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1-2.10.25-30)
The one who sent me, whom you do not know, is true. I know him, because I am from him, and he sent me.”
말씀의 초대
악인들이 의인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 하며 자신들의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의인의 행동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지혜서의 이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대표적인 구절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유다인들이 호시탐탐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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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개구리 한 마리가 평생 홀로 우물 속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다른 개구리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서 왔소?” 다른 개구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바다에서 왔습니다. 난 그곳에서 살고 있지요.” “바다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내 우물만큼이나 큽니까?” 바다에서 온 개구리가 폭소했습니다. “아예 비교할 수 없소.” 우물 개구리는 바다 개구리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척했으나 사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 평생 만나 본 거짓말쟁이 중에서 이 개구리가 가장 대단한 거짓말쟁이구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왔는지 안다고 자신하였습니다. 나자렛 출신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고,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두고 그들이 자신하는 것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상의 논리입니다. 우물 안의 논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에게서 왔는지 제대로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천상적인 분이시고, 천상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바다에 대해서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 천상의 논리, 바다의 논리는 지상의 논리, 우물 안의 논리와 다릅니다. 자꾸 우리의 논리로 하느님을 재거나 판단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식과 응답하실 때를 정하신다고 해서, 결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논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와 섭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논리로 하느님을 가두려는 완고함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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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갓 그리스도 신자가 된 사람과 신자가 아닌 친구의 대화입니다. “그래, 자네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다지?” “그렇다네.” “그럼 그리스도에 관해 꽤 알겠군. 어디 좀 들어 보세. 그는 어디에서 태어났나?” “모르겠는 걸.” “죽을 때 나이는 몇 살이었지?” “모르겠네.” “설교는 몇 차례나 했나?” “몰라.” “아니,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다면서, 정작 그리스도에 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그러자 신자가 말했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아는 게 너무 없어 부끄럽구먼. 그렇지만 이 정도는 알고 있지. 3년 전에 난 주정뱅이였고, 빚을 지고 있었어.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되어 가고 있었지.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돌아오는 걸 무서워하고 있었던 걸세. 그러나 이젠 난 술을 끊었고, 빚도 다 갚았다네. 이제 우리 집은 화목한 가정이라네. 저녁마다 아이들은 내가 돌아오기를 목이 빠져라고 기다리게 되었거든. 이게 모두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이루어 주신 걸세. 이만큼은 나도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네!” 알기에 내가 달라지는 것, 그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의 차원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머릿속에 많이 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깊은 신뢰와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에 가치관이 바뀌고 예수님 때문에 삶이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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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러시아의 반정부 비밀 결사대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시베리아 움스크 감옥에서 수형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는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는 성경 한 권뿐이었습니다. 그는 수형 생활 동안 여러 번 성경을 탐독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습니다. 그러고 나서 무신론자였던 그의 삶과 문학 세계가 바뀝니다. 그가 1866년에 발표한 그 유명한 『죄와 벌』은 변화된 그의 문학 세계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을 깊이 깨달을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안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안다’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깊은 인격적 만남’을 말합니다. 이런 앎은 바로 성경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데서 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면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심이 부족하다고 탓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성경을 읽고 있는지 물어보면 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을 알게 되고 어느새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진정한 앎은 굳건한 믿음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굳건한 믿음은 실천적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 믿고 믿는 만큼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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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청중들의 발언은 유치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예수님의 출신지를 알고 있다고 합니다. 메시아가 아니라는 표현입니다. 출신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지요? 다 큰 어른이 너무 순진해도 문제입니다. 복음의 유다인들은 아직도 어린이의 믿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어린이의 모습’으로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만의 ‘살아 있는 믿음’을 갖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바람이 불면 흔들립니다. 아무리 오래된 신앙이라도 어른의 믿음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작은 유혹에도 헤맵니다. 작은 충동에도 쉽게 반응합니다. 그렇다고 아이의 세계를 건너뛰어 곧바로 어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과정을 철저히 거쳐야만 다음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시련과 고통을 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십자가로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신앙에서는 ‘받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러나 어른의 신앙에서는 ‘깨닫는 것’이 기쁨입니다. 몸은 어른인데 믿음은 어린이로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보고 들었지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고통’에서 기적의 모습을 찾아내야 어른의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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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명 수영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영에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지만 제대로 된 강습을 받거나 과학적인 훈련을 통하여 자신의 실력을 점검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참가하여 경기 전 자신이 평소 하던 대로 준비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선수들은 그를 은근히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영락없는 촌뜨기의 준비 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었고, 결과는 예상 밖으로 이 무명 선수가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그 뒤로 많은 선수가 이 무명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다음 경기부터는 다른 나라 선수들이 이 선수의 준비 운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선수가 이 준비 운동을 꽤 권위 있는 준비 운동으로 채택하여 실시하였습니다. 이 무명의 선수는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박해를 받았던 것은 한마디로 ‘촌뜨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떠들면서 예수님의 출생과 신분을 보아 분명 메시아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촌뜨기가 아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이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신지
-김귀웅 신부-
저는 원래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인데 제주교구로 파견되어 살고 있습니다. 제주교구는 크지 않은 섬 전체가 하나의 교구이다 보니 교회 공동체가 가족처럼 지냅니다. 본당은 모두 27개, 신부님은 40여 분 계십니다. 그래서 신부님들과 웬만한 신자들은 서로를 거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른 교구에서 갑자기 나타난 저한테 사람들은 관심이 많습니다. 지구 단위로 모일 때마다 사람들이 묻곤 합니다. “신부님이 서울에서 내려오신 그 신부님입니까?” “신부님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신부님이 서울교구 출신입니까?” 못 보던 사람이라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하도 거듭되는 질문인 데다 이방인처럼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제 출신을 묻는 질문에 저는 “하느님 나라 출신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왔고 다시 하느님 나라로 돌아갈 것입니다.” “제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자 어떤 분들은 저를 보면 “하늘나라 신부님!” 하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코 농담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다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갈 것을 희망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육체적인 고향은 제주도 · 강원도 · 서울 등 다 다른 곳이지만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서로를 하느님께 파견받은 사람으로 대우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사람으로 대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출신지는 하느님, 하늘나라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양승국신부-
누군가가 이유도 없이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내 목숨을 해치려 할 때 가까스로 피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작정해서 나를 폄하하고 나를 음해하고 나를 못살게 군 끔찍한 경험이 있는지요?
