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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D-13(Thirteen Days) ]
영화 은 전 세계를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로 몰아넣은 소련의 쿠바 미사일기지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을 당시 대통령 특별 보좌관이었던 케니 오도넬의 시각으로 본 1962년 10월22일부터 11월2일까지의 13일간 벌어졌던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입니다.
제작진은 치밀한 연구와 고증 그리고 생생한 인터뷰 자료를 모아 당시의 현실을 완벽히 재현하여 영화화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입니다. 총 8천만 달러의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이 영화는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작진은 필리핀 정글 속에 쿠바 미사일 기지와 美 공군본부를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고 U-2 정찰기와 폭격기, 항공모함과 잠수함 등 실제 무기와 병력을 동원해 일촉즉발의 위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특히 당시 美 정찰기가 발견했던 65피트의 소련제 핵미사일(S4 Missiles)을 완벽히 재생해내 마치 역사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사진:미국기에 대해 발포하는 쿠바군)
LA 타임즈,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등 미 저명언론들은 을 역사를 새롭게 재현한 지적이고 강렬한 드라마라고 치켜세우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의 긴박했던 백악관 내부 상황을 짧고 굵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브루스 그린우드 분)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스티븐 컬프 분), 그리고 대통령의 친구이자 보좌관이었던 케네스 오도넬(케빈 코스트너 분)이 극을 이끄는 주요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소련의 미사일 뿐 아니라 백악관 안에서 전쟁을 충동질하는 군부와 대립각을 세웁니다.
몇 장면을 제외하면 액션도, 전투 장면도 없지만 탁월한 각본과 연출로 긴장의 끈을 능수능란하게 밀고 당기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급격하게 변하는 국제 정세와 미국의 정치 상황이 적절히 병렬되면서 현실감을 더하고 있으며, 케네디 형제와 오도넬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킨 드라마적 요소 또한 잘 버무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은, 3차 대전 발발 직전이라는 특정 상황을 헐리우드 스타일로로 이렇게 저렇게 다듬어서 잘 빚어낸 영화라는 평입니다. 깨알 같은 유머와 가족애 따위의 헐리우드 영화의 필수적인 양념을 곳곳에 버무려 놓은 것도 눈에 띕니다.
피그만 침공 사건, 중간 선거 등 케네디 대통령이 직면하고 있었던 다른 정치 문제들은 산만하지 않을 정도로만 언급하는 선에서 가지치기를 했습니다. 왜곡이나 미화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영화의 깔끔함에는 크게 한몫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지 W.부시 미대통령은 취임 이후 백악관에서
처음 관람하는 작품으로 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건의 배경이 되었던 쿠바 및 러시아에서 특별 상영되는 이례적인 행사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습니다.
특히 쿠바에서는 그 당시 역사적 인물이었던 카스트로 위원장과 당시 사건을 책임지었던 정부 인사들이 동석했고, 그곳을 방문한 배우 케빈 코스트너는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공식적으로는 처음 쿠바 땅을 밟은 미국 배우가 되었습니다.(사진:쿠바 미사일 기지)
러시아에서는 국제 평화를 기원하는 목적으로 이 영화가 상영되었으며 러시아 정부 관계자 美 무기전문가의 참석아래 당시까지도 존재하는 지구상의 핵무기 위기를 반추해보는 토론을 갖기도 하였다는 후문입니다.
* 주인공 케빈 코스트너가 분한 케네스 오도넬은 누구인가?
