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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affect의 시계, 정서emotion의 눈물
- 송명화의 <5분 전 12시>에 나타난 정동과 정서의 분기점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로그인
- 정(情)의 문학에서 정동(affect)의 문학으로
한국 문학, 특히 수필과 서정 장르는 오랫동안 ‘정(情)의 문학’으로 이해되어 왔다. 여기서 정이란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감정, 즉 슬픔, 기쁨, 연민, 분노와 같은 정서(emotion)를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김현은 이를 “한국 문학이 공유하는 집단적 정서의 미학”이라 불렀고, 이어령 또한 『문학과 인간』에서 “우리 문학은 사물보다 마음을 먼저 말해 왔다”고 평한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서는 문학의 윤리적 설득력과 공감의 통로로 작동해 왔다.
그러나 21세기 이후, 특히 생태위기, 기후, 재난, 기술 문명과 같은 비인칭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이 문학의 주요 대상이 되면서, 정서 중심의 문학은 한계에 봉착한다. 정서는 언제나 ‘누군가의 마음’에 귀속되지만, 오늘날의 위기는 특정 개인의 감정으로 환원되지 않는 층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현대문학은 점차 정동(affect)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는 정동을 “의식 이전의 감응, 명명되기 이전의 강도”라고 정의하며, 정서를 정동이 사회적, 언어적으로 포획된 결과로 본다. 들뢰즈 또한 『의미의 논리』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정동을 “주체의 소유가 아닌, 사건의 힘”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정동은 느끼는 ‘나’ 이전에 이미 세계와 신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진동이다.
2025년 토지문학제 수필 대상 수상작가 송명화의 수필 <5분 전 12시>는 이러한 전환의 지점에 서 있는 텍스트다. 이 작품은 환경 위기에 대한 분명한 윤리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지만, 독자에게 ‘슬퍼하라’거나 ‘각성하라’고 직접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저어새의 몸에 달린 환경시계, 녹아내리는 달리의 시계, 에어컨 실외기의 열풍, 포장재가 쌓이는 찻집의 풍경 같은 장면들을 통해 독자의 신체 감각을 서서히 압박한다. 본고는 이 텍스트를 통해 정동과 정서의 차이, 그리고 정동이 현대문학 특히 본격수필에서 갖는 미학적, 윤리적 중요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클릭
- 정동의 개념과 현대문학적 전회
정동은 흔히 감정과 혼동되지만, 엄밀히 말해 둘은 다른 차원에 속한다. 정서가 “나는 슬프다”라는 언표로 환원될 수 있는 상태라면, 정동은 아직 슬픔이라고 부르기 이전의 떨림이다. 마수미의 말을 빌리면, “정서는 개인의 것이지만, 정동은 환경과 신체 사이를 흐르는 비인칭적 에너지”다. 들뢰즈는 정동을 사건과 연결한다. 사건은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어떤 강도가 발생했는가’의 문제다. 이 관점에서 문학은 감정을 설명하는 장르가 아니라, 독자에게 사건을 발생시키는 장치가 된다. 롤랑 바르트가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말한 “텍스트가 독자의 몸을 찌르는 순간” 역시 정동의 차원에 해당한다.
현대 문학에서 정동이 중요해진 이유는 분명하다. 기후변화, 팬데믹, 핵 위기, 인공지능과 같은 문제들은 특정 주체의 감정적 서사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이때 문학은 감동을 주는 대신 불편함을 생성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대신 신체적 반응을 유발한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연민은 쉽게 소비되지만, 불편함은 사고를 멈추지 않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동의 문학은 바로 이 불편함의 지속성을 목표로 한다.
들뢰즈에게서 아장스망은 사물, 신체, 담론, 제도, 기술, 감각이 일시적으로 엮이며 어떤 작용을 발생시키는 배치를 뜻한다. 중요한 점은 아장스망이 의미나 상징으로 작동하기 이전에, 힘과 강도의 흐름으로 세계를 조직한다는 데 있다. 이때 징후(signe)는 해석을 요구하는 기호가 아니라, 아장스망 안에서 정동을 촉발하는 감응의 신호다. 정동은 바로 이 징후가 신체에 도달할 때 발생한다. 즉, 정동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이해하는 순간이 아니라, 아직 뜻으로 환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체가 먼저 반응하는 사건이다.
