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이 좁은 목은 가느다란 사취(砂嘴)로 반도와 섬이 연륙되어 바다가 막혀 있었다. 한산대첩 때에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게 쫓긴 왜선들이 이 좁은 목으로 도망쳐 들어왔다가 퇴로가 막히자 땅을 파헤치고 물길을 뚫어 도망쳤다 하여 이곳을 판데목[鑿梁]이라고 부르는데, 왜군들이 도망칠 때 아군의 공격으로 무수히 죽었으므로 송장목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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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와 당포해전에서 패한 왜적은 73척의 대전선을 이끌고 거제도 견내량에 진을 치고 정박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접한 충무공은 곧 배를 띄워 왜적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하고 학익진을 펴 무찌르니 왜선이 불에 타 품은 연기는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에 맞아 넘어지며 파선돼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바다는 온통 피로 물들었다. 이 싸움이 이른바 ‘한산대첩’이다. 살아 남은 자는 살 길을 찾아 서쪽으로 도망가 지금의 통영시 미수동과 당동 사이 판데목에 다다랐다.
당시 판데목은 밀물때는 바다지만 썰물때는 뻘로 변하여 선박이 통행이 불가하였다.
뻘에 막혀 빠져 나갈 수가 없었던 왜적은 급한 김에 야밤을 틈 타 좁은 목을 파서 도망갔다. 이때부터 통영 방언으로 ‘판데목’이라 불렀으며 왜인들은 ‘다이고오보’라고 불렀다. 이것은 임진란의 괴수 풍신수길의 최고 관직명이 다이고오였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옛날에는 충무시와 마주보는 미륵도와의 최단 길이 50m 바다목을 건너기 위해 무지개형으로 돌다리를 놓아 겨우 인마가 통행하고 다리밑으로는 작은 배가, 그리고 양쪽으로는 나룻배가 움직여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1932년에 이르러 이 목에 확장공사를 시작해 길이 461m, 폭 5m, 높이 3.5m의 해저터널을 굴착해 행정 통폐합전 충무시와 미륵도, 산양면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됐다. 이 해저터널은 우리나라 동양 최초의 것이며 동양 유일의 명물로 등장했다.
특수한 공법으로 만들어진 이 해저도로는 개통 20년 만인 1950년께부터 바닷물이 새어들기 시작했다. 한때는 통행을 못할 정도로 물이 꽉 찰 때도 있었다. 대형차량 등장과 인구 팽창, 교통량 증가, 해저도로 노후 등 갖가지 이유로 1970년 이후 사람만 통행하고 차량은 일절 통행을 금지시켰다.
해저도로 양쪽 입구에 ‘용문달양’이라고 돌에 새긴 이름이 있다. 이것은 양쪽 다 용문을 지나면 태양빛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즉, 바다밑으로 가서 어느 한쪽으로 나오면 빛에 달한다는 것이다.
충무운하는 옛날 임진란 이후 판대목으로 불러오던 곳으로 워낙 좁은 곳이기 때문에 그 전에는 아치형의 돌다리를 조선조 영조 33년(1757년)에 제19대 통제사 오인후가 세운 것을 고종 32년 제208대 통제사 홍남주가 고쳐 인마가 통행했고 밑으로는 작은배가 다녔다
출처 : 경남일보(http://www.gnnews.co.kr)
이하 통영시 공식블로그에서 펌

첫댓글 통영에 갈 기회가 생기면 꼭 들러보고싶네요.
통영해저터널 소개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통영의 좋은명소, 꼭- 들려봐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