그럴 경우 통상 즉시 나타나는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 것입니까? 대체로 동태복수법에 따라 처신하든지 아니면 더 센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내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겠지요.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인 생명의 위협 상태에 놓이셨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내세우다 보니, 특히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예식 등을 예수님께서 보란 듯이 파기하다보니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노기등등하던지, 얼마나 살기가 번득이든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방보다는 위험부담이 조금은 덜한 갈릴래아 지방에서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살기등등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매일 수시로 죽음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인류 구원 사업의 완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이윽고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예수님을 향한 살의(殺意)는 더해갔고, 더 이상 드러내놓고 다니기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당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하는 세 명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명절은 오늘날 추수감사제 비슷했습니다. 그해 수확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집트를 빠져나온 히브리인들이 사막을 횡단하면서 보낸 오랜 체류 기간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일주일간 지속된 이 명절기간에 유다인들은 초막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매일 아침 봉헌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제물을 바치며 사람들은 하느님께 풍부한 비를 내려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저명한 성경학자 플라비우스 요셉푸스에 따르면 유다 사회 안에서 이 명절은 1년 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명절이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명절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축제를 지내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남몰래 예루살렘 입성을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또 난리들입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떠벌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끝도 없는 불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 도를 넘어선 적개심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을 비애와 배신감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돌려보려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서게 하려고 외치고 또 외쳐보지만 끝까지 귀를 굳게 막은 그들은 절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고,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 대단해보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그 숱한 배신과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물겨워 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당신을 핍박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희망, 더 큰 사랑을 위해 꿋꿋이 그리고 당당히 뚜벅뚜벅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정체성과 삶
-허광철 신부-
지난겨울 신학생들의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영성수련에 함께했습니다. 한 달여 오로지 말씀과 깊은 대침묵 속에서 신학생들은 ‘살아 있고 힘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히브 4,12)에 깊이 동화되어 갑니다. 말씀을 통한 하느님 체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생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그러한 체험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들의 삶은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시작부터 벌써 예수님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1절). 유다교 지도자들이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 작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당신이 누구신지 ‘큰 소리로’ 말씀하시며 가르치십니다. 과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그분 행동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이시며, 어디에서 왔고 어떤 사명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뚜렷한 정체성이 확립되신 분이었기에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말씀하고 행동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은 얼마나 당당합니까? ‘말씀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금 되짚어 볼 일입니다.
모토로 삼고 있는 성경 구절을 ‘큰 소리로’ 외워봅시다. 없다면 만들어 보십시오!
가엾은 친구이신 예수
-서춘배 신부-
소위 ‘보이스피싱’이라는 사기에 피해를 입은 본당 자매가 있습니다. 어설픈 사기행각에 속아 넘어갈 것 같지 않은 자매지요. 그런데 어디 그 자매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그런 피해자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을 당할까요. 뭔가에 사로잡혀 있을 땐 새롭게 볼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 뭔가라는 것이 욕심에 기초했을 땐, 더 헤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몰이해에 시달리십니다. 당신의 형제들까지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일 겁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엔 목수인 요셉의 아들, 예수로만 각인되어 있었습니다.(마르 6,3) 그들은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앎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고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지요?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복음의 수석 제자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지요. 정답입니다. 그런데 권위 있는 누가 말하니까 나도 그렇게 믿는 것인가요? 또 그분에 대한 앎이 하나로 고정되어서 앵무새처럼 늘 그렇게 고백하는 것인가요? 매번 새롭게 보고 달리 보지 않으면 사이비가 될 가능성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달리 볼 수 있는 힘, 이것은 회개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선 예수님을 위로해 주고 싶은 가엾은 친구로 만나고 싶습니다.
가랑이 사이로 지나갈지라도
-김찬선신부-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어제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분의 자기무화의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자기무화의 사랑을 그가 가지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욕과 고통으로 그를 시험해보면 알 수 있다고.
자기가 없는 사랑, 또는 자기를 죽이는 사랑. 이 얼마나 우리가 꿈꾸는 사랑입니까? 그런데 이 사랑에 우리가 이르지 못함은 모욕과 고통을 두려워하고 더 나아가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모욕과 고통을 두려워함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이 사랑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의 이 여정을 출발해야 하는데 많은 경우, 우리는 모욕과 고통이 두려워 출발 자체를 못합니다. 실상 자기가 죽는 이 모욕과 고통의 여정은 두렵습니다.
저는 순교에 대해서 생각할 때 어느 한 순간, 예를 들어서 사형 선고를 받고 바로 총살에 처해진다면, 다시 말해서 한 순간에 딱 끝나는 것이라면 순교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순교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기 전에 받아야 할 그 고문과 그 모욕입니다.
거꾸로 매달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집어넣으며, 불 인두로 넓적다리를 지지는 등의 고문을 받게 될 것을 생각을 하면 도저히 그것을 받아낼 용기가 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통을 받게 될 줄 알면서도 자기무화의 여정을 떠나는 것은 대단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이 여정을 떠났을 뿐 아니라 그 모든 모욕과 고통을 끝까지 견디어내는 사랑은 더 대단합니다.
제 생각에 인내는 용기보다 더 위대합니다. 한 순간 용기를 낼 수 있지만 그걸 끝까지 견디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고통과 모욕을 택할 수 있지만 인내가 없으면 그것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모욕이 그 어떤 것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의 경우지요.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그런 구차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명예롭게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욕과 수치를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자기를 죽이는 것이고, 살아서 죽는 겁니다. 과하지욕跨下之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한 나라 때 어려운 중에 병법을 익힌 한신이 동네 깡패들로부터 살고 싶으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라는 치욕을 당하지만, 그 치욕을 견디어 냄으로써 마침내 큰 장수로 성공했다는 얘기지요.
자기의 큰 꿈을 위해 이렇게 소아小我를 죽이는 것은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위해 이런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것은 더 대단합니다. 진정한 자기 무화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모욕에 모욕당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 자존감이 대단하고 사랑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이건 남에 대한 사랑이건 사랑하는 만큼 고통과 모욕을 감수하고 견딜 수 있다고. 고통과 모욕을 견디는 그 만큼 자기 무화의 사랑이라고
어제 아침에는 장례미사를 다녀왔습니다. 교구청에서 함께 근무하는 어떤 신부님의 할머니 장례미사였지요. 장례미사를 봉헌한 이 성당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쭉 다녔었고, 또한 보좌신부까지도 했던 곳이었습니다. 상당히 낯익은 곳이고, 추억이 많은 성당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런데 어제 미사를 봉헌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성당 안의 스테인 글라스가 너무나도 낯선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 위 십자가나 십자가의 길 역시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했습니다.
어렸을 때 복사를 서면서 오랫동안 다녔던 성당, 또한 사제로서도 1년을 보좌신부로 생활했던 성당. 그러나 성당 안의 많은 부분들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당시의 모습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오랫동안 다녔던 성당이었는데도 당시의 모습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관심을 갖고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야 노는 데에만 신경이 쓰여 성당의 성물을 관심 있게 볼 리가 없었겠지요. 그리고 보좌신부 때에도 성당 안의 조직과 미사 강론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성당 안의 성물이 어떠한지를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관심 있게 제대로 바라 볼 때에만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을 때에는 저처럼 오랫동안 성당을 다녔고 보좌신부를 했었어도 제대로 알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자신의 다른 경험만을 내세워 너무나도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보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관심 있게 바라보는 사람만이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성당 열심히 다닌 것만으로 또는 단체 활동을 열심히 했다는 것 등으로 주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나 묵상, 봉사와 희생 등의 노력을 가지고 주님을 열심히 바라보는 사람만이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단순히 율법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보려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알고 있습니까? 혹시 나의 편협된 생각만을 내세워 주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사순시기를 맞아 더욱 더 희생과 극기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더욱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은 바람을 타고 나른다. 너무 잠잠하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다(존 닐).
