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한국 스포츠엔 '국제적인' 또는 '세계적인' 선수라는 평을 들었던 두 선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차범근, 그리고 또 하나가 강만수였습니다.
'아시아의 거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던 강만수는 신장 196에 95킬로그램의 거구로서, 고등학교 때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향후 10여년 동안 대한민국 대표팀을 이끌어온 레프트 공격수입니다. 20대 초중반 당시의 활약상이 동영상으로 남아있지 않은 점이 매우 안타까운데, 그래도 선수 말년인 80년대 영상이 약간은 방송국에 보관되어 있어서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강만수는 20대 초반에 서전트 점프 85~90 센티를 뛰며 체육관 안이 쩌렁쩌렁 울릴 만한 강 스파이크를 꽂아대던 선수입니다. 장신 블라커가 많은 국제경기에선 시간차 공격이나 툭 밀어넣는 연타 등도 섞어서 쓰곤 했지만, 국내 경기나 아시아 팀들과의 경기에선 그냥 대놓고 후려갈기던(?) 선수였기도 합니다.
강만수 선수의 스파이크를 막아본 선수들은 다 한결같이 말합니다. "다들 해볼 만 하다고 생각하고 블락 시도를 한다. 그리고 한두 번 블락 시도를 해본 다음에 큰 후회를 한다. 손이 너무 너무 아파서..." 라고.
그는 오픈공격에 백어택, 그리고 상대 허를 찌르는 연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격에 능했습니다. 높은 점프에서 날리는 육중한 스파이크는 마치 굉음을 내듯 코트에 내려 꽂혔고, 코트에 내려 꽂힌 볼은 체육관 천장이 낮다고 할 정도로 높이 솟아오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천둥 소리가 난다고 표현했고, 강만수의 스파이크에 블로킹을 하는 상대 선수들의 손가락이 부러진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배구 팬들이 90년대 내내 가졌던 나까가이치에 대한 두려움을 일본의 배구 팬들이 70년대 내내 갖고 살게 만들었던 선수가 강만수입니다. 특히 일본 여성팬들이 많았는데, 당시에 강만수를 ‘강사마’라 부르며 한국까지 원정 응원을 오곤 했죠. 이 가운데 일본 영화배우인 구로다 후쿠미는 가장 열렬한 팬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1983년 일본에서 처음 만나 “한국에 이런 멋있는 남자가 있는 줄 몰랐다”며 이때부터 강만수 팬이 된 구로다 후쿠미는 그 뒤 한국말을 적극적으로 배우면서 ‘서울의 달인’이라는 관광가이드북을 내는 등 스스로 ‘한국병이 걸렸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아래 영상은 강만수가 30을 넘기며 본격적으로 노쇠화에 들어간 후의 플레이들입니다.
1. 위력적인 백어택
점프 높이가 많이 낮아진 상태였지만, 공의 스피드와 파괴력은 여전합니다.
강만수의 경기는 체육관에 가서 직접 보아야 제격이란 말이 있죠. 공 때리는 소리가 어마무시하게 컸거든요. 직관하면 귀가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젼 중계로 보면 그 소리가 제대로 안 나왔어요. 저는 지금까지도 강만수의 공 때리는 굉음 수준의 스파이크 소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2. 블라킹 보며 반 박자 빠르게 찍어내리기
묵직한 바윗덩어리 하나 날라오는 느낌?
때리는 순간, 손목스냅 좀 보십시오.
3. 블라킹 맞혀서 쳐내기
나이를 먹었으니 저런 플레이도 한 것이지, 젊었을 때는 저러지도 않았습니다.
4. 개인 시간차 공격
세계적인 세터 김호철과의 호흡
5. 디깅에 이은 백어택
1984년 LA 올림픽 아시아 예선전을 참관한 당시 소련(현 러시아) 팀 감독은 “저만큼 모든 조건을 갖춘 공격수는 보지 못했다. 동양에도 저런 선수가 있다는 게 놀랍다”며 감탄 했습니다. 세계 남자 배구를 주름잡던 알렉산드로 사빈(구 소련)과 어깨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도 내렸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모든 조건을 갖춘 선수’라는 대목이죠. 즉 강만수가 최고의 왼쪽 공격수로 명성을 떨쳤지만 이에 못지않게 오른쪽 공격이나 수비 실력도 뛰어났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리베로가 있지만 그 때는 공격과 수비를 모두 해야 했고, 강만수는 공격과 수비, 그야말로 배구에 관한 한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만능선수였습니다.
6. 우승을 결정지은 백어택
강만수의 뒤를 이어 강두태, 장윤창, 하종화, 마낙길, 김세진, 신진식, 이경수, 문성민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많은 거포들이 탄생했는데, 어느 한 시기만을 놓고 본다면 강만수에 필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선수 생활 전체를 통틀어 그에 비교할 만한 선수는 없다고 봅니다.
