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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진실과 허구 (상)
관우가 정말 五關을 돌파했을까 ?
동양의 역사 소설 가운데 등장인물의 숫자나 배경이 된 시대의 길이, 영고성쇠의 부침 빈도등 스케일면에서 볼때 삼국연의에 견줄만한 작품은 드물다. 한,중,일 동양 3국에서 가장 스테디로 읽히면서 영화, 드라마, 희곡, 만화 심지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돼 날로 정교해지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게임까지 아주 다양한 버전으로 각색돼 왔다.
三國演義가 이렇게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일반독자에게 인기있는 이유는 스토리 전개에서 지루한 부분을 거의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스피디 하면서도 한자문화권 고유의 로맨티시즘이 장마다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소설 삼국지 즉 三國演義(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와 ‘진수’(陳壽)가 지었다는 정사 三國志(史記, 漢書, 後漢書와 함께 중국 前四史로 불린다)와는 어떻게 다르고 소설에는 어느 정도의 픽션이 가미됐을까 ?
중국인들은 보통 수호전은 70 퍼센트의 픽션에 30%의 사실이 가미된데 반해, 삼국연의는 70 %가 사실이고 30%가 픽션이라고들 말한다. 픽션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뒀다는 얘기다. 그러나 삼국연의와 삼국지를 대조해 보면 픽션이 아마 30%는 넘을것이다.
원래가 간략한 正史 三國志는 관우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는 않다. 역사속에서 관우는 ‘강이자긍’(剛而自矜 강직하긴 하지만 융통성이 없고 스스로 과시하기를 좋아함)이람 말로 표현된다. 호랑이처럼 용맹하긴 하지만 지략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강직해 ‘만인지적’(萬人之敵)가 되기 십상이었다.
정사 삼국지는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고 있다.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한 뒤 平西將軍에 봉해졌을 당시, 관우는 형주를 지키고 있었다. 마초가 오호장군에 올라 자신과 같은 반열이 된데 불쾌감을 느낀 관우는 어느날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 마초의 인물됨은 누구와 비교할수 있는지를 물었다(問超人才可誰比類). 여기에 대해 제갈량은 마초가 비록 일세의 호걸(一世之傑)이긴 하나 관우의 절륜일군(絶倫逸群)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고 회답했다.
관우는 제갈량의 평가에 크게 흡족해했다.” 이처럼정사 삼국지는 관우를 용맹하긴 하지만 단순한 성격의 전형적인 武將의 면모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삼국연의의 작자는 정사와는 달리 관우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집중조명한다. 관우의 성격에 대해 정사 삼국지에서는 간단하게 ‘은원분명’(恩怨分明 은인과 원수을 분명히 한다)정도로 묘사했지만 삼국연의에서는 ‘의중여산지인’ (義重如山之人 의리를 산만큼이나 중하게 여긴다)라는 표현으로 훨씬 업그레이드 된다.
이런 경향은 삼국연의의 저자인 羅貫中이 처했던 시대상황(元末明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송나라때부터 집중적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관우는 나관중이 살고 있었던 시대에는 이미 聖人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국연의는 유비를 높이고 조조를 억누르는 기조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촉의 승상 제갈량과 함께 관우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인물로 묘사됐다.
a) ‘도원삼결의’ (桃園三結義) : 正史 三國志에는 劉備, 關羽, 張飛가 도원결의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그들의 친분이 형제처럼 두터웠다고만 적고 있다. 나이도 사실 관우가 유비보다 많았다.
b) ‘청룡언월도’ (靑龍偃月刀) ::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다. 마찬가지로 여포의 무기가 ‘방천화극’(方天畵戟)였다든지, 장비가 ‘장팔사모’(丈八蛇矛)를 사용했다든지 하는 얘기는 근거가 없다.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도드라지게 하기위한 저자의 창작일뿐이다. 또 관우가 적토마는 탔다는 얘기도 사료로 뒷받침되지는 않는다.
