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개혁 과제가 있다. 사법 개혁과 언론 개혁이다. 그러나 그 어떤 정권도 이를 완성했다고 평가한 국민은 없었다. 사법 개혁은 지난 정권에서 5년 내내 계속됐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라는 결과물을 내놓았지만, 공수처의 지위와 기능은 힘을 잃고 있다. 언론 개혁 문제는 정권과 언론의 올바른 관계 설정 차원이 아닌 서로서로 길들이고 기생(寄生)하는 차원에서 진행됐다.
언론은 입법·사법·행정부에 이어 민주주의를 이루는 네 개의 기둥이다. 따라서 ‘제4부’로 불리며 또 다른 권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흔히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불가근불가원(不可近 不可遠)으로 설명한다.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고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언론의 자유는 헌법(제21조)이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서는 공영방송의 경우 의사결정을 내리는 지배구조 구성 권한이 선거에서 승리한 여권에 주어진다. 권력과 언론이 너무 가까우면 권언유착(權言癒着)이고 너무 멀면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
전두환 정권은 쿠데타에 저항하는 언론인을 해직시키고 언론사를 통폐합했다. 이후 역대 정권과 언론의 관계는 정권의 성향에 따라 보수와 진보 언론으로 나뉘며 서로의 유착 관계를 수시로 바뀌어 왔다.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가 낳은 ‘언론의 정치화’였다. 언론이 정권에 기울어지면 언론도 정권도 모두 불행해진다. 감시와 견제, 비판이 사회와 국가를 건강하게 지킨다.
언론의 역할과 책임을 설명할 때 인용되는 용어가 있다. 워치독(Watch dog)이다. 정치와 자본 권력을 감시해 부당함에 맞서고 이를 바로잡아 사회 공동선을 도모하는 것이다. 권력의 안락함과 달콤함에 취하거나 사회 현안에 눈 감고 귀 막은 채 잠자는 언론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취임 전부터 언론을 통한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출근길 약식 기자회견인 ‘도어스테핑’을 중단했다. 미국 순방 비속어 논란으로 시작돼 문화방송(MBC) 기자에 대한 대통령 전용기 탑승 배제로 이어지며 언론과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실은 ‘악의적인 보도 행태’를 문제 삼았고 문화방송 기자는 대통령에게 “무엇을 악의적으로 했다는 거냐”고 따졌다.
국민의 신뢰를 잃으면 정권도 언론도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두 영역 간의 갈등은 국민의 신뢰는커녕 도를 넘어 새로운 사회불안요인이 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이고 서로 어떻게 변해야 할까? 불가근 불가원하며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본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서로서로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 정치와 언론은 견제와 균형이 핵심이다. ‘묻지 마 의혹 제기’에 언론의 검증 없는 ‘가짜 보도’는 멈춰야 한다. 진실을 추구해야 할 언론이 정황상 의심을 사실로 오도하면 스스로 자충수가 된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을 받아들이는 ‘확증편향’과 이들 정보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향동화’는 취재기자가 경계해야 하는 저널리즘의 출발점이다.
견제와 비판에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 정치인의 거짓말과 비리는 끝까지 추적해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하지만 공적인 질의응답 과정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거나 불만을 표출하며 말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취재원에 대해서는 겸손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한다. 정권과 언론 간의 관계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필수 덕목이다.
연말이다. 한 해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다. 정권과 언론이 서로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했으면 한다. 도어스테핑은 역대 어느 정권도 도입하지 못한 윤 대통령의 소통 성과이며 알 권리의 상징이 됐다. 대통령도 초심을 새기고 언론도 본분을 망각하지 않는 새로운 도어스테핑의 부활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