진리에 대하여
-신대원 신부-
‘진리’는 글자 그대로 ‘참된 이치’이고, ‘참됨’입니다. ‘참됨’이란 거짓이 아니고 가식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가 ‘참됨’을 따라 살았다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속한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언제나 참된 분이시고, 또 ‘참됨’속에 머무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고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진리 속에 머물지도 않고 진리를 살지도 않는 빌라도 총독이 주님께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라고 묻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마치 진리가 죽은 듯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진리가 밥 먹여 주냐?”는 식으로 살아가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진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오로지 정치와 경제논리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논리 안에도 진리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거짓이나 가식이나 사기 치는 곳을 제외하면, 어디든지 다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삶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혹시 거짓되고 허망한 길을 좇으면서도 그것이 ‘참됨(진리)’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나의 하느님
- 김상 태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가에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사건에 대한 유다인들의 분노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요한 5,1 – 18 참조)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에서 드러나게 선교를 하셨는데 이것이 청중, 곧 예루살렘 주민들을 놀라게 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몰래 잡아들일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그들의 태도를 의아하게 생각한다. 또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주장에 대해 그들 마음에는 의문이 떠오른다. 곧 메시아가 오실 때 그분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군중은 예수님의 인간적 기원은 알고 있지만 예수님의 초자연적 기원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님이 성부한테서 온 참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도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앎이 수학 공식처럼 내 머릿속 한 부분에만 머무르고 있다면, 이것은 예수님이 성부한테서 파견된 구세주이심을 마음으로 믿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 신앙심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우리 하느님’ 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따르는 주관적인 ‘나의 하느님’ 에 대한 체험이 필요하다. 우리는 각 사람의 삶 안에서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김찬선신부-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활의 주님보다 수난의 주님께 더 감동했고, 부활의 주님보다 성탄의 주님께 더 감동했습니다. 영광의 주님보다는 사랑의 주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수난과 성탄의 주님이 부활의 주님보다 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더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늘에 계시던 분이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하느님이신 분이 영광을 받으시게 된 것도 본성상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은 어쩌면 신성의 본성을 거스르는 너무도 감동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임금님이 대궐로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임금님이 누추한 내 집을 찾아오심이 특별한 것이고 사랑인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이 낮추시는 사랑 덕분에 우리는 높이 계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던 분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아버지 하느님을 아신다고 하십니다. 그 하느님 아버지가 보내서 오셨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이런 주님을 독성죄로 단죄합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하느님을 안다고 자처하는 것은 언감생심입니다.
맞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같은 인간이 초월적인 하느님을, 그것도 다 안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시오, 인간이신 우리의 주님은 다 아시지요. 완전한 사랑으로 완전히 아십니다.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시고 완전히 아시는 우리의 주님께서 하느님을 이 땅으로 모시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을 땅으로 끌어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도 하느님을 압니다.
그러나 역시 초월적인 하느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다 알 수도,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장님이 코끼리 더듬듯이 알더라도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조금 알아도 괜찮고 충분합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만 알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정도 아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이 알다가, 아니 많이 알려고 하다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갈지 모르니 말입니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을 알 수 있게 해주신 우리의 주님 감사드립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정말 열심히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도,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별 성과 없이 살고 있었던 이 젊은이는 곧 절망에 빠지고 말았지요. 그래서 자신이 존경하는 고등학교 때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제자에게 호수로 가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호수에서 노가 달린 배를 함께 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세요.
“이보게, 저 건너편이 바로 성공에 이르는 길이라네. 그렇다면 이 하나의 노만으로 저 건너편에 도달해 보도록 하게.”
젊은이는 오른쪽에 있는 노를 있는 힘을 다해 저었습니다. 하지만 배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 뿐 단 3m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제자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금 저은 그 오른쪽 노는 ‘열심히 일하라’라는 노라네. 그리고 네가 젓지 않은 또 다른 노는 ‘뚜렷한 목표를 가져라’라는 노지. 성공의 길이란 단순하게 열심히 한다고 해서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또한 무엇이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만으로도 부족하지. 성공이라는 항구에 닿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라’라는 노와 ‘뚜렷한 목표를 가져라’라는 노를 모두 균형 있게 그리고 열심히 저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네.”
뚜렷한 목표를 갖고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나아갈 때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표만으로는 또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한쪽만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그 이유가 너무나 빈약합니다. 글쎄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기 때문에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에도 자주 언급되듯이 계명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하게 열심히 살기만 했지, 정말로 중요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바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를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만이 똑바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마지막 항구에서 참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일 년을 생각한다면 씨앗을 심어라. 십 년을 생각한다면 나무를 심어라. 백 년을 생각한다면 사람을 가르쳐라.(공자)
당당함
-전삼용신부-
저는 어렸을 때 꿈이 있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슈퍼맨처럼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정말 꿈을 꾸면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꿈만 꾸었습니다. 그러나 잘 날지는 못했습니다. 항상 날다가 건물에 부딪히거나 땅에 고꾸라졌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을 즐기며 밑을 내려다보며 자유롭게 날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높이 올라갈수록 함께 증가하는 것은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면 날지도 못할 것임을 알았고 두려움을 이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는 것도 두려웠고 실패하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정말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저의 영웅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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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제자들이 찾아와 통곡하면서 "스승님, 이게 웬일입니까? 스승님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셨는데 이렇게 감옥에 갇히셔야 하다니요.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웃으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꼭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와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소크라테스의 죽음 앞에서의 이 당당함은 선한 영혼은 죽어서도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저는 믿음이란 것이 두려움을 없애주는 특효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자신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예루살렘에 겁도 없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설교도합니다. 사람들은 그 용기에 신기해합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 미움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내 집 드나들듯이 합니다. 바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합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아버지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를 넘어 막 마을로 가려다가 너무나 밝은 얼굴로 뛰어 노는 꼬마를 만났습니다.
“공동묘지 근처인데 너는 무섭지 않니?”
이렇게 묻자 꼬마는 “아뇨”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습니다.
“왜 무섭지 않지?” 다시 묻자 꼬마는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가 이 묘지 관리인이거든요.”
우리 인생의 관리인은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그 분 소관입니다.
예수님의 당당함은 바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데서 나옵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든 것이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을 알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알고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 분이 어떤 일로 자신에게 벌을 줄 지 몰라 항상 불안해합니다.
특히 아버지께 신임을 잃었기에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을 못견뎌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신임을 얻은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까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살고 싶습니까? 아버지의 뜻을 행하십시오. 하늘을 나는 자유와 당당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부러운 사람
-김찬선신부-
부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선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제가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상실하고 뻔뻔하기에 자유로운 사람들은 아닙니다. 적어도 T.V에 나와서 자선을 행하는 그런 사람들은 아닙니다.