아일랜드 혈통의 케네스 오도넬은 영화 속처럼 케네디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버드 재학 시절, 로버트 F. 케네디와 동급생으로 만나면서 케네디가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존 F. 케네디의 상원의원 선거 그리고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도 참가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 집무실과 사무실이 직접 연결이 되어있을 정도로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고 합니다.(사진:오도넬로 분한 케빈 코스트너)
[ 쿠바 미사일 위기 ]
* 배경
1962년 당시 미군이 보유한 소련에 투발 가능한 핵전력은 미 본토에서만 탄도탄 170여 기에 B-52 전략폭격기 555대였습니다. 투발 가능한 전략핵탄두만 총 1,830기. 여기에 서유럽에는 중거리 핵전력까지 배치되며 소련 영토를 사거리에 두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소련이 가진 건 고작 66기의 ICBM과 SLBM 뿐. TU-95 전략폭격기를 동원해도 차이가 커도 너무 커서 선제 핵공격을 통해 미국을 제압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실제 핵전쟁이 발발한다면 소련은 얼마 안 되는 핵무기를 다 사용하고 나서는 미국이 두들기면 두들기는 대로 그냥 맞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당시의 핵전력 비율은 17:1로, 답이 안 나오는 막장 파워 밸런스였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터키와 이탈리아에도 주피터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터키에서는 모스크바를 사거리 안에 두고 있었습니다. 반면 소련으로선 중/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미국 본토 타격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소련 정부와 흐루쇼프 서기장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새로 대통령으로 당선된 케네디를 애송이 부잣집 도련님 정도로 여겼던 흐루쇼프는 그와의 첫 회담에서 그를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위협했고, 소련의 미사일과 핵 공격력이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미국과 마치 한 판 붙을 것과 같은 자세를 취했습니다. 허장성세였던 겁니다.(사진:오른편 케네디 대통령과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한편 소련에 대한 정보를 잘 알지 못했던 미국은 정작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우월하다고 과대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는 소련이 쏘아올린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지속적인 소련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소련이 설마 소련 바깥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도발적인 전략을 취하진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소련이 동독에 준중거리 미사일과 핵탄두를 배치했던 전례를 볼 때 이는 터무니없이 안일한 생각이었습니다.
* 아나디르 계획과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
"쿠바를 보호하는 것 외에 우리 미사일은 서방이 '힘의 균형'이라 부르기 좋아하는 것을 대등하게 만들 것입니다. (...) 그들은 적의 미사일이 당신을 겨냥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니키타 흐루쇼프, 1962년 간부회에서 발언.
쿠바 혁명 정부의 카스트로는 1959년 쿠바혁명 성공 이후 여러 서방계 자본을 추방하고 토지를 국유화하는 등, 미국이 중남미에 다져놓은 정책적 기반을 뒤흔들었습니다.
그 결과 미국정부는 CIA를 통해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제거를 시도했고, 피그만 침공을 진행하는 등 쿠바에 대한 미국정부의 물리적 경제적 압박이 이어졌습니다. 쿠바정부는 피그만 침공(아래에서 설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미국에 제대로 한방 멕였습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세계최강국 미국의 앞마당에 있는 현실상 미국을 혼자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압박해 오는 미국의 위협에 자신의 정권을 떠받칠 바깥 기둥을 마련하고자 소련에 협력을 요청했습니다.(사진: 카스트로와 흐르쇼프)
한편 소련의 흐루쇼프도 서방 압박용으로 시도했던 61년 베를린 위기와 장벽설치가 오히려 케네디 등 서방국가들을 단합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엄청난 투자를 했던 핵미사일 사업도 생각보다 효과가 미미해서 장거리 탄도미사일 생산이 지지부진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던 차에 피그만 침공과 더불어 카리브 해의 긴장이 고조되고 카스트로로부터 협조 용청이 답지하자 흐루쇼프는 얼씨구나하고 쿠바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게 됩니다. 아울러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공산주의 확산이란 세계적 목표를 바탕으로 쿠바를 지원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당시 소련 지도부는 미국의 쿠바 침공이 임박하였다고 여겼습니다. 거기에 소련 지도부, 엘리트,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비롯한 쿠바 혁명가들에 대한 지지와 기대가 높아지고 있었고, 이들 제3세계 혁명가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까지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들이 깔리면서 소련과 쿠바 사이에는 긴밀한 비밀 연락이 오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쿠바는 자신들 영토 내에 중거리 탄도미사일 기지를 설치해달라고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쿠바는 미국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말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쿠바의 요청이야말로 소련의 치명적인 핵전력 열세를 일거에 평형 상태로 바꿀 수 있는 신의 한 수였습니다. 이미 대량 생산된 중거리 탄도탄을 쿠바에 배치해 미국에 대한 추가적 공격 수단을 갖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던 겁니다. 흐루쇼프는 1962년 5월 21일 쿠바에 미사일 배치를 단박에 결정하였고,
간부회는 이 결정을 만장일치로 승인했습니다. 카스트로와 흐루쇼프는 1962년 7월 7일에 공식적으로 핵미사일 기지 건설에 합의합니다.