들뢰즈가 말한 징후는 의미를 전달하는 표지가 아니라, 아장스망의 변화가 감각적으로 감지되는 흔적이며, 그 흔적이 신체에 남길 때 정동이 생성된다. 요컨대 아장스망은 배치이고, 징후는 그 배치가 흔들릴 때 나타나는 신호이며, 정동은 그 신호가 신체에 생기는 강도다. 문학에서 이 셋의 관계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고, 독자의 감각과 인식을 이동시키는 데서 완성된다.
1. 정동적 장치 분석
이 수필은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로 시작한다. 이는 독자의 정서를 환기하는 장치다. 왕자의 눈물, 제비의 희생, 천국에서의 구원은 연민과 감동이라는 익숙한 정서 구조를 제공한다. 그러나 곧이어 등장하는 임옥상의 철재 저어새는 이 정서적 틀을 해체한다. “동그란 눈이 튀어나올 듯하고, 전선이 뭉쳐있는 뱃속, 포근한 깃털 하나 없는 몸통은 보석으로 치장한 행복한 왕자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이 문장은 슬픔을 설명하지 않는다.
명동 롯데백화점 앞, 저어새가 높은 기둥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몇 개의 쇠막대와 철판으로 만들어진 설치미술품이었다. 갈급한 대주제의 상징물이지만 입성은 초라하였다. 동그란 눈이 튀어나올 듯하고, 전선이 뭉쳐있는 뱃속, 포근한 깃털 하나 없는 몸통은 보석으로 치장한 행복한 왕자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번잡한 곳이라 천연기념물이 있을 자리는 아니다 싶어 의아해한다. 소비의 최고봉을 지향하는 거대 백화점 앞에서 최소한의 장식도 거부한 채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는 저어새는 지금 시위 중인가. 양산을 지져먹을 듯 덤비는 햇살을 피해 고개를 든다. 저어새의 가슴에 달린 동그란 부착물에 햇살 한 줄기가 쨍하고 빛난다.
환경시계라 했다. 지구의 멸망을 상징하는 시각, 12시에 점점 가까워져가고 있는 시계 앞에 서서 시계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어떤 느낌일까. 뉴스에서 ‘환경시계’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그것이 나의 화두였고, 서울에 가면 반드시 찾아가 보리라 결심한 터였다. 12시가 되면 저어새의 심장이 터지고 세상의 호흡 또한 멈출 것인가. 실천이 따르지 못하던 걱정과 불만이, 방관과 편리의 추구에 익숙했던 내 습성이 부끄러워 시계바늘을 올려다보는 눈이 시리다. 2023년 인류의 환경시각은 오후 9시 31분, 우리나라의 환경시각은 오후 9시 28분, 둘 다 ‘매우 위험’ 수준이다.
- <5분 전 12시> 중에서
대신 금속의 차가움, 노출된 전선, 햇빛에 달구어지는 몸체를 감각적으로 배열한다. 독자는 저어새를 ‘불쌍하다’고 느끼기 이전에, 불편하고 낯선 물체 앞에 서게 된다. 이는 정서가 아니라 정동의 작동 방식이다. 특히 저어새의 가슴에 달린 환경시계는 이 텍스트의 핵심 정동 장치다. “12시가 되면 저어새의 심장이 터지고 세상의 호흡 또한 멈출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포의 감정이 아니라, ‘시간이 압축되는 감각’이다. 시계는 설명이 아니라 압박으로 기능한다. 독자는 숫자를 이해하기보다, 남아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리듬을 몸으로 느낀다. 하이데거가 말한 ‘불안(Angst)’이 특정 대상이 없는 상태적 정동인 것처럼, 이 시계는 막연하지만 지속적인 긴장을 생성한다.
