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저리 삭아보일 수 있는걸까....)
저번에 린다린다린다를 보고 배두나씨의 푼수 연기에 그만 반해버려서 그녀가 출연한 영화 두편을 비디오 가게에 가서 빌려 봤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하고 “고양이를 부탁해”(이하 곰, 고양이라고 지칭한다)라는 영화였는데 둘 다 동물과 관련된 매우 난잡한 이야기(수간물)를 다루고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둘다 청춘 영화로서 배두나의 젊은 시절(지금도 그렇게 늙은 건 아니지만)의 파릇파릇한 영상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지인이 추천하던 “곰”은 그렇게까지 맘에 들지는 않았다. 이나영이 출연한 아는여자에 비해서는 임팩트가 별로 강하지 않다고나 할까. “나의 하트에 작렬!”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결말 자체도 교훈성이 강하기 때문에 뭔가 도식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자기를 일편단심 바라보는 상대가 바로 운명의 그 남자라는 결론은 뭔가 상투적이고 도덕적인 느낌을 강하게 준다. 반면에 아는 여자의 결말은 교훈이나 도덕에서 탈주해버리는 아스트랄함에 굉장한 매력이다. 아는 여자라는 영화나 곰이나 젊은 생기발랄함과 엉뚱함이 묻어나오지만 아는 여자는 그것을 추진력으로 보는 이의 정신을 아득히 먼 차원으로 관광을 보내는 반면에 곰이라는 영화는 그러한 것을 처음에 내보이다가도 어느새 그런 생기발랄과 엉뚱함을 뒤집어 버려 현실적 차원의 교훈으로 탈각시켜버린다.
(로맨틱 추리물이라고 하지만 추리물로서의 극적 긴장감은 솔직히 조금 약하다)
(꺄우~~~~~~ 나영씨~~~~~+_+)
아는 여자와 같은 부류의 영화는 그 영화가 지니고 있는 현실의 판타지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용기와 통쾌함이 있다. 가령 동치성이 그의 여자친구와 본 영화 속 내용이 어느 순간부터 현실이 중첩되면서 현실과 가상의 구별을 전복시켜버리면서 자신의 욕망과 환상을 말 그대로 현실에 물질화시켜버린다든지 여자친구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떠올리며 타자가 땅볼로 흘린 공을 1루에 던지는 대신 관중석에 냅다 던져버리는 비상식적인 일을 해버린다든지 하는 것에서 느끼는 포스트모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그만 왈칵 울음을 터뜨리게 만든 영화... 사회주의의 인간성은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그 대안을 자본주의에서 찾을 수 있는가?)
물론 그러한 용기와 통쾌함은 환상과 현실과의 묘한 긴장을 미리 전제한 상태에서 가능한 일이다. 가령 “굿바이 레닌”과 같은 영화도 아는 여자와 같이 허구적 판타지를 대담하게 “끝까지” 밀고 나가는 부류의 영화이며 “아는 여자”가 주는 것과 비슷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사회주의 동독이 붕괴하고 서독에 흡수통일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위해 사회주의가 결국 승리하고 자본주의적 탐욕에 반하는 인간성이 결국에는 자유진영의 서독을 굴복시켜 반대로 동독에 흡수되었다는 설정의 가상을 끊임없이 그의 어머니 앞에 연출한다. 그것이 결국에는 동독의 영웅적 우주 비행사로 분장한 사람이 텔레비전에 출연하여(사실은 미리 어머니의 아들이 녹화하여 연출한 것을 텔레비전에 상영시킨 것이지만) 사회주의의 이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것이 형언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유는 바로 어머니 앞에 연출하는 그런 판타지 외부에 있는 (통일 직후에 동독으로 급속히 진출한) 맥도널드와 코카콜라 광고판과 같은 냉엄한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실패한 사회주의라는 현실에서 오히려 “사회주의”라는 이념 자체는 그것의 부재와 부정으로 경험되는 현실 속에서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성의 이념(내지는 판타지로서의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이념이란 애초에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써 그절대성이 체험된다는 헤겔의 역설적 명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판타지로서의 이념이란 애초에 현실과의 모순과 부조리라는 간극 속에서 그 절대성을 상기시킨다.