한때 여포가 탔던 건 정사에도 나와 있다. 그러나 여포가 죽은뒤 적토마가 어떻게 됐는지는 불분명하다. 조조가 전리품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관우에게 선물로 줬다는 부분 역시 창작이다.
c) ‘삼영전여포’ (三英戰呂布) : 호뢰관(虎牢關)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3대 1로 여포와 겨루는 삼국연의의 명장면이다. 소설에는 유비,관우,장비가 반동탁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제후 ‘공손찬’(公孫瓚)휘하에서 여포와 일전을 겨루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正史에 따르면 공손찬은 반동탁연합군에 참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비 일행도 반동탁군에 참여했을리가 없다.
d) ‘온주참화웅’ (溫酒斬華雄) :‘잔의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벤다’는 유명한 관우이야기는 전혀 엉뚱하게 왜곡된 사례로 정사에서는 강동의 맹호 손견이 화웅을 죽인 것으로 돼 있다.
e) ‘참안량 주문추’ (斬顔良 誅文醜) :관우가 한때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을때 원소의 맹장인 안량과 문추를 베는 전과를 올렸다는 삼국연의의 내용도 정사와는 다소 다르다. 정사를 보면 안량은 관우에 의해 죽임을 당한건 맞지만 문추는 관우가 주살한게 아니라 조조가 한 것으로 나온다.
f) 천리주단기 과오관 참육장(千里走單騎 過五關 斬六將) : 한때 조조에게 의탁했던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간다며 조조와 이별하고 단기로 천리길을 가는데 그 과정에서 다섯 개의 관문을 돌파하며 여섯명의 수문장을 죽여다는 삼국연의의 명장면이다.
그러나 관우는 허창(許昌)에서 여남(汝南) 으로 직접 가로질러 갔기 때문에 관문을 돌파하며 여섯장수를 베는 일은 발생하지도 않았고 역사적으로도 관련기록이 없다.
g)화용도 관우의석조조(華容道 關羽義釋曹操) :적벽대전에서 대패하고 달아나던 조조를 관우가 화용도에서 놓아줬다는 삼국연의의 명장면은 조조를 깎아내리고 관우를 치켜올리려는 작자의 창작의도가 명백히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조조를 잡기위해 화용도에 간 것은 유비였는데 당시 조조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h) 수엄칠군(水淹七軍) :관우가 장마로 불어난 한수를 이용해 위나라의 명장 방덕과 우금을 무찔렀다는 삼국연의의 이야기.
역사적 사실에 근거는 뒀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정사와는 상당부분이 다르다. 삼국연의에서는 관우가 가을에 큰 장마가 닥칠 것을 미리 예상하고 미리 고지대에 쌓아둔 둑을 터뜨림으로써 위나라 군대를 일거에 수장시킨다. 위군을 이끌던 우금은 항복하고 방덕은 끝내 죽임을 당한다.
반면에 정사에서는 당시 위군이 대패한것은 순전히 천재지변에 가까운 홍수탓으로로 사람이 도모한일은 아니었다고 기록돼 있다. 정사 삼국지의 관우전과 우금전에는 사실관계가 명확히 적혀 있다.
“때는 가을로 매일같이 장대비가 쏟아졌으며 한수가 크게 불어나 평지의 물높이가 여섯장이나 됐다. 관우휘하의 荊州水軍은 이런 기후에 익숙했지만, 우금과 방덕의 북방군은 여기에 익숙치 않아 폭우에 쓸려 내려갔다. 우금은 결국 관우에게 항복했으며 방덕은 피살됐다.”
i) 괄골요상(刮骨療傷) : 독화살을 맞은 관우가 바둑을 두며 뼈를 도려내는 수술을 태연하게 견디는 삼국연의의 장면도 허구다.
연대기를 따져보면 화타는 이미 죽은지 2년정도되는 시점으로 관우는 화타가 아니라 일반군의관의 수술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지의 진실과 허구 (중)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는데 ?
전편에서는 주로 삼국연의와 정사 삼국지가 관우를 각각 어떻게 서술하고 있으며 어떤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관우에 이어 본편에는 정사속의 제갈량이 어떻게 소설에서 완벽한 군사 전략가로 미화됐는지를 알아본다.
用兵에 있어서 神技에 가까운 妙算을 발휘하며 出師한후 끝까지 유비에게 충성한 제갈량은 그의 사후 역대왕조를 거쳐 본받아야할 典範으로 떠올랐다.
관우가 關聖大帝로 후세에 추앙받은 것처럼 제갈량은 諸葛武侯로 떠받들어졌다. 물론 임금 帝자보다 한단계 낮은 제후侯 자가 붙었지만 말이다. 제갈량이 중국역사와 문화에 미친 영향은 그가 실제로 역사에서 활약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a) 화소박망파 (火燒博望坡)
삼국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융중땅에서 나와 유비의 군사가 된후 보왕포에서 조조의 군사를 화공으로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는 허구다.
