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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에 숨겨진 신앙 이야기
‘일요일’이 맨 앞에 오는 이유… ‘주간 첫날’ 주님 부활 경축
교회력은 성주간과 성인들의 축일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인들을 공경하며 그리스도 신비가 주는 효력을 기념하는 달력이다.
날짜별로 일정 등을 기록할 수 있도록 제작된 수첩을 흔히 ‘다이어리’라 부른다. 해마다 연말이면 서점에 각양각색의 다이어리가 늘어선다. 많은 이들이 새해를 향한 설렘을 안고 사는 다이어리. 이 다이어리 곳곳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듬뿍 담겨 있다. 다이어리에 담겨있는 우리 신앙을 알고 사용한다면 다이어리를 쓸 때마다 신앙도 더할 수 있지 않을까. 함께 다이어리 속 숨은 ‘신앙’을 찾아보자.
빨간 날은 몇 개?
다이어리를 들고 2022년 계획을 세운다면 반드시 고려해야하는 것은 아마도 ‘빨간 날’일 것이다. 내년엔 빨간 날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뜬다. 궁금한 이들을 위해 살짝 말하자면 2022년 일요일·국경일 등 전체 공휴일은 67일로, 올해보다 2일 늘어났다.
적어도 달력에서는 빨간 글씨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빨간 날’이라는 표현은 세계 많은 나라가 사용하는 표현이다. 영어권 나라에서는 ‘레드 레터 데이’(Red-letter day)라 부르고,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의 유럽 국가들과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빨간 날’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달력에 휴일을 빨간 글씨로 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쇄기기의 잉크 특성 때문에, 눈에 잘 들어와서 등 여러 이유들을 들곤 한다. 하지만 달력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중세 이전부터 ‘빨간 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회 전례서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교회는 전통적으로 빨간 글씨로 중요한 부분을 표시해왔다.
그래서 달력에서는 교회가 중요하게 여긴 날, 바로 주님 부활 대축일이나 성인의 축일 같은 축일이 ‘빨간 날’이었다. 신자들은 이 ‘빨간 날’에 하느님과 성인을 기억하며 축제를 지내곤 했다. 그렇게 기념일이자 기쁜 날인 이 ‘빨간 날’은 사람들 안에서 오늘날의 공휴일처럼 자리잡아갔다. 유럽을 비롯한 가톨릭국가나 미국 등에서는 지금도 교회의 축일이 국가 공휴일로 남아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월화수목금토일? ‘주’월화수목금토!
한 주의 시작은 무슨 요일일까. 정답은 일요일, 더 바르게는 ‘주일’이다. ‘주일이 마지막 날 아닌가’라고 생각했다면 구약의 안식일과 주일을 혼동했을 수도 있다. 한 처음에 하느님이 엿새에 걸쳐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음을 기념하는 날은 안식일, 즉 토요일이다. 유다인들을 지금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주일에 쉴까. 그리스도가 ‘주간 첫날’ 부활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주간 첫째 날이었던 일요일은 여덟째 날로 새로 났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는 사도전승에 따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 그 기원을 둔 파스카 신비를 여덟째 날마다 경축한다”며 “그날은 당연히 주님의 날 또는 주일이라 불린다”(「전례헌장」 106항)고 가르친다. 첫째 날이 창조의 시작을 의미한다면, 여덟째 날은 우리가 살아가는 ‘7일’이라는 현재 밖에 있는 미래의 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일의 전례 거행에 참례하면서 천상 전례를 미리 맛본다.(「전례헌장」 8항)
초대교회 때부터 신자들은 주일만큼은 고행과 극기를 모두 중지하고 미사에 참례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구원의 기쁨이 가득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주님 부활 대축일만이 아니라 우리가 매주 기념하는 주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중요한 날이다. 최근 생활주기상의 편의 때문인지 다이어리에서 한 주의 시작을 ‘월요일’로 표시하는 일이 잦지만, 그래도 ‘월화수목금토일’이 아니라 ‘일월화수목금토’, 아니 ‘‘주’월화수목금토’다.