이 계획은 서방을 속이기 위해 마치 시베리아에서 벌어지는 작전인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시베리아의 아나디르 강의 이름을 따서 아나디르 계획이라 불렀습니다. 이후 쿠바에 사정거리가 미국 동남부에 달하는 R-12 미사일과 여기에 탑재할 핵탄두를 9월 8일과 16일에 나누어서 보내주고,(사진:쿠바 미사일 사정거리)
이어서 당연히 미사일 기지를 설치할 전문 인력과 장비를 배달합니다. 이 미사일 기지의 사일로에는 이 중 6개는 R-12를 위한 사일로이고 나머지 3개는 이후 설치될 R-14용 사일로였습니다. R-14는 미 본토 전역에 핵 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이었습니다.9월 말, 미국 신문들은 소련 선박이 쿠바로 무기를 이송 중이라고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케네디는 국민들에게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이 무기들은 방어용이지 공격용이 아니다"라고 발표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그 발표가 맞다고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케네디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거대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렇게 기지가 건설되던 중 1962년 10월 14일, 쿠바의 하늘을 감시하던 U-2기가 찍은 항공사진 몇 장이 펜타곤과 백악관에 전달됐습니다.어이없게도 소련 군부의 호언과 달리, 소련군 미사일 기지들의 위장 수준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농촌 도로에 트럭들이 줄지어 지나다니고, 텐트들이 군 시설처럼 열과 오를 딱딱 맞추고 있었던 데다가, 부대의 상징 등을 땅에 그려놓은 걸 항공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촬영된 것은 소련이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 및 관련 시설이었습니다. 이후 반나절 안에 모든 미군 병력에 비상경계가 발령되면서 소련제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사거리가 계산된 보고서가 만들어졌습니다. 백악관과 펜타곤을 비롯한 미국 조야는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가 그린 가상 전황도를 보고 발칵 뒤집혔습니다.
쿠바가 중심이 된 붉은 원은 말 그대로 미국 전역을 덮고 있었습니다.이미 배치된 R-12로도 수도인 워싱턴 D.C. 타격이 가능한 데다 R-14로는 워싱턴 주와 캘리포니아 일부를 제외한 미국 본토 전 지역이 사정권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소련 극동 지방의 미사일도 고려하면 사실상 태평양의 섬들을 제외한 미국 전 영토가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 사정거리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즉시 비상대책위원회(ExComm)를 소집했습니다. 여기에는 린든 B. 존슨 부통령,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딘 러스크 국무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더글라스 딜론 재무장관, 존 맥콘 CIA 국장, 맥스웰 테일러 합참의장 맥조지 번디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시어도어 소렌슨 특별보좌역, 케네시 오도넬 보좌관 등의 쟁쟁한 인물들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의견들이 엇갈렸습니다. 군부는 이를 명백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폭격이나 미사일로 쿠바의 발사 시설을 날려버리는 방안이 최선이라고 왕왕 댔습니다. 특히 공군을 대표하는 커티스 르메이는 여러 루트를 통해 전면적인 선제 핵공격으로 소련과 쿠바를 초토화해서 아예 이들 국가들을 석기시대로 만들어 버리자고 떠들어댔습니다.