자기 응시를 놓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약함을 늘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과도한 시선에서는 자신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하느님 응시를 놓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자기에게 준 정체성과 사명을 늘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눈길을 늘 의식합니다.
그러니 결코 나대지 않지만 필요한 경우 무엇을 감추지도 자신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적절히 그러하신 것 같습니다. 괜히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싶지 않으시지만 하느님을 드러내고 당신의 정체를 알려야 할 때가 오자 담대하게 아버지와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러 해야 할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때
-정명숙 수녀-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코헬 3,1)고 구약 성경의 코헬렛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 ‘때’를 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어느 신부님으로부터 ‘낄낄빠빠’란 이상한 말을 들으며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낄 때 낄 줄 알고, 빠져야 할 때 빠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깨어 있는 삶이 아닐는지요. 깨어 있는 사람만이 항상 준비하며 주님을 맞이할 줄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방문하시는 ‘때’를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시간이라 하지요. 바로 창조의 때입니다. 변화의 시간입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에서, 삶에서 돌아서는 때입니다. 그러기에 변화에는 버림과 상실이 따라옵니다. 지금까지 내 것이라 여긴 것을 버리고 다음 것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잃는 체험입니다. 아픔입니다. 그러나 잃고 아픈 그 자리에, 버린 그 자리에 또 다른 시작과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읽은 책에 이슬람 신비주의의 금언이 생각납니다. “잃어버린 것을 놓고 마음이 목 놓아 울 때, 영혼은 새로 얻을 것을 놓고 춤을 춘다.” 오늘 복음은 이 생명의 때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메시아가 오실 때를 기다리건만 정작 자기들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기들의 고정된 시각과 관념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독한 설교자
-김혜경-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당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외면의 수위도 점점 높아가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두 번씩이나 표징을 보여주었는데도 믿지 않는 고향 갈릴래아를 다니고 계신 장면이 첫 대목으로 나오겠습니까? 틈만 나면 주님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유다인들, 예수님께서 형제로 여기던 사람들, 예루살렘 주민들까지 거론하시며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계신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외면당하는 이의 아픔은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외로웠을지, 성전에서 큰 소리로 가르친 그분의 목소리가 얼마나 공허한 메아리로 그분 자신에게로 되돌아왔을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가 리미니에서 한 설교가 생각납니다. 이교도들이 판을 치던 리미니에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들으려 하지 않자 너무나 답답해 바닷가에서 바다를 향해 설교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한갓 미물에 지나지 않던 물고기 떼들이 몰려와 듣더라는 일화입니다. 이 장면은 지금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 제의실 입구에 벽화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물고기들은 사람들에게 보라는 듯이 큰 놈부터 순서대로 몰려와 경청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가르치며 말씀하시는 주님과 바다를 향해 설교하는 성 안토니오의 모습이 고독한 설교자로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은 귀가 있어도 들을 줄 모르고 눈이 있어도 볼 줄 모르는 우리를 향한 말씀의 회초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새벽을 열며
요즘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판공성사, 강의, 미사, 십자가의 길, 각 단체 모임, 인터넷 방송과 새벽 묵상 글, 면담 등등……. 부활이 가까워지면서 더욱 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제 수첩의 일정표에는 더 이상 무인가를 적을 공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어제도 수첩을 보면서 한숨만 나오더군요. 이것들을 언제 다 할 것인지……. 일이 있다는 것은 그리고 바쁘게 산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는 것으로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이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괜히 신경질도 납니다.
우연히 지난 달 일정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달 역시 이번 달 못지않게 바빴더군요. 아니 이번 달보다도 더 바쁜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쁜 일정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별 무리 없이 지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복잡한 문제여서 며칠 동안 고민했던 것들도 지금 뒤돌아보면 모두 잘 해결되었음을 알 수 있었지요.
분명히 저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이었는데, 또한 시간이 부족해서도 끝낼 수 없을 것 같았는데요.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돌아보니 모두가 해결되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쓸데없는 곳에 걱정을 쏟아 붓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신경 쓸 곳도 많은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곳에 신경을 씀으로 인해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000년 전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탄생 때, 동방박사의 방문으로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베들레헴’이 메시아 탄생 장소라고 헤로데에게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이미 메시아 탄생 장소가 어딘지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메시아의 탄생 장소를 알지 못해야 한다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 구세주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억지를 보입니다.
더군다나 중요한 것은 메시아의 탄생 장소가 아니라, 메시아가 전해 주는 말씀과 행적인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의 말씀과 그동안 하신 행동들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잘못된 정보에만 매달려서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모습을 취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잘못된 확신들로 인해서 쓸데없는 걱정과 헛되게 시간낭비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함으로써 그것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나는 어떤 것에 온 힘을 쏟고 있나요? 2000년 전의 유다인들 모습으로 살아가는 내가 아니길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합니다.
필요 없는 일정을 정리하여 봅시다. 중요한 것만 하기에도 이 세상은 너무나 바빠요.