2022년, 그리고 교회력
내년은 2022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고, 지구반대편을 가도 그렇다.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고도 할 수 있지만, 불과 수십·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나라마다 해가 달랐다. 우리나라만해도 50여 년 전의 기준을 따르면 2022년이 아니라 단기(檀紀)로 4355년을 맞았을 것이다.
내년을 2022년으로 셈하는 기준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탄생’이다. 서력기원, 즉 서기(西紀)에는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세상이 새롭게 시작됐다는 믿음이 담겨있다. 그래서 기원전을 ‘그리스도 이전’이라는 영어의 약자 B.C.(Before Christ)로, 기원후를 라틴어로 A.D.(Anno Domini), 즉 ‘주님의 해’라 표기한다.
‘서기’는 6세기 요한 1세 교황이 디오니시오 엑시구스라는 수도자에게 만들게 한 달력에서 유래한다. 서기는 교회의 전파와 함께 널리 보급됐다. 11세기경 이미 여러 가톨릭국가들이 자기 나라의 해를 서기로 사용했고, 14세기에는 스페인이, 16세기에는 그리스 문화권에서도 대중적으로 서기를 사용했다.
물론 이후 학자들의 연구로 그리스도 탄생 시점이 서기 원년보다 6~7년 더 앞섰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서기에는 여전히 ‘그리스도 탄생’을 우리 시간의 기점으로 삼는다는 믿음이 담겨있다.
우리 신앙선조들은 서기에 담긴 믿음을 일찍부터 알고 소중히 여겨왔다. 신앙을 받아들인 초기 신앙선조들은 서기를 ‘천주강생 후’라 표현하며 사용했고, 일주일과 주일의 개념 등 새로운 시간 개념을 받아들였다. 우리나라는 1962년부터 공식적으로 서기를 사용했지만 그보다 200여 년 앞서 신앙선조들은 서기를 ‘주님의 해’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신앙선조들이 받아들인 것은 단순히 서기가 아니라 ‘교회력’이었다. 전례력, 성력(聖曆)이라고도 하는 교회력은 성주간과 성인들의 축일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구원과 성인들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신비가 주는 효력을 기념하는 달력이다. 크게 대림시기를 시작으로 성탄·사순·부활·연중시기로 구분되는 교회력은 우리 시간을 신앙의 시간에 맞춰주는 중요한 달력이다.
아쉽게도 일반 시중에 판매되는 다이어리만으로는 교회력을 기억하기 어렵다. 부활이나 축일 등을 셈하는 방식이 달라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상의 날짜가 해마다 달라지기 때문이다. 교계출판사들은 신자들의 신앙에 도움이 되도록 교회력이 담긴 다이어리를 제작·판매하고 있다. 교계출판사들이 제작한 다이어리는 전례시기와 축일 등이 표시돼있을 뿐 아니라 기도문과 성경 말씀, 성경 통독 계획표 등도 담겨있어 일상 속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문화사에 따른 전례] 성찬 신학(8-11세기)
교회가 게르만화되면서,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참된 실재인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원형이 세상의 사물 속에, 모형 속에 숨겨진 채로 현존한다는 ‘실재 상징’ 개념보다는, 물적이며 손에 잡히는 분명한 것만이 참된 실재라고 생각하는 게르만족 사고가 중심이 되었다.
이에 따라 가시적인 전례 안에 비가시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실재와 상징의 일체성이 붕괴되었고, 실재와 상징이 대립한다고 보는 관점이 형성되었다.
실재론 옹호자들은 역사적인 예수님의 몸과 성체를 동일시하는 극단적인 사실주의로 흘러가면서 성체성사의 상징성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반대로 상징론 옹호자들은 성체 안에는 그리스도의 상징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 현존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경향을 보였다.
상징주의가 설명하는 성체
그리스도 현존을 지나치게 상징적이고 우의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신앙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아말라리우스(775?-850?년)는 성찬 전례 때 ‘주님의 기도’와 ‘하느님의 어린양’ 사이에 사제가 성체를 세 조각으로 나누는 행동을 상징주의적으로 설명했는데, 이것이 논쟁을 일으켰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 세 조각은, 곧 죽음을 맛보고 죽게 된 몸이다.