후술되는 케네디의 비밀 녹음에 의하면 르메이는 회의에서 뮌헨 협정을 거론하며 케네디 대통령의 온건책을 비판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르메이의 이런 공박에도 일단 참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르메이는 이후 대통령이 자리를 떠난 이후에도 다른 군 장성과 실컷 대통령을 씹어댄 것이 비밀 녹음에 모조리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케네디의 민간 국방 전문가들은 미국인들이 놀랄 만큼 핵공격으로부터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보호 시설은 도시들에만 존재할 뿐이고, 시골에는 약간의 혹은 거의 아무런 보호 시설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골 지역에 5천만 명이 살고 있고, 도시 거주자들도 2~3백만 톤의 TNT의 파괴적인 위력에 직면해서 취약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인류의 생존이 걸린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한 온건파는 다른 방안이 나올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케네디는 이 때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그 배경을 바탕으로 한 바버라 터크먼 여사의 유명한 역사소설 <8월의 포성>을 읽은 터라, 사소한 행위가 얼마나 쉽게 대규모 전면전으로 갈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바바라 터크먼 여사가 인류를 구한 것일 수 있었습니다 CIA의 보고 직후에는 ExComm 내부에서 폭격밖에 답이 없지 않느냐는 매파가 한때는 우위인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습니다.
CIA가 찍어온 사진이 ExComm에 전달되었을 때,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부 장관의 첫 반응은 "이런 XXX들이"였고, 이후에도 공습을 강하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매파의 강경책은 쿠바에 소련의 전술핵이 없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게 나가더라도 최소한 쿠바만 피해를 본다는 논지였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대로 쿠바에는 R-12 미사일과 함께 핵탄두가 충분히 배치되어 있어, 쿠바는 공격받을 경우 워싱턴 D.C.를 시작으로 미국 남동부와 중부의 주요 도시를 핵미사일로 날려 버릴 수 있었습니다.(사진:비엔나에서의 케네디-흐르쇼프 회담)
실제로 당시 ExComm 회의에서는 수도를 시애틀로 바꾸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는 후문입니다. 이후 묵인, 전면 침공, 공습, 회유 등의 갖가지 대안들이 제시되었으나 케네디는 봉쇄를 선택하게 됩니다.
다만 봉쇄(Blockade)라는 용어는 그야말로 전시에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용어는 검역(Quarantine)으로 선택했습니다. 케네디가 쿠바를 봉쇄하기로 생각을 정한 계기는 공군에서 공습을 하더라도 "90% 이상의 미사일을 제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보고해 왔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 때 회의 내용을 몰래 녹음했습니다. 녹음 파일이 담기는 장치는 백악관 지하실에 있었고, ExComm 회의가 열리는 탁자 밑에 녹음기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케네디는 자신만이 아는 버튼을 통해 녹음을 키고 끌 수 있었습니다.
연필꽂이 옆에 있었다고 합니다. 케네디가 이렇게 비밀 녹음 장치를 둔 이유는 이전 피그만 침공 당시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던 참모들이 막상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들 딴소리들을 한 것에 대해 열불이 났었기 때문이었습니다.실제로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녹음본이 공개되기 이전까지,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발언 취지를 바꾸면서 발언했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로버트 케네디였습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는 ExComm 회의 당시 비둘기파보다는 매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이 녹음본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로버트 케네디는 처음 사진을 보았을 때 불 같이 욕을 해댔습니다. 로버트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자신의 책에서도 자신이 매파보다는 비둘기파였다는 취지로 서술했습니다. 미국 대중들에 큰 영향력이 있었던 로버트의 증언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케네디가 형제들이 비둘기파였고, 나머지 관료들이 매파인 것처럼 인식이 되어 왔습니다.
이는 영화 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실제 녹음본에서는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은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비둘기파였습니다. 물론 케네디 대통령도 처음 쿠바 미사일 배치 정보를 접했을 때 경악과 분노를 담아 이렇게 외쳤습니다. "흐루쇼프 그 자가 나에게 이럴 순 없어!"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TV와 라디오를 통해 소련이 미국 전역에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 중이라고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전 세계의 정부와 언론들은 쿠바에 시선을 집중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소련에게 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시설의 철거를 요청했지만 누구도 흐루쇼프가 순순히 물러서리라 보지 않았습니다.
* 치킨 게임
사실 22일의 케네디의 비난 성명에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쿠바에 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소련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거래를 할 것이라고 여겼고, 10월 21일까지도 소련 지도부는 이 환상을 공유했습니다.