빠다킹신부
예수님의 진면목
-허찬란 신부-
성당에 혼자 있으면서 사무실 일도 보고, 성당에 앉아 조배도 하다보면 적적하기도 하지만 마치 피정을 하는 것 같습니다. 깊은 묵상이 이어지면 예수님이 정말 곁에 계신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 순간 제가 사제임이 참으로 행복하기만 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3대 축제인 초막절, 유월절, 오순절 중에서 초막절을 배경으로 하는데, 초막절은 성전과 관련이 있습니다. 초막절은 성전이 지어진 날로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을 기억하는 날이며 즈카르야의 예언처럼 다시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 몇 사람은 예수님을 보며 사람들이 잡으려 하고 죽이려 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돌아다닐까 하며 의심을 합니다. 또 참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적대자들의 목표 대상인 예수님이 성전을 활보하는 것에 대해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간단히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다는 설명으로 요약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숨길 이유도 없으셨고 당신에 대한 거짓 증언들에 대해 일일이 대꾸하실 이유도 없었습니다. 당신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진면목을 몰라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출신과 소속 같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맥과 보증
-정복례 수녀-
지난해 후반기에 모 다단계 회사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다. 내막인즉 마당발을 채용해 정치권 및 연예계 유명인사를 대거 영입하여 회사 발전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회사는 왜 유명인사를 이용하려 했을까? 당연한 논리지만 그들이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인맥을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으며, 또한 그것이 통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어처구니없는 사회 풍속도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또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면 절대로 보증을 서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사시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보증이 필요 없는데, 그 이유가 오늘 복음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나는 그분을 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더 나아가서, 나는 하느님을 알며 그분은 나의 아버지라는 말씀이시다. 곧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보증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의 공생활을 유지시킨 힘의 원천은 바로 ‘나는 그분을 안다’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할 뿐이라고 하신 예수님!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구원론적 힘의 원천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여기서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나는 ‘예수님을 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나는 내 삶에 필요한 힘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학 지식으로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지만 진심으로 “나는 예수님을 잘 압니다!”라고 말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외친다. “나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사순 제4주간 금요일
- 박성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초막절 축제를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초막절이란 농사철이 끝나는 가을에 큰 기쁨으로 지키던 이스라엘의 중요한 축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랑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언약을 새롭게하는 절기로서 9월 말에서 10초 초순에 걸쳐 행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32키로미터 이내에 거주하는 모든 성인 남자는 이 축제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고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버젓이 드러내놓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루살렘 주민들은 혹시나 하는 의구심을 가집니다. 즉, 최고 의회 의원들이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분명히 지금 말씀하시는 예수님같은데 그들이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메시아에 대한 생각인데 메시아가 오실 때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자기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욱더 최고 의회 의원들의 태도가 이상하게 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성전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는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며, 당신을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그 분께서 당신을 보내셨기 때문에 오신 것이라고 명백히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만이 당신을 보내신 분을 알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는 것 자체가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갓 사람으로서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한다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상황 아래 있었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을까? 생각해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지 우리는 일상 안에 절실히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겉모습 즉, 예수님의 출신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출신에 대한 한 가지 정보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는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사고를 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갇혀 살게 됩니다. 열린 사고를 하되 정확하고 사실과 진리에 근거를 두고 정보를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통해서 잘 못된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나아가서 그 정보를 가지고 진리에 봉사할 것인지 아니면 진리를 숨기는데 이용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예수님을 잡으려고 갔지만 경비병들은 아무도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생애에 그와 같이 올바르고 정당한 말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기에 권력을 부정하게 사용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진리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결정지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여러분도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잡으러간 경비병의 처지가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앞에서 당신을 증언하면 당신께서도 성부 앞에서 증언할 것이며 부정하면 당신도 심판 때에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희생을 각오한 증거가 요구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앙은 끊임없는 선택과 포기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모든 결정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결정이기를 기도합니다.
중년의 위기
-이재욱 신부-
◆흔히 말하는 중년의 위기란 것이 있다.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심리적으로도 변화가 생긴다. 젊었을 때는 먹고 살기 위해서, 아니면 애들 키우기에 바빠서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열심히 앞만 보고 살았지만 중년이 되어 좀 먹고 살 만하니 가정에도 생각지 못한 위기가 닥친다는 사람들이 많다. 남편은 직장의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삶의 건조함에 빠지고, 아내는 아내대로 외로움을 느낀다. 남편들은 그래도 늦게까지 술자리도 갖고 주말이면 등산이다, 낚시다 다니기도 하지만 함께하지 못하는 아내는 과부 신세가 따로 없단다. ‘애들은 머리가 컸다고 제멋대로이고 아무도 날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나는 늘 희생만 하고 살았는데 이제 보니 헛 산 것 같아. 삶이 허무하고 인생이 회의스럽다.’ 그러다가 옆집 순이 엄마가 인터넷에서 어떤 남자 친구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귀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 ‘나도 그런 인터넷 친구나 한번 사귀어 볼까?’ 하는 유혹도 생긴단다. 혹은 앞집 철수 엄마가 볼륨댄스(Ballroom Dance)가 몸에 좋다고 하면 ‘나도 댄스나 한번 배워볼까?’ 하는 마음도 생긴단다. 사실 모든 인간의 발달 단계마다 위기란 것이 찾아온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대로, 사춘기는 사춘기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각각의 성장과정의 위기가 있다. 그러나 위기는 또 다른 성장을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인생이 퇴락할 수도 있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성장 발판이 되기도 한다. 중년의 위기란 것은 뒤집어 말하면 중년의 기회이기도 하다. 낭떠러지로 떨어질지, 아니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기회가 될지 그것은 나의 가치관과 선택에 따른 것이다. 위기가 찾아온다면 기도 중에 예수님께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복음에서 사람들의 불신앙과 박해의 위기에 봉착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라는 구약의 말씀을 재천명하신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곧 하느님의 영이 사람 안에 깃들어 있고 사람의 영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신다는 말씀이 아닌가?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참 하느님이 누구시라는 것, 참 인간이 누구라는 것 그리고 하느님과의 인간의 관계가 어떤 것이고 참 인간들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신다.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사는 사람들은 이미 하느님을 향한 끝없는 성장으로 초대되고 있다. 말씀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맞는 인생의 위기는 오히려 하느님을 향해 가는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한 여정이 될 것이다.
‘하느님 아들’의 자신감...
-정호신부-
예비자들을 가르치다 보면 하느님을 믿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이 풀리지 않는다면 사실 신앙인이라고 불리는 우리들에게도 이 신앙의 이유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 속에서 열심히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 신앙의 모델인 예수님의 증언을 통해서 말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계신다는 급박한 상황으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돌을 집어 들고 예수님을 치려고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보다 그런 일들을 하면서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라 말하며 당신의 모든 일을 하느님 아버지의 일이라 이야기하고 있음을 문제 삼습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긴 했지만,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하느님은 ‘무서운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했고 그분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너무 자신 있는 행동들은 분명 하느님께 불경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당신의 입장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드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고 말할 정도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모습이라는 것과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삶. 그것이 예수님의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씀 속에 들어있는 자신감의 참된 이유였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우리가 구원되는 그래서 하느님과 눈을 마주하고도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을 얻는 길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살아있는 말과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자신 있게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을 많이 닮아 있어야만 합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당당히 맞서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지킬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허깨비 같은 몸만 왔다갔다
-양승국신부-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또 다시 판공성사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고백소 앞에 줄지어선 수많은 형제자매님들의 얼굴에서 다시 한 번 따뜻한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갈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많은 신자 분들의 내적인 방황도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안타깝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제대로 된 하느님을 체험을 한번 해보고 싶지만, 그게 정말 여의치 않습니다. 마음은 하느님에 대한 굶주림으로, 하느님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갈증을 채울 길 없어 아쉬워하십니다.
세례를 받은 지 5년, 10년, 20년, 30년 세월은 흘러가는데, 이제 남들이 볼 때 연륜이 지긋한 성숙한 신앙인으로, 봉사 전문가로, 단체장으로 교회 안에서 활약은 대단한데, 뭔가 허전합니다. 아쉽습니다.
미사 시간이 다가오면 발길은 자동적으로 성당을 향하는데, 별 의미가 없습니다. 미사에 대한 은혜도 없습니다. 별 감흥도 없습니다. 그저 의무감에서, 안 나가면 죄라고 하니, 남들이 우르르 가니 나도 따라갑니다만, 마음은 다른데 가있고, 그저 허깨비 같은 몸만 왔다 갔다 합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의 무미건조함, 더 나아가서 신앙의 위기가 다가오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봅니다.
보다 근원적인 곳에, 보다 근본적인 곳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정체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신앙생활은 대체로 순식간에 위기를 체험하더군요.