2. 정동과 정서의 차이
기존 수필쓰기에서 ‘감정’은 주로 다음과 같이 지도되어왔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라. 체험 당시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복원하라. 독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감정을 설명하라. 이는 모두 정서(emotion)의 차원이다. 정서는 명명 가능하고, 언어화가 가능하며, 주체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정동은 다르다. 정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주체 이전적이다. ‘내가 느낀 감정’이 아니라, 상황이 만들어낸 강도를 말한다. 비언어적이다. 설명보다 배열, 서술보다 배치에서 발생한다. 윤리적이다. 교훈 없이도 태도의 변화를 유도한다. 수필 창작에서 정동을 활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느꼈는가가 아니라 어떤 장면을 어떻게 배치했는가를 묻는 일이다.
찻집은 딴 세상이었다. 소매 긴 옷을 가방에서 꺼내 걸치고는 움츠리고 앉아서 창밖을 보았다. 에어컨실외기가 열풍으로 바깥세상을 찐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건물 턱 좁은 그늘에 몸을 쭉 펴고 늘어져 눕는다. 나는 춥고, 너는 나 때문에 더 덥구나. 헐떡이는 공간 중에 그나마 쉴 그늘을 찾아서 다행이었다. 옆 자리의 여자 둘이 쇼핑한 물건을 풀어보고 있었다. 가득한 포장재가 테이블을 채우더니 다시 그들의 쇼핑백으로 들어갔다. 환경시계를 본 탓인가. 그녀들이 고른 멋진 소품들보다 값을 지불한 수북한 쓰레기에 더 눈길이 갔다. 저 쓰레기들은 어떤 회로를 거쳐 어떻게 그녀들에게 다시 돌아갈 것인가.
‘하느님이 천사에게 도시에서 가장 귀한 두 가지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천사는 주저 없이 행복한 왕자의 쪼개진 심장과 죽은 제비를 가져다 바쳤다. 둘은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환경시계가 12시를 알린다면, 무릇 온 생명과 그들을 안아 키운 지구는 어찌 되는 것일까. 그때서야 하느님은 멈춰버린 저어새의 심장을 수리해 주실까.
- <5분 전 12시> 중에서
정서가 전면에 드러나는 대목은 후반부 찻집 장면이다. “나는 춥고, 너는 나 때문에 더 덥구나.” 이 문장은 분명한 정서적 인식, 즉 죄책감과 연민을 담고 있다. 화자는 자신의 행위와 고양이의 고통을 명확히 연결하며 감정을 언어화한다. 이는 독자에게도 공감의 통로를 제공한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텍스트는 다시 정동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에어컨실외기가 열풍으로 바깥세상을 찐다.” 여기에는 화자의 감정 서술이 없다. ‘찐다’는 동사는 물리적 폭력을 연상시키며, 독자의 피부 감각을 자극한다. 이때 독자는 ‘불쾌하다’고 느끼기 전에 이미 신체적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정동과 정서의 결정적 차이다.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면, “정서는 말해질 수 있지만, 정동은 흔적만을 남긴다.” 이 수필에서 환경 위기는 눈물보다 흔적으로 남는다. 포장재 더미, 실외기의 열기, 녹아내리는 시계 이미지가 그것이다.
3. 정동적 구성과 기법
송명화는 교훈 대신 장치를 설계하는 서두로 발단부를 시작한다. 이 수필은 환경 보호라는 분명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서두에서 곧바로 문제의식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호출한다. “왕자는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비참한 삶이 가슴 아파 눈물을 흘린다.” 이는 독자의 정서적 기억을 먼저 작동시킨다. 교육적으로 말하면, 이는 ‘공감의 문’을 여는 전략이다. 그러나 곧이어 등장하는 철재 저어새는 이 공감을 배반한다. “포근한 깃털 하나 없는 몸통… 전선이 뭉쳐있는 뱃속” 여기서 중요한 창작 기법은 대조다. 정서적 서사는 물질적 이미지로 급전환하면서 독자의 감정 흐름을 중단시킨다. 이 순간 독자는 슬퍼하기보다 낯설어지고 불편해진다. 정동이 발생한다.
