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선생(내가 32년전에 살았던 집과의 거리는 직선으로 300m, 마국에서 최초의 사망자가 된다.)
선생은 외국인들과 접촉이 잦았던 할아버지와 통역관의 아버지를 두었는데 1861년에 태어나 1891년에 사망을 했다.
해롤드 변씨의 영어연설에 의하면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자기의 가족들은 3족을 멸한다고 했으니 어쩌면 죄책감 콤프렉스 때문에 자살을 했을 가능성도 있단다.
1883년 미국으로 보낸 최초의 보빙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땅을 밟은 분이다.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변수와 그의 친한 친구들은 조국을 휩쓴 정치적 혼란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 분쟁에서 극도의 개량주의자로서의 편수의 행동으로 인해 관리들은 그를 배신자이자 한국 정부의 적으로 낙인찍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한 변수와 그의 친구들은 홍콩에서 훔친 돈을 사용하여 사랑하는 한국을 떠나야 했다.
변수의 가족은 운이 좋지 않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의 범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믿어진단다.
올해 6월은 메릴랜드 농업 대학 졸업 131주년이 되는 해다.
변수는 미국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 학생이며 수석졸업생으로 연설을 했기에 고국에서 매우 존경받는 인물인데 이 켈버드 가게가 영향력을 행사 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 맏딸도 5살에 도미하여 이 메릴랜드대학의 우등생이었고, 졸업식에서 대표선출에 6명이 참가를 했지만 키가 작고 동양인이어서 인지 탈락했다.
켈버트가게와 칼리지 스테이션.
졸업장속의 스펠은 'Su Penn'으로 되어 있다. 우측이 해롤드 변씨.
그의 졸업장이 칼버트가의 서랍속에서 발견이 되었는데 백년이 지난후 변수의 친인척을 찾으려다 해롤드 변을 만나서 두루마리통속에 든 졸업장을 기증하니 변씨는 다시 메릴랜드 대학에 기증을 했다.
대학안에는 변수 룸이 있어서 빌려주는데 64명의 걸상이 있고 전화선 스트린등이 있는데 8시간에 $320, 4시간에 190달러를 부가한다.
그의 정치적 인맥을 통해 변수는 1883년 최초의 한국 대사관 설립을 담당한 외교관 중 한 명으로 선택되었는데 그 결과 변수는 뉴욕에서 체스터 아더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까지 세계를 여행한 최초의 한국인 중 한 명이 되었다.
한국의 품습에 의해서 왕에게 절을 할적에는 마주보는 것이 아니고 옆을 향해서 등을 구부려야 하니 그렇게 했단다.
사절단중 보스는 소첩을 거느렸는데 아더 대통령이 넌지시 중국인 통역관에게 옆의 부인을 누구냐고 물었는데 첩을 소실이라고 할 당시로 보아서 ‘소실(小室)이니“스몰 룸(small room)이라 했다고 한승수 주미대사가 말했다.
‘미주한인100년사’를 2003년에 발간을 했는데 자금이 필요하니 나도 기금을 조금 보태었다.
내생각인데 학교앞에 위치한 켈버트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숙식을 재공받으며 돈을 모아서 학교에 다녔을것이고 사망후에도 이 가게에서 장례식과 묘지까지 그리고 비석까지 세워준 것을 보면 연관 신빙성이 있을 것 같다.
서재필 박사는 1864년에 태어나서 김옥균의 3일천하실패로 1885년 미국으로 망명 철도우체국장의 딸 가정교사로 들어갔다가 제자 뮤리엘 암스트롱과 열애 끝에 결혼 87세를 살았지만 변수선생은 1861년에 태어나서 1886년 미국으로 피신 생애 30년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