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하나의 행복코드 2023.08.26
몇 년 전 이 칼럼을 통하여 ‘행복코드는 어디 있을까’에 관하여 평소 생각의 일부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의 주제가 다분히 개인적인 행복코드에 관한 것이라면 이번 글은 최근에 접한 사회 전체적인 행복의 정도를 높이기 위한 방안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로부터 한 국가의 국민 생활 수준을 측정하는 데에는 전통적인 국내총생산(GDP) 개념보다 국내총행복(GDH: Domestic Gross Happiness) 개념지표가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나와 이목을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일수거사(一水去士)란 말이 있습니다. 평생을 청렴·강직한 법관 생활로 후배들의 신망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진 조무제(趙武濟) 전 대법관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서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업보다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을 택하면서 스스로를 우스갯소리로 일수거사(一水去士, 한물간 사람)라 자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은퇴 후의 자신은 이미 별 소용이 없는[無用] 존재임을 겸사로 말한 것으로 이해되나, 다른 한편으로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이라는 동양철학의 진수를 몸소 실천하는 노 법관의 지혜로 보이기도 합니다. 전국적으로 많은 일수거사회 모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로 필자가 속한 일수거사회는 퇴직 관료, 전직 교수 등 이른바 스스로가 한물간(?) 사람으로 인식하는 이들로 구성된 모임으로서 수시 대면 모임 또는 줌(Zoom)을 통한 화상회의를 통해 정보교환 또는 사회의 관심사가 되는 이슈, 특히 전원생활, 환경문제, 로컬의 미래 등에 대하여 토론하고 학습하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대전에 살고 있는 한 일수거사의 초청으로 대전, 대구, 서울 지역의 일수거사들이 함께 대전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름하여 일수거사회, 즉 ‘한물간 남자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특히 대전의 일수거사는 부여군 임천면이란 곳에 전원 세컨하우스 격인 농장을 가지고 있고 이름도 ‘냅둬유농장’(Let it be Farm: LIBF)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즉, 가급적 인위적인 간섭을 하지 않고 자연상태에서 경작되게 하는 농사법을 추구하는 철학을 강조하는, 가히 혁신적인 농법이라 할 만합니다. 이 역시 별 소용없는 듯한 방법을 통하여 큰 소용을 기대하는 것입니다[無用之大用]. 나아가 사회 전체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지혜를 얻는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노자는 무용(無用)의 진리를 설파했습니다. 모든 사물의 이치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조화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예컨대, 그릇의 경우를 보면 원형의 곡면체 모양의 그릇 가운데 공간이 생깁니다.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이야말로 그릇의 쓸모 있음을 결정하는 핵심이 됩니다. 건축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생각하면 대들보, 서까래, 벽체로 마감질을 하고 나면 방이라는 텅 빈 공간이 생깁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무용입니다. 없는 가운데 있는 용도 즉, 쓸모 있음이지요.
장자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 장자(莊子) 인간세편(人間世篇)에서 무용지용(無用之用) 이론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에 대하여는 잘 알지만, 쓸모없음의 쓸모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人皆知有用之用 莫知無用之用也]. 즉, 특정한 목적으로는 무용하지만 다른 용도로는 크게 뛰어나게 소용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목도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성철 스님의 경우도 쓸모없음이 크게 도를 이루는 근원이 되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왕자 싯다르타는 출가하기 전 부인 야수다라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의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습니다. 라훌라는 장애물, 쓸모없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훗날 이 아들은 출가해서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으며 밀행 제일의 보살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성철 스님은 그의 속가 딸이 출가 후 찾아와서 법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딸에게 준 글귀가 약지하필 시지불필(若知何必 是知不必)이라고 합니다. 즉 ‘하필의 뜻을 안다면 바로 불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라는 의미인데 이때부터 그 따님은 법명을 불필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불필 스님 이야기입니다. 스님은 이를 ‘필요가 없을 때 도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평생을 정진해왔다고 합니다. 공자도 일찍이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즉 나의 소용됨에 대하여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군자일 수 있다. 즉, 스스로를 불필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득도의 경지에 다다른다는 뜻일 것입니다.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의 작가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북유럽 스웨덴 출신 헬레나 호지(Helena Norberg Hodge)의 눈에는 그녀가 1970대 초 서북부 인도의 오지 ‘라다크’를 방문할 당시 현지인들의 생활상이 카오스, 중구난방, 뒤죽박죽, 즉 쓸모없는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6년을 그들 속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그녀의 조국 스웨덴 등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진행되고 있고, 자신도 직접 체험한 세계화/현대화의 기준으로 볼 때만 그럴 뿐, 자연에 순응·교류하면서 살아가는 현지인들의 생활습관이 훨씬 더 환경친화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이고 지혜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약 50여 년 전 헬레나가 발견한 라다크 현지 주민의 놀라운 전통, 환경친화적인 생활의 지혜가 현대의 정신건강의학에서 말하는 소위 포지티브 멘털 헬스(Positive Mental Health)와도 관련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헬레나는 그 후 40여 년 동안 10여 개국에서 지역의 특수성과 다양성의 중요성을 전파하는 로컬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하여 왔으며 2012년 그 공로로 고이(Goi, 五井) 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한 저명한 저널은 헬레나를 ‘가장 놀라운 환경 운동가 10인’에 선정했고, 환경운동가로 유명한 칼 맥대니엘은 그의 저서 <살 만한 지구를 위한 지혜>에서 그녀를 ‘세상을 바꾸는 선견자 8인’에 올렸습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헬레나는 뉴 라다크의 실현, 로컬경제의 실천만이 세계화/환경파괴의 재앙으로부터 사회 전체의 행복을 담보하며 최근의 저서 <행복의 경제학(Economics of Happiness>’을 통해 ‘지구를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일수거사의 모임이 모임 구성원의 특성상 지난 삶에 대한 성찰과 은퇴 후의 생활 방향에 대한 담론뿐만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 ‘지역적 특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로컬주의’ 등 핵심 관심사에 대하여도 고담준론(?)하며 모임체 명칭도 ‘일수거사들의 엉망진창 포럼/아카데미’ 또는 ‘중구난방/뒤죽박죽 포럼(아카데미)’으로 명명한 것은 친환경 사회, 모두가 행복한 사회 실현을 위한 조건·고민을 위해 잘한 선택으로 생각합니다. 명칭이 다소 우스꽝스럽고 용어가 갖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하여 모임 자체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이 형성될 우려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어쩌면 오히려 이름으로 인해 주목도를 높일 수가 있어 모두가 ‘행복한 경제’ ‘사람이 살 만한 지구에 도달하는 지혜’에 이르는 첩경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모임체 이름에 얽힌 보다 세부적인 철학적·사상적 백그라운드는 이 취지를 이미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 ‘냅둬유 농장주’가 보완하는 것으로 하면 일반 대중들에게도, 특히 환경이나 로컬경제운동의 중요성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에게 훨씬 친근하게 다가갈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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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정연한
스탠포드대, 매사추세츠대 석·박사(교육정책), 교육부 국장, 대구시·인천시 부교육감, 하와이 East-West Center 고위급 교육전문가, 한국외국어대학 초빙교수 역임
현재 글로벌미래교육연구소 대표, 성신여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