하느님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그분을 만나야, 그분과의 내밀한 인격적 만남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과의 절절한 사랑에 빠져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 그분과의 신앙여정, 정녕 고단하기만 할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선교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다고 자주 야단맞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단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 하느님, 그래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확신을 갖고 그분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세례 받은 지 30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하느님 체험이 아직 부족하다면, 그분과의 1대1의 만남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다시 한 번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 안에 거듭 날 필요가 있습니다.
지속적인 하느님과의 만남, 그분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는 형제들의 얼굴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거듭되는 시련 속에서도 자신만만합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담담합니다. 참된 영적 예배, 제대로 된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그들의 순수한 봉사활동은 빛을 발합니다. 하느님과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제대로 알아야 ‘진한 사랑’이 오갈 수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야 아낌없이 자신을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체험해야 그분께 투신할 수 있습니다.
남아있는 사순절 동안 어렵겠지만 깊은 내적침묵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깊이 몰입해보시기 바랍니다. 성체 앞에 오래 머물러보시기 바랍니다. 침묵하고 계시는 성령께서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활동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진리에 따라 사는 길
-전광진 신부-
유다인들은 언젠가 구세주께서 오셔서 자기들을 구원해줄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오시는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구세주께서 오셔서 세상의 모든 속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자렛 출신인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사람이 구세주라고 하니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유다인들에게는 하늘과도 같은 율법을 넘어서는 행동을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하지만 예수님은 의연하게 당신의 갈 길을 가십니다. 이스라엘의 심장부인 예루살렘에서도 반대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당시 예루살렘에는 온갖 세상적인 것들이 뒤얽혀 있었습니다. 로마 지배세력에 빌붙어서 동족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맞서서 인간구원의 진리를 세우려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측은하게 보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불의한 사람들에 맞서서 의연하게 진리의 길을 가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우리도 진리에 따라 살 것을 결심해야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느 계절인가?
-김영수 신부-
언젠가 한 농부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농부는 딸한테 두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하나는 산수 점수는 50점 이상 받아오지 말 것, 다른 하나는 제철에 나는 과일을 먹을 것. 딸이 셈이 밝아서 지나치게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 되지 않고, 제때 제철을 알며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합니다. 농부는 때를 압니다. 봄엔 씨앗을 뿌리고 여름엔 땀을 흘리고 가을엔 거두어들이고 겨울엔 다음 농사를 준비하지요. 씨앗을 뿌리자마자 열매를 거두어들이지 않습니다. 때를 기다리고 준비합니다. 우리 삶에도 계절이 있습니다. 막연한 희망에 기대어 씨앗을 뿌려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잎을 다 떨어뜨리고 온몸으로 추위를 견뎌내는 겨울나무처럼, 혹독하고 모진 상황을 참고 견뎌야 하는 시기도 있습니다. 겨울에 억지로 꽃을 피운들 금방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지요. 지금 우리의 삶은 어느 계절인가요? 입대하자마자 빨리 제대시켜 달라고 청원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는 했습니다. 30개월 만에 남들처럼 병장으로 제대했지요.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나의 때’에 그 간청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의 때’가 아니라 ‘당신의 때’에 일을 하십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양승국신부-
<거슬러 올라가는 사순절>
벌써 우리는 사순절의 한 가운데 서 있습니다. 이 은총의 시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이지요.
사순절은 지내시면서 다들 그 어려운 ‘회개’라는 화두 하나씩 들고 고생들이 많으시겠지요. 이런 생각하시는 분들 많으실 것입니다.
“제대로 회개 한번 해보고 싶은데 왜 이렇게 잘 안되지?”
“생각으로야 수천 번도 더 회개하고 싶지, 몸이 안 따라주는데 어떡해?”
회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회개’란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무척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성경에 사용된 ‘회개’란 용어의 원래 의미는 히브리어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입니다. ‘악한 생각과 행동에 대항하다’입니다. ‘자신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목표를 설정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회개란 것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군요. 단순한 반성의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가슴 몇 번 치는 일이 아닙니다. 성당에 앉아 눈물 몇 방울 흘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꽤 복합적인 여정입니다. 제대로 된 회개를 위해서는 성경적 의미대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야’합니다.
위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누가 계십니까? 그분은 바로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아드님 예수님에게 하신 것처럼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 세상에 파견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온전히 결속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항상 머물러계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제대로 된 회개를 위해서는 이렇게 다른 무엇에 앞서 ‘나’란 존재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 필요합니다.
나는 원래 무(無)였습니다.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진흙으로 나를 빚으신 하느님께서 내게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분 덕에 아무것도 아닌 내가 그분의 품성과 영혼을 지니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서 났고, 그분이 보내셔서 나는 이 세상에 왔으며,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이렇게 두 발로 서있습니다.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분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쁜 마음으로 우리 삶의 기초이자, 우리 인생의 시초인 그분께로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본 모습입니다.
<독서강론> : 하느님을 바라며 참고 기다리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유대인들 가운데는 팔레스티나에 살지 못하고 이방 지역에서 이민족들과 함께 사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갔거나 전쟁을 피해 팔레스티나 지역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열심한 유대인들은 이민족 틈에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하느님을 섬기며 율법을 충실히 지켰다. 이처럼 하느님을 충실히 섬긴 의인들은 그로 인하여 주변 이민족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조롱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더욱 힘들었던 것은 동족들로부터 받는 핍박이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 하느님께 불충실한 유대인들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민족의 신을 섬기던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충실하라는 의인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의인들로 인해 자신들이 더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하여 의인들을 핍박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하고 의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으며, 악인들은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오늘의 독서는 하느님께 불충실한 악인들의 생각이 그릇되었음을 지적하고, 하느님께 충실한 의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으리라고 격려하는 말씀이다.
이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하느님께 충실하고 열심히 사는 의인들은 때로는 바보이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조롱을 받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의인들은 주변의 악인들로 인하여 피해를 당하며, 그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악인들로 인하여 피해를 당하고 죽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악인들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의로우신 하느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며 하느님의 정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기도 한다.