첫 번째는 거룩하고 흠 없으며 천상으로 올림을 받은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몸이다.
두 번째는 땅 위를 걷는 몸이다.
세 번째는 무덤에 누운 몸이다.
성작에 넣어진 조각은 이미 죽은 이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고,
사제나 신자에게 영해지는 조각은 땅 위를 걸으셨던 몸이며,
제대에 남겨 놓은 조각은 무덤에 누워 있는 몸이다”(『라틴 교부 총서』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105, 1154-5). 여기서 제대에 남겨 놓은 조각은 미사의 연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리옹의 부제였던 플로루스는 아말라리우스의 이러한 설명을 축자적으로 해석하여 비난했다. 마침내 838년 9월 퀴에르시 공의회에서 기소를 당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은 아말라리우스의 ‘성체의 세 부분’(Corpus triforme)에 대한 설명은 단죄되었다.
코르비 수도원에서의 성찬례 논쟁
1차 성찬례 논쟁은 한 수도원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 코르비의 베네딕도 수도원장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785/90?-859/60?년)는 그의 책 「주님의 몸과 피에 관해서」에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역사적 예수의 육체와 성체를 동일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성찬례를 통하여 날마다 반복된다고 주장했다.
곧 예수의 역사적 존재 방식과 성사적 존재 방식의 구별을 부정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영성체를 모실 때 주님의 살을 씹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 주장에 반대하여 같은 수도원의 수사 라트람누스(?-868년)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내세웠다.
‘빵과 포도주는 성변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상징(figura)이 될 뿐이다. 그의 몸과 피는 신적인 능력과 함께 상징의 베일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실제로(in veritate) 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상징과 신비와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영한다고 하겠다.’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 몸의 실제적 현존을 부정하려는 의도라기보다 역사적 그리스도의 몸과 성체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는 데에 초점이 있었다.
두 번째 성찬례 논쟁
투르의 참사위원이었던 베렌가리우스(?-1088년)는 아우구스티노와 라트람누스에 의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례에 실제로 현존한다는 것을 부정했다. 왜냐하면 세상 종말 이전에는 현양된 그리스도의 몸이 천상에서 불려 내려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찬례 안에서 빵과 포도주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음을 철학적으로 증명하고자 실체(substantia)와 우유(偶有, accidentia)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실체란 한 사물의 정신적인 본질이나 실재를 뜻하고, 우유는 겉모양을 뜻한다. 이들 개념을 동원하여 베렌가리우스는 성찬례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뒤에도 그것들의 겉모양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라는 사실이 실체가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성찬의 양식은 천상에 계신 현양된 그리스도를 정신적으로 연결해 주는 수단, 초자연적 힘을 얻게 해 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베렌가리우스의 신앙고백문 서명
베렌가리우스의 견해는 1047년과 1054년 사이, 네 차례에 걸쳐 단죄되었다. 그는 1059년과 1079년 로마 시노드에서 신앙고백문에 서명해야만 했다. 1079년의 신앙고백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 베렌가리우스는 제단에 높여진 빵과 포도주가, 거룩한 기도와 우리 구세주의 말씀의 신비를 통해서, 진정하고 본래적이며 생명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적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축성된 빵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시고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되시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고,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진정한 그분의 피다. 이것은 상징(signum)과 표상의 힘(virtus sacramenti)으로만 변화된 것이 아니라, 본성의 고유함과 실체의 진리 안에서 그리된 것이다.”
이 신앙고백문은 ‘상징’과 ‘표상의 힘’이라는 한편과, ‘본성의 고유함’과 ‘실체의 진리’라는 다른 편을 대립항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초기 교회의 실재 상징적 사고가 사라졌음을 보여 준다. 그렇지만 “실체적으로 변화된다.”는 새로운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극단적인 사실주의가 극복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곧 실체는 감각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 통찰력으로 인지될 수 있는 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인 것이다. 그렇다면 ‘실체적 변화’란 본질적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정신적, 영적 차원의 변화이다.
