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이세종이 자연묵상을 통해서 형이상학적 세계에 눈이 열린 것인가? 엄두섭은 이세종이 공기를 먹었다는 것을 동양의 도가 철학, 인도의 선인들의 삶을 가져다 설명하였다. 이세종에게 공기는 단순한 도인들이 호흡하는 기(氣)가 아니다. 도인들은 대기 속에 충만한 기를 호흡법을 통해서 흡수했다. 그들은 호흡법을 통해서 공기 속에 있는 에너지를 섭취하며 살았다. 그래서 인도의 선인들은 음식을 먹지 않고도 공기 에너지를 마시며 여러 날들을 견디어 왔다. 그러나 이세종이 그들의 호흡법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이세종은 “예수를 먹어야 산다. 예수가 나는 힘이다”라는 말을 자주하였다. 그러면 그에게 예수를 먹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흙의 먼지로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그래서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야)이 되었다(창2:7)
그렇다면, 우리는 역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생령 곧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생기로 호흡하는 것이다. 사람이 생령을 잃어버리면, 들짐승과 같은 존재가 된다. 이세종이 공기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기로 호흡하는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육의 본능을 비우고, 대지의 근원인 하나님의 생기를 먹고자 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셨다. 그때 마귀가 찾아와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했다.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면서 마귀를 물리쳤다. 이세종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예수를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곧 예수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며, 하나님의 생기로 호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공기를 먹는 것은 영의 양식을 먹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공기를 먹는다고 심호흡을 하고 먹는 소리까지 냈다고 한다.22) 이세종이 공기를 먹는 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다.”(갈2:20)
이세종이 죽음을 얼마 앞두고는 공기를 마실 때마다 즐거움을 표현했다. 그것은 썩어질 육신을 땅에 두고, 영으로 그분과 하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공기를 들어 마실 때,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예배를 드리게 했다. 예배는 무엇인가? 예배는 육이 죽고, 영이 사는 것이다. 곧 예배는 영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기를 먹을 때, 예배의 자리를 사모했던 것이다. 예배 안에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공기와 온전히 하나 될 수 있었다. 그러면 이런 이세종은 초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