정사 삼국지는 보왕포에서의 전투는 건안 7년에 발생했고 제갈량이 유비의 신하가 된 것은 이로부터 5년후인 건안 12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결국 보왕포에서 화공으로 조조군을 패퇴시킨건 유비가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지 제갈량의 지혜를 빌린 것은 아니다.
b) 초선차전(草船借箭)
적벽대전 직전 제갈량이 안개가 자욱한날에 조조군을 기만해 지푸라기를 가득 싣은 돋단배에 활을 쏘게 하는 수법으로 하룻밤만에 십만개의 화살을 얻는다는 삼국연의의 유명한 이야기, 그러나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아니라 오나라의 손견과 손권 부자가 유표와 과강에서 전투를 벌였을때의 에피소드로 기록돼 있다.
c) 적벽지전(赤壁之戰)
제갈량이 적벽대전에 오나라를 끌어들이기 위해 손권의 자존심을 건드린건 사실이나 손권 휘하의 문무 관리들과 설전을 벌였다거나 주유를 機智로 이겼다는건 전혀 사실이 아니고 고육계(苦肉計), 연환계(連環計) 역시 소설에나 등장하는 허구다.
d) 칠금맹획(七擒孟獲)
제갈량이 남정을 했다는 기록은 정사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맹획이란 인물 역시 등장한다. 그러나 삼국연의에서처럼 제갈량이 맹획을 7번 잡았다가 7번 놔주는 이야기는 아니다.
제갈량이 남만의 맹획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도 없다. 정사에서 맹획은 촉나라에서 御使中丞이란 벼슬을 한 인물로만 기록돼 있는데 이는 무관이 아닌 문관벼슬이다.
e) 공성계(空城計)
제갈량이 수세에 몰리자 성을 비워 뭔가 계책이 있는것처럼 위장해 사마중달을 퇴각하게 했다는 삼국연의의 이야기, 그러나 이는 역사상 완전한 허구다.
당시제갈량은 한중의 양평(지금의 섬서성 안강현)에 주둔하고 있었고 사마의는 荊州(지금의 어난성 난양)도독이어서 서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당시 양자간에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사마중달과 전투를 벌인 것은 훗날의 일로 마지막 북벌에서 渭水를 두고 대치했을 뿐이다.
f) 사제갈주생중달 (死諸葛走生仲達)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도망치게 하다” 는 고사는 실제로 정사에 있기는 하다. 그러나 삼국연의에 나오는 것처럼 촉군(蜀軍)이 제갈량의 마네킹을 수레에 태우고 돌진함으로써 위군을 놀라 달아나게 한 것은 아니다.
이 고사의 근거는 漢晋春秋란 책이다.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제갈량 사후 촉군은 제갈량이 병사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붙이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사마의는 이를 알아채고 촉군의 뒤를 쫓았다.
위나라 군대가 가까이 추격해 오자, 촉군은 갑자기 旗를 거꾸로 하고 북을 치며 위군을 향해 돌진했는데 사마의는 갑작스런 촉군의 기세에 눌려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두고 당시 위나라 진중에는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물리쳤다는 조크가 나돌았는데 후세에 삼국연의의 작자인 나관중이 이를 모티프로 픽션을 만들어낸 것이다.
삼국지의 진실과 허구 (하)
유비는 진짜 울보였나?
삼국연의에 나오는 것처럼 유비는 우유부단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 자주 눈물을 보이는 인물이고 그 반대로 조조는 만사에 치밀하고 의심이 많으며 잔인하기만 인물이었을까 ?
정사 삼국지를 보면 두인물에 대한 삼국연의의 인물묘사는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정사 삼국지는 유비와 조조 대해 모두 최소한 왕조를 창업한 인물로 고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유비와 조조가 성격상 그렇게 대조적인 인물은 아닌 것이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홍의관후(弘毅寬厚 의지가 크고 굳세며 관대하고 도량이 크다), ‘지인대사 (知人待士 사람볼줄 알고 선비를 대접할줄 알다)란 말로 유비의 사람됨을 표현했다. 가히 영웅의 그릇으로 나라 전체를 제갈량에게 맡기고 군신의 관계에 서도 성심을 다했으며 융통성이 있어 굽히기는 했지만 결코 굴하지는 않았다는게 정사의 평가다.
그러나 삼국연의에서 나관중은 유비를 한황실의 정통계승자, 인의 화신으로 지나치게 묘사한 나머지 때로는 무능하게도 비칠 정도다. 중국의 티비 드라마에서 유비는 흔히 눈물이 많은 인물로 묘사되며 바로 이 눈물은 유비의 인을 표현해내는 소도구로 등장한다. 이는 당대의 효웅(梟雄)인 유비의 진면목을 크게 왜곡시킨것이다.