환경시계라 했다. 지구의 멸망을 상징하는 시각, 12시에 점점 가까워져가고 있는 시계 앞에 서서 시계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어떤 느낌일까. 뉴스에서 ‘환경시계’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그것이 나의 화두였고, 서울에 가면 반드시 찾아가 보리라 결심한 터였다. 12시가 되면 저어새의 심장이 터지고 세상의 호흡 또한 멈출 것인가. 실천이 따르지 못하던 걱정과 불만이, 방관과 편리의 추구에 익숙했던 내 습성이 부끄러워 시계바늘을 올려다보는 눈이 시리다. 2023년 인류의 환경시각은 오후 9시 31분, 우리나라의 환경시각은 오후 9시 28분, 둘 다 ‘매우 위험’ 수준이다.
두어 시간 남짓 남은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145분의 여유가 있다고 마음 놓을 일일까. 우리나라 환경 연구가들에 따르면 한국의 환경 시각은 12시 5분 전이라고 한다. 멸망을 앞두고 있지만 우리들의 경각심은 제로에 가깝다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수돗물 발암물질 파동이 있었고, 녹조와 가뭄과 홍수에다 폐플라스틱과 폐비닐 대란을 겪었다. 거기다가 온실효과로 인한 기후변화에 미세먼지와 오존이라니…. 모두들 놀라고 분노하고 걱정하였다. 정수기를 사고, 공기정화기를 들이고, 인터넷으로 특수마스크를 대량 구입하였다. 탄소저감과 친환경에너지를 운운하였다. 그리고 또 잠잠해졌다.
- <5분 전 12시> 중에서
수필의 발단부는 감정을 유도하기보다, 감정의 기대를 어긋나게 할 수 있어야 좋다. ‘설명하지 않는 위기’의 서술 방식이다. 환경 위기를 다룬 많은 글은 수치와 경고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 수필은 설명보다 사물과 배치를 선택한다. “저어새의 가슴에 달린 동그란 부착물에 햇살 한 줄기가 쨍하고 빛난다. 환경시계라 했다.” 시계는 말하지 않지만 압박한다. 시간은 해설이 아니라 체감의 문제로 전환된다. 들뢰즈의 말처럼, 사건은 의미가 아니라 강도의 변화다. 이 작품에서 환경 위기는 ‘슬픈 현실’이 아니라 ‘시간이 줄어드는 감각’으로 제시된다. 주제를 말하지 말고, 주제가 작동하는 장치를 만들어 감동을 견인한다.
‘하느님이 천사에게 도시에서 가장 귀한 두 가지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천사는 주저 없이 행복한 왕자의 쪼개진 심장과 죽은 제비를 가져다 바쳤다. 둘은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환경시계가 12시를 알린다면, 무릇 온 생명과 그들을 안아 키운 지구는 어찌 되는 것일까. 그때서야 하느님은 멈춰버린 저어새의 심장을 수리해 주실까.
- <5분 전 12시> 중에서
정서에서 정동으로 이동하는 결구 전략도 돋보인다. “찻집은 딴 세상이었다. 소매 긴 옷을 가방에서 꺼내 걸치고는 움츠리고 앉아서 창밖을 보았다. 에어컨실외기가 열풍으로 바깥세상을 찐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건물 턱 좁은 그늘에 몸을 쭉 펴고 늘어져 눕는다.” 이 찻집 장면은 교육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나는 춥고, 너는 나 때문에 더 덥구나.” 이 문장은 명백한 정서 표현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 “에어컨실외기가 열풍으로 바깥세상을 찐다.” 감정 인식 다음에 물리적 이미지를 덧붙인다. 정서에서 정동으로 다시 이동하는 구조다. 결구에서도 교훈은 제시되지 않는다. “그때서야 하느님은 멈춰버린 저어새의 심장을 수리해 주실까.” 질문으로 끝나는 이 문장은 독자의 사유를 닫지 않는다. 정답 없는 불편함이 남는다. 좋은 수필의 결말은 감정의 해소가 아니라, 상태의 지속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4. 현대수필에서 정동의 윤리적 의미
정동 중심의 문학은 흔히 ‘차갑다’거나 ‘비인간적’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새로운 윤리의 가능성을 연다. 레비나스가 말한 윤리가 타자의 얼굴에서 시작된다면, 정동의 문학은 ‘얼굴 이전의 신호’에서 윤리를 시작한다. 환경 문제를 다루는 이 수필이 교훈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는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저어새의 심장을 멈춰 세워 독자의 일상을 흔든다. 이는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말한 “관객을 울리는 대신 생각하게 하는 연극”과도 닮아 있다.