우리가 좁은 안목에서 바라보면, 세상은 불공평하다. 하느님은 공의롭지 못하신 분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심지어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이요 주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아무런 죄도 흠도 없으셨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의인이셨지만, 박해를 받으셨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니 정말 불공평한 세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넓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의인들이 고통을 당하고 악인들이 사치스럽게 사는 것이 불공평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의인들이 악인들의 죄를 대신 기워 갚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 끝날에 그에 대한 보상을 하느님께서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 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밀밭에 자라난 가라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주인은 좋은 씨를 밭에 뿌렸지만 밀이 이삭을 팰 때 가라지도 함께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버릴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 수 있으니 그냥 두라고 했다. 추수 때에 가라지는 묶어 불 속에 던지고 밀은 곳간에 쌓도록 하겠다는 것이다.(마태 13,24 이하)
분명 가라지는 자라면서 밀에게 많은 해를 끼쳤다. 밀이 흡수해야 할 물과 영양 분, 햇빛을 가로챘다. 밀은 가라지로 인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므로 가라지 임이 드러났을 때 바로 뽑아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주인은 추수 때까지 기 다린다는 것이다. 자칫 밀까지 뽑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의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 때는 세상의 끝나는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서 묶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끝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은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태 13,39-43) 우리는 이 세상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우리 눈앞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보상이나 대가가 현실적으로 주어지기를 원한다. 이는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하느님 나라를 믿지 못하고, 현세에 얽매여 있으면서 조급하게 보상과 대가가 현세에서 주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언젠가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임을 굳게 믿기에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다. 믿음이란 곧 기다림이다. 희망이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세상이다. 영원에 비추어 볼 때 인생 80년이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찰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찰나에 얽매여서 보상이나 대가를 기대하지 말자.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서 얻을 보상과 대가를 기다리는 믿음 깊은 사람이 되자. 예수님께서도 죄와 흠 없이 죽임을 당하셨지만 부활의 영광을 받았음을 기억하자.
그러면 비록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내가 당하는 불이익과 고통은 찰나에 불과한 것이고, 이를 통해 예수님처럼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기보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세상의 이익과 즐거움을 구하기보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복락을 구하며, 현세의 십자가가 영원한 부활을 보증하는 표임을 굳게 믿고, 참고 기다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그분을 안다는 것
-오상선신부-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 28-29)
<묵상>
오늘 따라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태어나서 거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부하며 배우고 가르치기를 계속해 왔지만 도대체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욱더 확실해 지고 그 폭이 더 넓어지기 때문이지요. 옛적에는 여러가지로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안다고 이야기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오늘 따라 주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고 하시면서 그렇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시니 더욱더 고민됩니다.
그분을 점점 더 잘 안다고 이야기해야 할 텐데 아니 점점 더 모르겠다고 이야기해야 할 판이니까요. 그분에 대해 탐구하면 할수록 더욱더 모르겠습니다. 그 깊은 신비에 도달하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시는 듯이 여겨집니다.
혹 내가 그분을 안다는 것은 지식이나 정보로서만 아는 것에 머물러 있지 참으로 그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사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만큼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그분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아무리 찾는다 하더라도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의외로 가까운데서 계시는데 우리는 헛군데서 그분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 모르겠습니다.
정말 오히려 그분은 너무도 가까이에 계시기에 못 알아뵙는 것은 아닐까요? 신학서적이나 주해서를 통해서 신비적인 관상이나 기이한 수덕적 실천을 통해서만 그분을 만나려고 하기에 그분을 더더욱 알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요?
오늘은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을 쬐끔은 알겠습니다. 고만큼만 사람들 앞에서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의 묵상 나눔은 바로 이렇게 우리 각자가 발견한 그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길이 아닐까요?
비록 보잘것없는 나눔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발견한 그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증언해야만이 주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당신아버지께 우리를 안다고 하시겠다니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아는 하느님을 겸손되이 증언하세요.
이 오늘의 묵상이 바로 그런 자리라고 여긴다면 자신있게 아무리 작은 깨달음도 나눌 수 있으리라 믿어요.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거창한 강론보다는 이런 소박한 나눔을 더 즐겨하시리라 믿어요. 거창한 명강론보다는 다양한 사람들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그 하느님을 여기서 만날 수 있잖아요?
오늘도 바쁜 일과 가운데 하루 쉬고 넘어갈까 생각하다가도 당신에 대한 앎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또 이렇게 글을 남기게 만드네요.
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내가 아는 하느님을 형제자매들에게 봉헌합니다. 아멘.
그 때를 묵묵히 기다리시는 예수님 -김태환 신부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주간에 우리는 요한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생명으로서 우리 생명의 원천이심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생명이요, 빛이신 예수님을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하였으나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시어 영광스럽게 하셨다.
오늘 복음 끝부분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전해 줍니다. 예수님의 때, 예수님의 시간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달리 표현한 말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예수님께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분명 그분께는 십자가의 치욕적인 죽음의 때가 있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성취될 때까지의 인내로운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바로 이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이 기다림의 바람직한 자세는 외적, 내적인 침묵을 통한 고요한 상태라고 합니다.
자, 그럼 조용히 묵상하겠습니다. 평소 본당에서 강론할 때는 이러고 앉으면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어서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면 됩니다. 헌데 오늘 전 왠 유리벽 속에서 혼자 놀고 있습니다. 침묵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해도 참 불쌍한 때입니다.
이 불쌍한 때를 맞이하기 전에 전 쫌 멀리 있는 수녀원을 방문했었습니다. 이박 삼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면서 저한테 주어진 요 나흘간의 숙제- 오늘의 강론- 도 풀 겸해서 떠났습니다. 갈 땐 좋았습니다. 뭔가 될 것 같고 가는 길에 보이는 경치도 멋있었습니다. 멀리 높은 산 그늘에는 아직 눈이 보이는데 차안은 더워서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는 묘한 상황을 즐기며 도착했습니다. 행복 끝 불행 시작이었습니다.
거기서 머문 이틀 동안 죽다가 살아 났습니다. 외가쪽의 친지분이 계셔서 이전엔 시간 날 때 자주 들렀었는데 그동안 발길이 뜸하면서 저도 그곳 상황을 까먹었습니다. 후회 억수로 했습니다. 간곳은 봉쇄 수녀원입니다. 그래서 봉쇄 구역 안과 밖은 차단되어 있고 안엔 수녀님들 밖에는 저 그리고 관리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뭔 말이냐면 혼자 놀아야 됩니다. 지금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거기다 건물을 계곡 한 복판에 지어 놓아서 모든 전파가 비켜 갑니다. 휴대폰 라디오 몽땅 꽝입니다. 기도시간이 돼서 성당에 갔습니다. 시편을 진짜 거룩하게 노래합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글자 한자 한자를 읽을 때 마다 쉼표가 하나씩 있는 것처럼 느리게 음미하십니다. 가뜩이나 지루했는데 성당서 기도하고 나니 시간이 멈춘 듯 모든게 느려집니다. 시계도 덩달아 느리게 갑니다. 제 머리도 느리게 굴러 갑니다. 숙제 해야 하는데 포기 했습니다. 그리고 이리 저리 돌아댕겼습니다.
거긴 아직 추워서 개미도 없습니다.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를 딱따구리 한 마리만 제 친구입니다. 제가 이곳을 출입한지 십년도 넘습니다. 헌데 삥둘러도 변한게 없습니다. 희안하게 안변했습니다. 헌데 제가 변했습니다. 별 기다림 없이 때가 되고 지나고 또 뭔가 닥치고 치루고 하면서 을씨년스러움을 버텨내는 기다림을 까먹었습니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개나리 다 폈습니다. 목련은 봉우리를 터뜨릴까 말까 갈등중입니다. 꼴랑 이틀 기다림을 느림을 경험하고 본 개나리 목령은 작년에 본거 하고 다릅니다. 뭐가 분명히 다른데 표현이 안됩니다.
