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 나무 한 잎 같이 쬐끄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 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같은 여자,
시집(詩集)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 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한잎의 여자 2
나는 사랑했네
한 여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여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여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손발이 찬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는 하나 꼭 낳고 싶다는 여자
더러 멍청해지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잎 나뭇잎처럼 위험 한 가지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여자
한 잎의 여자 3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늘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같은 여자
그레뉼같은 여자
모카골드 같은 여자
창 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여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여자
봉투같은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잎 클로버 같은 여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개이기도 한 여자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여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여자
바람에는 눕는 여자
누우면 돌처럼 깜감한 여자
창 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서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여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보여 주지 않는 여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여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 했네
물푸레 나무 한잎처럼 쬐그만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이 시로 인해 한동안 물푸레나무와 그 잎이 보고 싶던 때가 있었다.
커다란 나무에 비해 여릿하고 포릇하고 정말'쬐그만' 둥근 잎이었다.
천상 '여자'를 닮은, 이를테면 눈물 하면 떠오르는 글썽임이라든가,
슬픔 하면 떠오르는 비릿함이라든가. 병신 하면 떠오르는 어리숙함이라든지,
시집 하면 떠오르는 아스라함이라든가......
그런 '여자'를 반복해 나열하면 할수록, 묘사하면 할수록 '여자'의 실체는 사라지고
'여자'는 신비의 옷을 입는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다. 물푸레나무에 달린 '쬐그만' 잎처럼 하고많은 여자와
'여자'라는 보통명사를 이토록 입에 척척 달라붙도록, 혀에 휘휘 휘감기도록
구체화시켜 놓다니!
여자는 남자의 '여자'다. 남자의 엄마이고 누이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딸이다.
남자의 과거이고 미래이다.
남자의 부제이자 심연이고, 선물이자 폭력이다.
그러니 시작이고 끝이다. 그런 여자를 어찌 정의할 수 있으랴.
모두 가지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런 한 '여자'를 누가 가졌다 하는가.
오규원 시인
1941년 경남 밀양 삼랑진 출생, 2007년 작고. 본명은 오규옥
서울 예대 문창과 교수 역임, 보통사람이 호흡하는 산소량의
겨우 20%만 들이쉬는 만성폐쇄성 폐질환을 앓았던 시인은
늘 공기 맑은 한적한 곳에서 살며 고독한 시간과 벗하며 살았다.
병이 깊어지면서 만년엔 짧은 시를 많이 썼는데, 마지막 시는 병상에서
제자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썼고, 열흘 뒤 유명을 달리 했다.
유고집 "두두" (문학과 지성사 간)가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