정사에 의거해 공평하게 유비와 조조의 그릇을 비교하면 조조가 아무래도 한수위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조조를 삼국역사상 가장 똑똑한 인물(明略最優)로 평가하고 있다. 조조는 30여년간 군을 지휘하면서 손에 책을 놓지 않았고 시부에 능했을뿐만 아니라 초서, 바둑에도 조예가 깊었고 검소해 화려한 의복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또 사람들과 교분하며 정사를 논하기를 좋아했으며 거기다 풍류도 즐길줄도 알았다고 기술돼 있다. 게다가 신상필벌에도 엄정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정사 삼국지는 이 부분에 대해 "노력을 했으면 의례 상을 내렸으며, 이럴 경우 천금을 주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공이 없는데도 상을 내리기를 바라면 얄짤 없었다"라고 명백히 적고 있다.
조조는 중국역사상 최고의 정치가인 동시에 뛰어난 문학가이며 군사전략가다. 그러나 삼국연의에서는 조조의 성격가운데 긍정적인 부분은 상당부분 누락시켰다. 나관중의 붓끝에서 조조는 잔인하고 제멋대로이고 의심이 많은 반면교사의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이 밖에 삼국연의에서 거의 조연으로만 묘사되는 오나라의 주유와 노숙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우선 주유에 대해 정사 삼국지의 평가는 상당히 높다. 진수(陳壽)는 주유를 "성격이 담백하고 관대하며, 겸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아량이 이를데 없이 높다"고 평가한다. 주유의 주군인 손권도 그를 칭찬하기를 군주를 보좌하는데 타고났다고 했다.
그러나 삼국연의에서 주유는 걸핏하면 제갈량에게 조롱당해 불같이 화를 내는 조연급으로등장한다. “왜 하늘은 동시대에 나를 낳고 제갈량을 낳았는가”라며 제갈량에 대한 열등감으로 몸부림치며 홧병에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나관중이 주유를 급한 성격에다 승부욕에 사로잡힌 이류인물로 묘사한 이유는 제갈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송나라의 대문호 소동파는 주유를 웅자영발(雄姿英發), 천고풍류인물(千古風流人物)로 평가했다. 주유가 삼국연의에서처럼 제갈량에 훨씬 못미치는 속좁은 인간이라면 소동파가 미사여구로 주유를 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주유에 버금가는 동오의 재사 노숙은 삼국연의에서 이름 두자를 빼놓고는 완전히 왜곡된 인물이다. 사실 삼국지 정사는 노숙을 오나라의 제갈량으로 평가하고 있다. 진수는 역사에 노숙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비록 진중에 있지만 책을 놓지 않았고, 생각하는 바가 크고 원대하여,뭇사람들을 능가하는 명석함이 있었다."
제갈량이 융중땅을 삼고초려한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내놓은 것처럼 노숙도 그의 주군인 손권을 처음 봤을때 장강유역의 강동을 근거지로 삼아 북쪽의 조조에 대항하고 동오를 건국하라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한다.
또 조조의 대군이 형주를 향해 南征에 나섰을때 손권의 부하들은 대부분 항복할것을 주장했지만 노숙만이 조조에 항거할 것을 주장하면서 주유를 불러들여 함께 대책을 논의하라고 권한 인물이다. 그러나 삼국연의에서 노숙은 제갈량과 주유사이에서 골탕만 먹는 유약한 선비로만 그려진다.
https://ddungsang.tistory.com/426
의외로 ‘삼국지’가 100% 실제 역사라고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삼국지는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의 소설가 나관중이 집필한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입니다. 반대로, 진나라 학자 진수가 집필한 ‘삼국지정사’가 제일 역사에 근접한 삼국지로 알려져 있죠. 물론 역사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기 때문에 큰 틀은 삼국역사와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소설이라는 특징상 긴장감과 재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작가의 재량이 포함된 것이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위, 촉, 오 삼국 중에서 유비가 군주인 촉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삼국을 통일한 것은 ‘진’으로 위나라의 장수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천이 형제들과 함께 모반을 일으켜 세운 국가였죠. 또한, 중국 역사 속에서 촉나라는 위와 오에 비해서 작은 변방국가와 다름 없었습니다.