지금 바쁘신분, 시끄러운 한 복판에 계신 분. 또 일이 막 닥쳐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이어가시는 모든 분들에게 고요한 시간, 어쩌면 억수로 지겨운 기다림의 시간에로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고 눈을 부라리는 그 사람들 사이를 쓱 훒으십니다. 그리고 나선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는 그 때를 예수님은 묵묵히 기다리십니다. 오늘 동네라도 한바퀴 휘 도시면서 우리들에게 닥치는 시간말고 간절히 기다리는 때를 조용히 기다리는 연습을 해 봅시다....................◆
-조윤제 신부-
어떤 사람이 길에서 아주 큰 소리로 웃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사람에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고 물으니까.. '저기 돌이 보입니까? 저 돌에 벌써 10명이나 걸려 넘어졌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또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던 사람이 '남이 잘못되는 게 그렇게 좋으냐고, 이 사람 아주 몹쓸 사람'이라고 말을 하니까 그 사람이 말을 합니다. '아니,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이 우스운 것이 아니고, 자신이 넘어지고 난 뒤에 뒷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치워놓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너무 우스워서 웃는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걸림돌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자신들이 어설프게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모를 터인데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 사실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다"는 그 말씀을 다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나에게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데에 어떤 걸림돌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게으름, 세상에 대한 걱정, 부족한 믿음.. 이런 것들이 정말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런 걸림돌은 나를 위해서도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치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 그 길에 걸림돌이 있다면 걷어내야 나도 내 이웃도 함께 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요한7,25-30)
-유광수 신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그래서 희랍 사람들은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의 하얀 대리석 벽에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금언을 아로새기고 생활의 좌우명으로 여기고 행동의 지표로 삼았다.
자아의 발견, 자아의 확립처럼 중요하면서 어려운 일은 없다. "전 세계를 알면서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프랑스의 문필가 라 퐁떼느는 말하였다. 역사도 알고 법률도 조예가 깊고 문자에도 일가견이 있고 시사에도 밝으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이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내 자신의 처지를 알고 형편을 알고 실력을 알고 사명을 알고 분수를 아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알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노자는 "남을 아는 것은 智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明이다"라고 말했다. 명은 지보다 높고 어려운 경지다.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기가 어려운가? 이기심으로 눈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자애심으로 자기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남의 일에 총명하면 재판관이 되기는 쉽지만 자기 자신의 일에 슬기로운 판단자가 되기는 어렵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 세 가지의 이미지를 생각할 수 있다. 즉 세 개의 자아상을 그릴 수 있다.
첫째는 내가 보는 나의 이미지요, 둘째는 남이 보는 나의 이미지요, 세째는 나 본연의 나의 이미지이다. 이 세 개의 자아상 중에서 가장 옳은 것은 세 째번 뿐이다.
우리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관념을 가지고 어떤 분석과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빗나가는 수가 많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하여 교만과 허영심의 노예가 되기 쉽고 어떤 이는 자기자신을 너무 과소 평가하여 비굴해지기 쉽다. 과대평가도 잘못이지만 과소평가도 틀린 것이다. 우리는 정당한 자기 평가를 해야 한다. 남이 보는 나의 이미지는 첫째 것보다는 비교적 공정하고 객관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도 왕왕 오판하는 수가 허다하다.
우리는 가끔 "그 사람이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생각했던 그 사람의 이미지와 그 사람의 현실의 행동이 어긋날 때에 참으로 뜻밖이다 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나 본래의 나의 이미지, 나의 본연적 자아상, 이것만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바로 알고 자아를 옳게 확립해야 한다.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는 나다. 나 아닌 너를 우리는 타아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냐? 나는 정신작용의 통일체다. 우리는 의식하고 감정하고 의욕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정신작용을 통일하는 최고의 주체를 우리는 자아라고 일컫는다.
생각하는 나, 느끼는 나, 욕구하는 나, 행동하는 나, 여러 개의 나가 있다. 그 여러 개의 나를 통일하는 주재자가 곧 자아다. 만일 이러한 주재자나 주체가 없을 대 정신병 환자의 경우처럼 자아의 분열이 생긴다. 분열된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다. 자아는 정신 작용의 통일이다. 이 통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종적 통일이요, 또 하나는 횡적 통일이다. 종적 통일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작년의 나와 금년의 나 사이에 의식의 통일이 있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 약속을 할 수가 없고, 과거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어제 내가 한 일을 전혀 모른다고 하고, 작년의 나의 행동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질 수 없다고 하면 그것은 건전한 자아가 아니다. 자아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자기동일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자아의 종적 통일이다.
자아는 동시에 횡적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감정하는 것과 의욕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일관된 횡적 통일, 내용적 통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智, 情, 意 상호간에 내용적 통일이 없으면 자아라고 할 수는 없다. 말하는 나와 행동하는 내가 완전히 다를 때 나는 이중 인격, 이중 자아로 전락한다. 이중인격 이중자아는 는 분열된 병적 자아다. 내가 한 말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말하는 나와 행동하는 나 사이에 자기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은 심리학이나 철학에서는 자아관이라고 일컫는다. 인간의 자아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부정적 자아관이요, 또 하나는 긍정적 자아관이다. 부정적 자아관은 자기가 자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나를 마이너스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나는 지방 출신이다. 나는 일류학교를 못 나왔다. 나는 머리도 신통치 못하고 재주도 빈약하다. 집안도 볼 것이 없다. 나는 인생의 패배자요 무능력자다. 나같은 거야 사회의 버림받은 존재다. 나는 무슨 일을 하여도 성공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부정적 자아관은 자기를 과소 평가하고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어두운 심정이 된다.
인생에서 자신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그는 생의 의욕을 잃고 전진의 기력을 상실한다. 그는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될 일도 안 된다고 믿는다.
"해가 비치면 먼지도 빛난다."고 괴에테는 말했다. 먼지는 더러운 것이지만 밝은 햇빛을 받으면 빛을 발한다. 희망을 가질 때 우리의 얼굴은 밝아지고 눈에는 광채가 생기고 걸음걸이는 활기를 띠고 태도는 씩씩해진다. "내일 세계에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어떤 사상가는 말했다.
희망을 갖는 자는 설사 내일 이 지상에 파멸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는 낙심하지 않고 사과나무를 심는다. 그러나 절망하는 자는 슬퍼하고 저주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다.
희망과 절망은 그만큼 다른 것이다. 부정적 자아관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불쌍한 것이 없다. 우리의 가슴 속에 희망의 등불이 있고 우리의 정신에 자신이 있고 우리의 몸에 용기가 있으면 우리는 어려운 역경도 돌파하고 커다란 고난도 극복하고 무서운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 희망은 언제나 우리에게 속삭인다. 힘있게 전진하라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 어디에서 왔고 무슨 사명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뚜렷한 자아관이 성립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살아가셨고 언제 어디에서나 당당하게 말씀하셨고 행동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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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