교부들이 ‘원형-모형’의 구분으로 표현했던 ‘상징-실재’라는 긴장과 차이는 중세에 들어서자 ‘실체-외형’, 또는 ‘실체-우유’로 구분되어 표현된다. 이로써 성체성사를 상징과 실재 두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 과정을 통하여 실체 변화설이 서서히 확립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전례 탐구 생활 (68) 기다림의 색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늦게까지 기다렸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적어도 한 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연인이라면 기다리는 시간마저 달콤했을 것이고, 비즈니스 상대라면 초조함이 앞섰을 것입니다.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의 처리 과정이었다면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았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이렇게 기다림은 만남의 종류에 따라, 또 기다리는 사람이나 대상에 따라 사뭇 다른 느낌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일은 어떨까요? 대림 시기는 처음에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성탄)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출발했습니다. 주님의 성탄과 그분께서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은 파스카 축제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기념인 만큼, 이 중요한 시기를 준비하는 또 다른 기간이 생겨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다가 중세 초기 갈리아 지역(대략 오늘날의 프랑스 지방)에서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종말)을 기다리며, 대림 시기를 마지막 심판에 대비한 속죄 기간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대영광송, 사은 찬미가 등 축제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예식 요소를 삭제하고, 제의도 사순 시기와 마찬가지로 자색 제의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2세기에는 이러한 속죄의 성격과 종말론적 기다림의 요소들이 로마 전례에도 스며들었고, 그때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대림 시기는 오랫동안 ‘또 하나의 사순 시기’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부활하신 주님 현존의 기쁨을 나타내는 환호인 알렐루야는 그대로 유지하여, 사순 시기의 참회 고행과는 그 성격이 다름을 은연중에 알려 주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개정된 로마 전례에서 대림 시기는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두 가지 성격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들에게 처음 오셨음을 기념하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념을 통하여 시간이 끝날 때 두 번째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때이다”(「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 39항).
그러면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대림 시기 동안 예수님의 오심을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전례 색깔은 여전히 사순 시기와 같은 자색이지만, 사순 시기와는 조금 다른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순 시기의 자색이 우리에게 흥청망청 살아온 시간을 뒤로 하고 이제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딱 필요한 만큼의 소박하고 검소한 옷차림을 할 것을 요구한다면, 대림 시기의 자색은 소중한 사람을 만나러 갈 때 한껏 멋을 내지만 신경 썼다는 티를 내면 촌스러우니까 맨 마지막에 걸친 장식 하나만 덜어내라고 충고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순 시기의 자색을 보면 고개 숙인 ‘절제’가, 대림 시기의 자색을 보면 두근대는 ‘설렘’이 떠오릅니다. 그 때문인지 독자적인 전례를 거행하는 이탈리아 밀라노 교구에서는 대림 시기 전례색으로 희망을 나타내는 녹색을 사용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어떤 모양으로 다시 오실지 알 수 없지만, 첫 번째 오셨을 때 꼭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그분의 약속 하나를 믿고 교회는 오늘도 그분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다른 모든 기다림도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신뢰로 말미암아 기록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빛과 소금] ‘감사의 전례’인 미사의 의미 –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여러분은 ‘선교’ 혹은 ‘전교’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선교는 특별한 사명을 지닌 사제나 선교사들이 하는 것이고 나와는 아주 무관하다고 여기시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선교는 영성체를 통하여 주님과 깊은 일치를 이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강복 다음에 사제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Ite, missa est)라는 말로 신자들을 파견할 때 바로 세상 속에서 복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간명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특히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아주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교황님은 늘 복음의 기쁨에서 샘솟는 선교 열정을 간직한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그리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제자’와 ‘선교사’가 아니라 언제나 ‘선교하는 제자’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첫 제자들을 바라봅시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하고는 곧바로 달려가서 그분을 기쁘게 선포하였습니다. …… 어느 상황에서든 우리는 저마다 예수님을 전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분명하게 증언하라고 부름 받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부족함에도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당신의 말씀과 힘을 주시며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 여러분이 깨달은 것, 여러분이 살아가도록 돕고 희망을 준 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복음의 기쁨』, 120-121항).