하지만 10월 21일,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소련의 '배신'을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나설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고 소련 지도부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상황이 '비극적'이 되었다고 간주했습니다. 소련 군부는 미국이 핵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고, 흐루쇼프는 핵 없이는 쿠바의 멸망을 막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소련 군부는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면 전술핵무기 차원의 반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외무상이었던 미코얀은 전술핵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핵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며 반대했습니다.
동요하기 시작한 흐루쇼프는 플리예프 장군에게 어떠한 핵무기도 사용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말리노프스키 국방상의 주장으로, 소련 해군은 핵탄두를 장착한 4척의 잠수함을 쿠바 해안에 접근시키기로 하였습니다. 10월 23일, 흐루쇼프는 케네디 형제가 겁에 질려 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전군에 데프콘3을 발령했습니다.(사진:ExComm회의)
아울러 항공모함 8척을 포함, 무려 90척의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켜 쿠바의 모든 영해를 봉쇄시켰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카리브 해로 미사일기지 건설 자재를 싣고 오는 모든 선박에 대한 강제 수색 명령을 내리고만약 전략 물자가 발견된다면 압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를 거부할 시 격침시키라는 초강수를 둡니다. 여기에 맞서 흐루쇼프는 미국의 쿠바 봉쇄를 "공해상 항행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제법 위반이자 해적 행위"라고 강하게 비난하며, 미사일 부품과 기술자를 태운 자국 선박에게 미국의 해상 봉쇄를 뚫고 핵잠수함 6척의 호위 하에 쿠바로 강행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미 해군은 P-3 정찰기와 순양함을 급파했고, 동시에 즉시 보유한 모든 핵전력에 비상대기 명령을 하달, 주요 전략폭격기에 핵탄두 탑재 준비를 마쳤으며, 탄도미사일들은 발사 준비 절차에 돌입했습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NATO에도 비상이 걸리고, 동독과 서독은 물론이며 소련과 미국의 군사력이 맞닿는 모든 곳에서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상황. 인류멸망의 제3차 세계대전이 바로 코앞에 다가온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케네디의 초강경한 입장은 형식상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무력의 사용을 최소화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명령에 불응하거나 무기가 발견된 선박은 격침보다 나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도 실제로 이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이 봉쇄를 뚫고 지나간 선박들도 많았고, 흐루쇼프가 되돌린 선박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미 해군과 마주치기 직전 방향을 돌린 선박들 중 상당수가 미사일을 탑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흐루쇼프 입장에서도 무력 충돌은 피하고 싶었거니와 자국의 최신 무기 체제인 핵미사일을 적의 수중에 넘겨줄 리가 없었던 거지요.
당시 소련 선박들은 핵잠수함의 근접 호위를 받고 있었으며 실제 격침은 고사하고 소련 선박에 사격이라도 했다간 바로 대규모 전쟁으로 번질 만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대서양에서 자칫하면 무력 충돌로 이어질 수 있었던 대규모 핵잠수함 추적을 벌인 앤더슨 대장과 심한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한편 24일 전략공군사령부의 토머스 S. 파워는 합동참모본부의 지휘 아래 데프콘2를 발령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단계의 경계태세인 준전시태세가 선포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1,400대가 넘는 전략폭격기와 134기의 ICBM 전체에 비상이 걸렸고 B-52가 하루 평균 75회나 출격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10월 25일 UN에서는 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히 소집되었습니다.리에서 미국 측 대사 스티븐슨은 쿠바에 배치된 소련 탄도미사일의 정찰 사진을 공개하면서, 소련 측 대사 조린에게 "귀하는 쿠바에 귀국의 탄도미사일이 배치 중임을 인정하시오? 통역 기다릴 것 없이, 예/아니오로 대답하시오(Yes or no? Don't wait for the translation: yes or no?)"라고 강하게 몰아붙였습니다.
이에 조린은 "여기는 미국 법정이 아니오. 검사가 범죄자를 취조하는 듯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소"라고 응수했습니다. 이에 스티븐슨도 지지 않고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귀하의 대답을 기다리겠소(I am prepared to wait for my answer until Hell freezes over)"라고 다시 맞섰습니다.