작은 변방국가의 군주가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렇다면 왜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은 촉나라의 유비였을까요? 여러 역사학자들이 유추해본 결과, 첫째로 원나라가 망해가는 시점에서 황제인 테무르의 후계자가 없어서 몽골제국에서 후계자 쟁탈전을 합니다. 여기서 정치적 혼란을 빚게 되는데, 만약에 테무르의 후계자, 즉 원의 장손이 있었다면 정치적 혼란을 빚지 않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이죠. 유비는 무너지는 ‘한’ 왕실의 핏줄이었기 때문에 혈통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유비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둘째로 위의 조조는 난세의 간웅으로 많은 인재와 넓은 땅을 거느렸던 성공가도를 달린 영웅이고, 오의 손권은 기반이 튼튼했던 손씨 가문의 대물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삼국천하를 옹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유비는 여러 고초를 겪으며 고난 속에서 성공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소설의 재미를 위해서 유비를 주인공으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삼국지의 진실, 혹은 거짓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삼국지연의와 삼국지정사를 비교하면서 실제 역사 속에선 등장인물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볼까요?
1. 도원결의는 삼국지연의에서 만들어진 내용이다.
정사에선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의 도원결의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단, 장비는 젊었을 때부터 유비를 형님으로 지극히 모셨다고 하는데요. 장비보다 나이가 더 많은 관우가 등장하면서 장비는 마찬가지로 형으로 섬겼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토대로 연의에서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도원결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죠.
2. 초선은 가상인물이다.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명인 '초선'은 마찬가지로 중국 최고의 무장 중 한 명에 속하는 여포를 ‘미인계’로 유혹하여 당대 최악의 군주이자 여포를 성장시켜준 동탁을 암살하도록 만듭니다. 정사에선 여포가 한 사소한 일로 동탁이 성급하게 행동했으며, 나중에 화해를 했으나 여포는 빈정이 상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초선으로 인해 여포의 마음이 움직였다’ 라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던 것으로 보아, 초선은 삼국지연의에서 여포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는 강력한 ‘매개체’였던 것입니다.
3. 제갈량은 병법에 있어선 조조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마치 신이 인간세상에 내려온 듯한 느낌을 줄 만큼 정치와 병법 모두 대적할 자가 없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었죠. 하지만 삼국지정사의 저자 진수가 제갈량을 평하길, ‘군대 통솔 방면에 능력은 있었지만 기발한 모략이 부족했고,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이 오히려 용병 재간보다 우수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군사를 다루는 법과 민심을 살피는 정치에는 적군조차도 감복할 정도였지만, 실제로 제갈량이 전투에서 많은 공훈을 세운 것은 아닌 것이죠. 반대로 조조는 평생의 전투에서 승률이 8할 이상으로, 계략과 병법으로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한 지략가였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런 의미에서 적벽대전의 일등공신은 오나라의 명장이자 도독인 '주유'입니다. 제갈량은 단지 손권을 자신의 편으로 이끌었을 뿐, 연의의 내용처럼 적군으로 위장해서 활을 모아오고, 신단에 제사를 지내는 등의 전지적인 능력은 없었던 것이죠. 반대로, 살을 깎아 득을 취하는 ‘고육지책’과 배를 묶어 일제히 화공을 취하는 ‘연환계’ 모두 주유의 계략이었던 것이죠.
유비 사후, 제갈량은 승상의 자리에 오르면서 실질적인 정권을 장악했는데요. ‘칠종칠금’을 만들었던 남만정벌은 맹획과 일곱번씩 밀고 당기는 내용은 실제 역사에선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만족을 설득시켜 굴복하도록 만들었던 사실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출사표’를 던진 북벌원정의 내용에선 연의에선 5차례 북벌감행이라고 설명한 내용과는 다르게, 2번의 북벌을 감행했지요.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연의와 정사와의 설명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4. 화웅의 목을 벤 것은 관우가 아닌 손견이다.
관우가 자신의 위용을 만천하에 떨칠 수 있던 계기는 화웅과의 일기토였죠. 당시 의용병이던 유비군은 공손찬 휘하에서 지내면서 동탁 토벌전에 참가하게 되는데요. 여기서 맹장 화웅을 베기 위해 관우는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소”라는 명언을 남기고 순식간에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오죠. 뭐.. 그렇습니다, 삼국지연의에선 말이죠. 하지만 실제로 손견군은 동탁군을 대파하는 혁혁한 공을 세우며, 손견 본인은 직접 맹장 화웅의 목을 벤다고 전해집니다.
5. 여포는 무예만 출중한 것은 아니었다.
흔히들 삼국지 내에서 배신과 가장 어울리는 장수는 여포라고 많이 이야기하죠. 여포는 삼국지연의에선 당대 최고의 무장이라는 타이틀과 동시에 비운과 배신의 아이콘으로 비춰졌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무예로는 당해낼 자가 없었으며, 병법에도 출중하여 가히 초한의 항우와 대적할 만 하다’라는 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