제자 공동체의 생활을 가득 채운 복음의 기쁨은 곧 선교의 기쁨이었습니다. 선교하는 제자 공동체의 놀라운 체험은 우리의 부족함이 변명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이 그 안에서 더 크게 드러나리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사제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부름 받은 고유한 사명, 곧 복음의 기쁨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실상 우리가 하느님의 이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반쪽짜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의 미사를 마치고 나올 때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파견’ 받은 존재로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수행해야 할 몫이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복음의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세상 속에서 꽃피울 수 있겠습니까?
미사에서 말씀과 성체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이 초대에 응하는 것은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삶 속에서 녹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미사에서 주어지는 은총을 우리 안에 가두어둘 수 없습니다. 이 은총은 넘쳐흐르는 기쁨이며, 감사의 마음으로 이웃과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는 충만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전례 탐구 생활 (67) 축복과 축성
지난주에 설명했던 ‘강복’과 ‘축복’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복(베네딕시오)을 우리말 어법에 맞춰 둘로 나눈 것이라면, 오늘 말씀드릴 ‘축복’과 ‘축성’은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전례 행위입니다.
‘축성’은 성사나 준성사의 일종으로 사람이나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거룩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축성과 축복으로 사람이나 물건이 세속의 일반적인 상태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도구가 되거나 하느님의 보호에 맡겨지는 새로운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복을 베풀어주시기를 기원하는, 또는 그렇게 받는 복인 ‘축복’과는 달리, ‘축성’은 하느님께 흠숭을 드릴 목적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완전히 봉헌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것을 ‘축성한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은 성찬례에서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감사 기도)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에서 다른 모든 성사의 힘이 파생되듯이,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 축성에서 다른 모든 축성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나옵니다. 그 밖에도 사제나 주교, 부제 서품 때, 축성 성유를 거룩하게 할 때, 종신 서원, 동정녀 봉헌, 성당과 제대 봉헌 때 축성합니다.
축복과 축성을 구별하는 가장 간단한 표지는 축성 성유의 사용입니다. 축성 성유가 발라진 사람이나 사물은 하느님께 바치는 영구적인 봉헌의 표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 예식 때 사제는 물로 세례를 베푼 뒤 새 신자의 이마에 축성 성유를 바릅니다. 견진성사 때 주교는 견진자의 머리에 오른손으로 안수하면서 그 엄지손가락으로는 이마에 축성 성유를 발라줍니다. 서품 예식 때 주교는 거룩한 직무 수행을 위해 바쳐진 수품자의 손에 축성 성유를 바릅니다. 성당과 제대 봉헌 예식 때는 성당 벽과 제대 상판에 축성 성유를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다만, 임시 성당이나 이동식 제대는 축성하지 않고 축복합니다.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종신 서원이나 동정녀 봉헌 예식도 축성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축성 성유를 바르지는 않습니다. 서원한 수도자나 동정녀는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자유로이 표명하는 서원으로 축성 생활을 시작하게 되나, 퇴회 또는 제명조치 되는 경우 서원과 선서에서 생긴 모든 권리와 의무도 자동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므로 축성 성유를 사용하는 세례, 견진, 서품 예식과 달리 들은 자신을 봉헌했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아주셨지만, 자의든 타의든 그 어떤 영구적인 봉헌의 표지를 예식 안에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때는 새로운 생활로 다시 하느님과 합당한 관계를 맺는 데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습니다.
이렇게 축성이 의미하는 바를 축성 성유가 잘 나타내 주기 때문에 축성 성유 자체도 축성합니다. 성주간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때 일 년 동안 교회 예식 때 쓸 세 개의 기름을 거룩하게 하는데, 예비 신자 성유와 병자 성유는 축복하고 축성 성유만 축성합니다.
축성의 주요 도구가 축성 성유라면 축복의 주요 도구는 성수입니다. 이 둘의 물질적인 차이만 보아도 의미의 무게가 가늠이 됩니다. 무색무취의 물로 된 성수는 뿌린 다음 금방 마르는 반면, (올리브) 기름과 (발삼) 향료로 이루어진 성유는 스며들어 오래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깁니다. 그래서 축복은 여러 번 되풀이할 수 있지만, 축성으로 들여 높여진 사람이나 사물의 새로운 상태는 영구적인 것이어서 축성은 원칙적으로 되풀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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