유럽각국의 수도에서는 10월 24일 밤부터 25일에 걸쳐 반전론자들의 데모가 벌어졌으며, 런던의 대사관 앞에서는 성조기가 불태워졌습니다. 여러나라에서 전시에 대비해 사재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당사자인 미국인들은 더욱 절박해졌습니다.
공포분위기가 미국 사회를 휩쓸었고, 학교마다 “나는 죽기 싫어”라고 외치면서 흐느끼는 학생들의 울음소리로 술렁거렸습니다. 작가 노먼 메일러는 훗날 이때를 회상하면서 “온 세상이 벼랑 끝에 선 기분을 느꼈고...건물을 지날 때면 내가 저 건물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고 썼습니다.
* 검은 토요일
10월 26일에서 27일을 거치는 새벽, 카스트로는 아바나의 소련 대사관에 가서 "앞으로 24시간, 늦어도 72시간 내로 미국의 공습이 임박했다"고 흐루쇼프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침공하는 즉시 소련이 미국을 향해 핵공격을 감행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또한 자국군에게 미국 정찰기를 지체없이 격추시킬 것을 명령했습니다. 카스트로는 위기를 통제하고자 했던 흐루쇼프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여기에 미국 군부가 군사 시설에만 핵공격을 퍼부어서 전쟁할 수 있다는 새로운 핵전쟁 교리를 들고 오자, 흐루쇼프는 자신의 핵 벼랑 끝 전술이 더는 먹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미국이 핵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모든 것이 도루묵이 될 판이었습니다. 흐루쇼프는 간부회에서 미국의 목표가 사람들이 핵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게 여기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한편 26일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미리 예정되었던 아틀라스 로켓 ICBM의 시험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데프콘 3이 발령된 상황에서 주변 ICBM에는 핵탄두가 장착되고 있었습니다.
태평양으로 발사될 예정이었던 이 미사일에는 핵탄두가 장착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소련이 이 발사를 포착하여 핵공격으로 간주했다면? 아찔한 순간들이 이어졌습니다.(사진:미국의 방어선)
마침내 소련 시각 28일, 미국 시각 27일 오후 미국의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 양측 전투기들이 비통상탄두 미사일(일반 폭약 탄두가 아닌 탄두, 즉 핵무기를 뜻한다)을 탑재하고 날아올라 대치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U-2가 소련 영공을 벗어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 쿠바 영공의 다른 U-2 정찰기가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고, 같은 날 쿠바 상공을 정찰 비행하던 미군 전투기는 대공포 사격을 받았습니다.이 때 양측 수뇌부는 이 상황을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U-2 정찰비행은 위 ICBM 시험발사와 같이 위기 발생 직전에 잡은 일정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뒤늦게 이를 안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노발대발하며 모든 비행 일정을 취소시켰습니다. 양측 전투기가 수칙에 따라 핵미사일을 탑재하고 이륙하여 대치했다는 사실은 양측 수뇌부 모두 상황 종식 이후에나 알았습니다.
또 다른 U-2 격추는 크레믈린이 아닌 소련군 일선 지휘관의 결정이었으며, 크레믈린 역시 상황이 끝난 이후에나 이 사실을 보고받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막장의 절정.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최고지도부들이 최일선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쿠바 상공에서 U-2가 격추된 순간 미 수뇌부는 당장 쿠바를 침공해야 한다며 격노했으나, '24시간 동안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고 정하고 어찌어찌 용케 참았습니다.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 날 저녁을 기억합니다. "회의를 마치고 백악관을 나설 때, 아름다운 가을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다음 주 토요일 밤에는 아마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한편 공포에 질린 것은 미국 수뇌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소련 역시 공포에 질렸습니다. 모스크바의 중앙당 관리들은 가족들을 시골로 대피시키느라 소동을 벌였고, 난데없이 모스크바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을 본 지방 관리들도 사태의 추이를 알게 되자 경악하였습니다. 소련 곳곳에서 미친 흐르쇼프가 엄청난 혼란 속으로 자신들을 몰고 가고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10월 28일, '소련이 선제 핵공격을 했다!'는 경보가 북미방공사령부(NORAD)에 울려 퍼졌습니다. 플로리다로 핵미사일이 날아온다는 경고가 울린 것입니다. 워낙 급작스런 일이라 다들 한방 맞았구나 싶어 대통령에게 보복 핵공격을 건의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미 핵폭발로 사라졌어야 할 도시에서 "별 일 없는데요?"라고 해서 조사했더니 핵공격을 대비한 자체 훈련 프로그램으로 인한 오보였습니다. 사태 파악이 늦었으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핵전쟁이 터질 뻔했던 것입니다.
