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사 내용입니다
입력 : 2012.11.24 03:04 | 수정 : 2012.11.24 14:22
"부모님께 죄송합니다, 행복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는데…."
한국에 시집와 귀화, 부산 북구의 한 아파트에 사는 베트남 이주 여성 김모(27)씨. 23일 '세 모자의 마지막 편지'라는 제목의 유서를 거실 TV 받침대에 올려놓고, 오전 11시 20분쯤 딸(7), 아들(3)을 안고 18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쿵" 소리를 듣고 이들을 발견한 주민이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모두 숨진 상태였다.
경찰에 따르면 휴가 중인 남편 최모(47)씨가 부산 남구의 본가에서 지내다 이날 오전 북구 자택으로 들어온 뒤 얼마 되지 않아 사건이 발생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을 본 아내 김씨는 딸과 아들을 데리고 작은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남편은 뒤늦게 문을 열었지만 김씨가 베란다로 가서 두 자식을 안고 뛰어내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8년 전 베트남에서 건너와 결혼한 김씨는 1남1녀를 두고, 지난해에는 한국 국적과 이름을 취득했다. 하지만 가정불화로 지난 1월부터 이혼소송 중이었다.
숨진 김씨는 A4 용지 2장에 베트남어로 쓴 유서에서 "시집 식구들이 애들을 못 보게 한다. 애들이 없으면 살 의미가 없다"면서 "함께 죽어야 영원히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해 때리고, 돈 때문에 (자기와) 산다고 했다"면서 "행복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지만 오해가 심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베트남에 있던 김씨의 친정부모가 1년가량 김씨의 아파트 주변에 살다가 지난 10월 베트남으로 돌아가 마음이 더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씨의 유서 마지막 부분에는 "세 모자를 관 하나에 눕혀서 베트남 땅에 묻어달라"면서 "그동안 결혼해 함께 살아준 것만으로 남편을 용서한다"고 쓰여 있었다.
경찰은 "유서 내용에 나온 폭행 등의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1950-1970년대의 국제결혼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국에 주둔한 미군 병사 남성
과 한국인 여성의 결혼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미군 기지촌 주변에서 가정을 꾸려 생활하거나, 본국으로 귀환하는 가장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미국의 풋볼 영웅 하인즈 워드의 가족이 이 유형에 속합니다.
한국의 경제력이 신장된 1980년대 이후에는 외국인의 국내유입과 한국인의 해외
진출이 증가하였고, 그 과정에서 외국인 남성
전문직 종사자와 한국인 여성의 결혼이 새로운 유형으로 등장하였습니다.
1980년대 말, 이른바 북방정책을 통해 중국, 소련과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그 후 1990년대 초 국내에서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의 일환으로 국제결혼
을 추진하면서, 한국인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국제결혼이 증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1995년 한국정부가 외국인의 국내 방문을 엄격히 규제하면서, 한국에 들어와서 취업하기위한
방편으로 국제결혼을 택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1995년 이후 한국인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결혼 유형이 그 반대 유형보다 더 많아지게되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2002년 이후 국제결혼이 급증하고 있습니다.(이때부터 기하급수적으로 한-베가족이 늘어났습니다)
수많은 국제결혼중개업체들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80년 말부터 국내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인과 결혼한 사례도 발견됩니다.
그 유형은 한국인 여성과 외국인 남성의 국제결혼이 주류를 이룹니다.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며 농촌 사회는 모든 면에서 개발과 발전으로부터
배제 되어왔습니다. 농촌은 '도시에 빨려 들어 간'것입니다.
그렇게 빨려 들어 간 것은 돈과 젊은이들. '서울드림'을 쫓아 서울로 올라간 젊은이
들이 떠난 자리엔 고된 농사일과 부모를 봉양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의 60년대 수준을 면치 못하는 베트남 필리핀의 저개발 국가에는
그들을 가난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한국 남자와 결혼을 하면 경제적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결혼 중매자의 말을 듣고 여성은 무작정 짐을 싸 한국으로 왔습니다.
(대만이나 일본의 중매업체를 답습)
그들은 독일로 흘러 들어간 터키인이나 한국으로 온 이주노동자와 형태만 달랐지
내용면에서 크게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으로 날아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농촌 국제결혼 이외에도 충분히 국내에서 배우자를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여성을 찾는 한국 남자들이 늘고 있고,
이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국제결혼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권력의 불평등을 여전히 유지한 채로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국제결혼은 가부장적 세계관이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결혼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은 (노)총각들과 결혼생활에 실패한 재혼자
그리고 여러가지 장애를 안고 사는 분들이
'결혼은 해야 겠다'는 신념(?)과,
그것을 잽싸게 수요로 인식하고 계산기를 두드린 국제 결혼 중매 업소
(사실 국내 중매업체보다 벳남 현지 마담들이 고수익이 보장되기에
더 졸속적이고 매매혼적인 결혼 형태를 만들고 있다)
"잘살아보겠다, 가난에서 벗어나겠다"
빗나간 코리안 드림을 품고 대책없이 한국으로 들어온 베트남 여성의 이해관계가
빚어낸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첫댓글 제목이 난해합니다..
제3자가정의 복잡한,슬픈사건입니다만, 결혼후8년만에국적취득, 그리고 초청힘든 친정부모의 한국생활.--드문케이스..
빨리 안정을 찾으시면 좋겠네요
고향이 부산인지라 화명동에서 투신 했다니 씁슬하네요...덧붙여 신문에서는 아동이 있는 다문화 이혼율이 12프로인가 뉴스를 보도하더군요
가슴아픈 사연이네여.. 맘이 찹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