아는 여자에 등장하는 동치성이라는 남자도 투수로서는 이류이고 대개 외야수를 맡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야구 게임 자체를 깽판 놓을 수 있는 권능을 발휘하기도 하고 또 그가 그의 여친을 향해 달려갈 때 그가 보았던 영화에서처럼 그가 달려가는 방향의 전봇대들이 엄청난 스파크를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어디까지나 그의 환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가 그런 환상 속에서 그의 판타지를 밀고 나가는 동기는 그가 “암 말기”진단을 받았다든가 점에 있고 또한 그것이 애초에 오진이었다는 점이 나중에 밝혀진다는 점에 있다. 그러한 두가지 계기가 그의 삶을 완전히 망쳐놓았는데 그러한 부조리한 현실에 있기에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이념 내지는 판타지를 끝까지 추구하는 것이다. 부조리는 그의 유쾌발랄한 엉뚱한 짓의 원동력이 되며 그와 여친의 푼수같은 사랑의 추진력이 된다. 오히려 삶이 즐겁고 유쾌해지는 지점, 그들만의 이념과 판타지가 구현되는 지점은 바로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모순되고 보잘 것 없는 현실이다.
굳이 곰을 아는 여자와 동일선상에 놓자면 곰은 아는 여자가 도달한 그런 미학적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보잘 것 없는 현실에서 어떤 상승의 계기를 찾고자 노력하는 그녀의 환상 속에서 도서관 책에 씌여진 메모를 통해 그녀 자신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자 하는 남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좌절된다. 책에 씌여진 메모의 대상은 여주인공이 아닌 의외의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녀는 차선으로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던 어떤 지하철 기관사와 애인관계를 성립시킨다. 현실원칙 앞에서 쾌락원칙을 굴복시키는 이런 설정은 고작해 봤자 아기자기한 즐거움과 현실적 교훈만을 주며 어떤 승화나 카타르시스 내지는 판타지로의 상승이라는 극적인 요소가 없다.(반면에 아는 여자와 굿바이 레닌도 현실원칙 앞에서 쾌락원칙이 좌절하지만 새로운 길을 찾아 “승화”라는 운동을 꾀한다. 그때부터 환상과 판타지 내지는 이념은 단순히 가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어떤 미학적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어떤 예쁜 포장을 통해 미화시키며 어떤 가상을 덧씌우는 것이다.
(섹스 말고도 궁금한게 많다니... 더 과격하고 하드코어한 내용인가...하고 문득 생각해 버렸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한동안 난 이 영화를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혼동하곤 했다.)
고양이는 곰에 비해서 매우 재미있고 흥미롭게 봤다. 고양이는 아는 여자나 굿바이 레닌과는 다르게 온종일 조금은 칙칙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현실적 조건을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그녀들의 관계양상이나 그녀들의 결점마저도 리얼하게 드러낸다. 아는 여자나 곰과는 달리 고양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환상 속을 부유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녀들이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거나 야단법석을 떨며 노는 순간에도 그녀들의 모습에서 묘한 생활의 체취가 느껴진다. 이 영화는 꾸준히 하향곡선을 그린다. 그런 점은 어느 순간에 환상이 깨지며 현실을 깨우쳐주는 곰의 반전이나 끝없는 상승 곡선을 그리는 아는 여자나 굿바이 레닌과는 다르다. 영화 자체는 등장 인물들의 몰락의 과정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는 집을 잃고 부모를 잃고 누구는 가출하고 누구는 직장에서 뼈아픈 좌절을 겪고 누구는 해외로 떠나버리고... 그러나 이 영화는 앞서 영화의 미덕과 다른 차원의 미덕을 가진다.
(이하 고양이를 부탁해 편에서 계속...)
첫댓글 저와 여배우취향이매우비슷하시군여...음트트
맨 위에 부분에서 무라카미 류가 생각나는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