알베르 카뮈는 “진정한 예술은 해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지속시킨다”고 말했다. 이 말은 예술이 도덕적 처방이나 문제 해결의 매뉴얼이 될 때 오히려 생명력을 잃는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해답은 사유를 멈추게 하지만, 질문은 인간을 각성 상태에 머물게 한다. 특히 환경 위기처럼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문제 앞에서 단일한 해답은 쉽게 소비되고 잊히지만, 질문은 신체와 일상의 층위에 남아 반복적으로 되살아난다. 카뮈가 말한 예술의 윤리는 바로 이 지속성, 즉 쉽게 봉합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 있다.
저어새가 인간 세상을 내려다본다. 값나가는 치장 하나 없이 세상을 돕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햇빛을 더 세차게 튕기는가. 저 빛살이 신음하는 지구에 약침이 되려나. 지구 온난화로 사라질 위험에 처한 남태평양의 낙원 같은 나라, 투발루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폭염으로 사람들이 떨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가 숨을 헐떡인다. 살바도르 달리의 시계들처럼 환경시계가 녹아서 늘어지고 있다. 저어새의 심장을 본다. “세계적 멸종위기종인 내 모습을 봐.” “내 가슴의 환경시계를 봐.” 달리가 지금 코로나가 장악한 세상을 본다면 환경시계에 마스크를 씌우려고 하지 않을까.
- <5분 전 12시> 중에서
<5분 전 12시>는 환경 보호를 위한 실천 목록이나 윤리적 교훈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저어새의 가슴에 달린 환경시계, 녹아내리는 시간의 이미지, 에어컨 실외기의 열풍과 같은 감각적 장면들을 통해 독자의 몸에 질문을 새긴다. 독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즉각적으로 알지 못한 채,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물음을 안고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이 질문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고, 더운 바람을 맞을 때, 과도한 포장재를 마주할 때, 에어컨의 온도를 낮추는 순간마다 신체적 불편감으로 재소환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동의 윤리가 성립한다. 정동은 감정처럼 해소되지 않으며, 결론처럼 닫히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의 몸과 환경 사이에 미세한 긴장을 남겨 두고, 삶의 선택 앞에서 반복적으로 작동한다. <5분 전 12시>가 수행하는 윤리는 독자를 선한 주체로 호명하는 윤리가 아니라, 불편한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윤리다. 질문을 멈추지 않게 하는 힘, 바로 그 지속되는 진동이 이 수필이 도달한 예술적, 윤리적 성취라 할 수 있다.
Ⅲ. 로그아웃
- 눈물 이후의 문학, 심장 이전의 시계
<5분 전 12시>는 정서의 문학에서 정동의 문학으로 이동하는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 수필은 슬픔을 말하지만 슬픔에 머물지 않고, 분노를 암시하지만 분노를 조직하지 않는다. 대신 시계의 초침처럼 독자의 감각을 조금씩 조여 온다. 행복한 왕자의 눈물이 정서의 서사였다면, 저어새의 환경시계는 정동의 장치다. 눈물은 닦을 수 있지만, 시간의 압박은 지울 수 없다. 이 수필이 남기는 것은 감동이 아니라 잔여 진동이다.
마지막으로 발터 벤야민의 말을 떠올릴 수 있다. “위기의 순간에 과거는 섬광처럼 현재를 비춘다.” 이 작품에서 와일드의 동화는 섬광으로 호출되고, 저어새는 현재의 심장으로 서 있다. 정동의 문학은 바로 이 섬광과 심장 사이에서 작동한다. 환경시계가 12시를 가리키기 전에, 문학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간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울림은 눈물이 아니라, 멈추지 않는 떨림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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