼마나 더 획기적이고 편리한 온실이 우리 눈 앞에 등장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영국, 왕립식물원 큐가든(Kew Gradens)의 온실, 팜하우스(Palm House). 팜하우스는 열대식물 특히 야자수Palm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1848년에 완성되었다. 팜하우스는 150미터 떨어져 있는 발전소(Campanile이라고 이름 붙여짐)에서 열을 만들어낸 뒤 지하관을 통해 열기를 온실로 전달시켰다. 당시는 석탄을 때 열기를 전달시켰지만, 지금은 샤반느가 개발한 방식을 이용해 지하관을 통해 뜨거운 물을 전달시킨다.
팜하우스에서 바라본 발전소,Campanile 굴뚝의 모습. 지하관은 호수의 밑을 통과해 팜하우스로 이어진다.
영국, 그레이트 딕스터에 조성된 ‘열대식물화단’의 5월 중순 모습. 바나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짚으로 감싸주었고, 아직은 추위가 가시지 않아 거두지 않은 상태임을 볼 수 있다. 열대식물로만 구성된 이 화단은 특별히 여름 6월에서 9월까지가 절정이다. 같은 식물군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관리 방식이 똑같아 식물들이 좀 더 튼튼하게 자라서 매우 화려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와 같은 온대기후는 양면성이 있다. 추운 지방의 식물과 더운 기후 속의 식물을 모두 키울 수 있지만, 살짝 뒤집어 생각하면 추운 기후 속의 식물은 여름에 죽일 수 있고, 더운 열대식물은 겨울철에 수명을 다하게 만들 수 있다. 때문에 다양하게 식물을 즐기고 싶다면 그에 따르는 조치가 좀 더 세심하게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작은 나라지만 이 안에 대나무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북방한계선이 있고, 자작나무가 더이상 내려갈 수 없는 남방한계선이 있다. 이 지점을 넘어서 식물들을 키우고 싶다면 그에 따르는 여러 조치들을 정성스럽게 해줘야 한다. 서양의 온실발달 역사에서 보았듯이 아름다운 정원문화는 식물과의 끊임없는 교감과 알아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가든디자인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열대식물군과 춥고 시린 것을 좋아하는 고산지대 식물을 함께 심는 디자인을 내놓는다면 물을 주는 횟수가 제각각 달라야 하고, 그늘에 가려줘야 할 식물과 햇볕을 하루 종일 받게 할 식물이 엉켜서 관리가 부실해질 수 밖에 없다. 설령 잘 관리를 해도 타고난 습성에서 벗어난 식물은 결국 죽게 된다. 그래서 식물 디자인을 할 때, 중요한 사안 하나. 태생지가 비슷한 식물군을 묶어주는 방법은 식물들끼리 서로 의지가 될 수 있기에 식물 스스로 건강해질 수 있는 좋은 식물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