* 철수
결국 핵전력은 물론 봉쇄를 돌파할 만한 재래식 해상전력조차 없었고, 끝까지 가면 국가 멸망을 피할 수 없던 소련의 현실로 인해 흐루쇼프가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터키에 배치한 미국의 중거리 탄도탄의 철수를 조건으로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라디오 방송을 했습니다.(사진:철수하는 소련 선박)
그러나 미국은 이것이 공식 루트가 아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언론플레이로 의심했고, 또 동맹국 터키의 안전보장 문제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그 제안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의심과는 달리 흐루쇼프의 제안은 진짜였습니다.
라디오 방송으로 제안을 한 이유 역시 경악스러운데, 이때 양국 간에 핫라인이 없어서 전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암호화하여 보내고 다시 이를 해독하고 또 통보하는 시간 등등을 합치면 거의 하루가 날아갑니다.
게다가 그 전보가 진짜로 상대국의 국가원수에게서 온 건지도 의심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흐루쇼프는 두 번 전보를 보냈는데, 미국은 이게 정말 흐루쇼프가 보낸 건지 고민했습니다. 3차대전의 위기에서 양국 수뇌 간 의사교류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려 문제가 더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한 방법이 바로 라디오였던 겁니다.
흐루쇼프는 10월 28일을 기하여 선단에 회항 명령을 내리고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로서 인류는 제3차 세계대전인 끔찍한 핵전쟁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게 됩니다.
* 후일담
소련은 약속대로 선단을 회항시키고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켰습니다. 미국과의 전쟁을 각오했던 카스트로는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인류가 절단 나느니 동맹국 하나 잃는 게 낫다는 논리에 따라 깔끔하게 씹혔습니다. 대신 경제지원이 늘어났지만...
그러나 쿠바는 냉전 내내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 소련의 경제지원을 마구 퍼먹는 애물단지로 변합니다. 쿠바는 미국의 경제제재로 경제가 어려운 데다 소련에게 줄 수 있는 건 설탕, 럼주, 시가, 용병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쿠바에 대한 무력침공을 하지 않을 것을 소련에 약속했으며, 흐루쇼프가 10월 27일에 제안한 대로 터키에서 자국의 핵미사일을 철수시켰습니다. 터키 역시 자국의 안전 보장이 흔들린다며 항의했으나, 역시 3차대전 앞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터키를 위해서 지중해에 SLBM 탑재 잠수함이 배치되었습니다.이후 미소 양국은 위기 동안 양측 수뇌 간에 부정확한 의사소통이 있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양국 정상 간에 핫라인을 개설했습니다. 피그만 침공으로 타격을 입었던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보여준 강인한 지도력으로 전 미국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흐루쇼프는 훗날 회고록에서 “나는 가면무도회에서 방귀를 뀌었다고 해서 자살이나 하는 차르 시대의 장교가 아니다. 전쟁을 하는 것보다 후퇴하는 것이 나았다”고 말했습니다. 후퇴를 생각하지 않았던 카스트로는 이런 타협에 욕설을 퍼붓고 벽을 발로 차며 거울을 내던지면서 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10년 후 대통령 후보였던 맥거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흐루쇼프보다 더 강경노선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가 타협했을 때는 격분했지만, 흐루쇼프가 노련했고 현명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가 케네디와 멋진 화해를 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나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지도 모른다.”
반면 흐루쇼프는 미국에 너무 질질 끌려 다녔다고 비판받았고, 공산권 내에서 소련의 위신이 실추되었습니다. 결국 흐루쇼프는 2년 뒤인 1964년 10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투표를 통해서 쫓겨나고 브레즈네프가 당 총서기로 취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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