@리오타 동의합니다.
@리오타 솔직히 전 제일 아쉬운 선수가 양진웅입니다. 진짜 한양대 입학 직후에는 우리나라도 정말 제대로된 2미터 거포를 가지는 줄 알았는데... 어째 그때가 고점이었던거 같아요 지금에 와서 보면
@라떼 양진웅 아까운 선수였는데, 나중에 구본왕이라는 200 레프트가 나왔을 때, 아 양진웅이 정말 잘하는 거였구나 하고 느꼈죠. 맨발 202의 아시아 선수가 그정도의 몸놀림이 가능하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중국에도 엄청난 선수가 있었어요. 그 당시에 아시아 선수권대회였는데 유대라는 중국 선수가 205센치였는데 붕붕 날아다녔죠. 그 대회는 건강했던 이상렬이 멱살잡고 우리나라를 결승까지 끌고 갔었습니다. 당시 결승전 이전까지 이상렬 선수의 공격 성공률이 70%에 가까울 정도로 슈퍼맨이었죠. 이상렬 선수의 공에 맞고 실려가고 그랬던 대회였죠.
결승을 중국하고 해서 졌는데. 중국 블로킹이 대놓고 이상렬만 쫒아 다니는 바람에 받쳐줄 선수가 없던 우리나라가 패했습니다.
이상렬을 제외하고 멤버가 너무 약했죠. 이상렬 보공이 190의 이재필이었는데 타점이 낮아서 다 막히고,, 하여튼 이상렬이 준우승 만들어줬죠.
@라떼 아 저도 양진웅 참 좋아하던 선수인데 2미터가 넘는 선수인데도 진짜 잘 뛰었죠. 2m 넘는 선수중 윙스파이커로 그 정도로 잘 뛰는 선수는 그 후 김요한 정도였다고 생가합니다. (김세진은 198cm) 아쉽게 다른 사람보다 배구를 늦게 시작해서 센스가 조금 부족하고 수비도 다른 레전드 선수들에 비해 약했죠. 전 양진웅을 응원하다가 박종찬에게 3연속 블로킹 셧아웃 되는 것을 보고 놀란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박종찬은 제가 봤던 선수 중 최고의 블로킹 도사였어요.
이경수 선수가 생각나네요.
그래서 선수생활 내내 '제 2의 강만수' 소리를 들으며 뛰었죠. 포텐셜은 분명 그 정도 급이었는데, 거기서 한두 단계 더 치고 올라가질 못해서 항상 아쉬웠던 선수죠.
이경수는 중학교때는 농구의 현주엽일 정도로 기대가 컸었고 스포츠면의 전면을 장식할 정도의 유망주였는데 일단 키가 중학교 이후로 크지 않았고, 점프가 평범했 습니다. 대신 윙스팬이 좋았고 공수를 겸비한 만능 선수였죠.기대만큼 커주지 못했습니다. 잘 봐주면 정지섭의 상위 호화 버전이랄까요.
@Doctor J 대학시절 상위학년땐
이경수는 똥볼도 힘으로 스파이크 때려서 블로커 아웃 시키는 그런 힘 좋은 공격수이고 완전 용병급..
5세트땐 세터가 거의 이경수한테 볼 올리면 거의 다 성공시켰죠 대학시절 국대 주전도 했었고
왜 lg화재로 갔는지 의문입니다.
@리오타 정지섭이라면 대한항공 정지석 말씀하시는거죠? 제 소견으론 정지석 보단 이경수죠 ㅎ
와 제가 배구 처음 본 게 징윤창 하종화 마낙길 선수 활약하던 때 였는데 강만수 선수는 감독으로만 봐서 몰랐는데 ㅎㄷㄷ 했군요.
중국팀의 에이스가 왕가위(192)라는 중앙공격수인데 중국에서는 아시아 최고 공격수 2명에 꼭 강만수와 왕가위를 놓더군요. 굉장히 빠르고 점프도 준수했고 가름마도 단정했던 선수였지만 강만수에 비빌 선수는 아니었죠. 강만수는 소련의 사빈과 같은 급의 선수로 세계 배구계가 인정한 선수인데 말입니다. 그때부터 중국의 숟가락 얹기는 시작되지 않았나 싶네요
@리오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오타 왕가위는 신문기사와 중계진들 사이에서만 전설이었던 선수죠. 과대평가의 교과서적인 선수.
개인 시간차의 달인 정의탁. 비운의 천재 마낙길. 카리스마 노진수. 재치 만점의 서남원. 공수겸장 강성형. 엄청난 스파이크 서브의 이성희. 고독한 에이스 최천식 등등 기억에 남는 선수들 많네요 정말. 누나와 함께 장충체육관 밥먹듯 드나들었었는데.. 추억은 방울방울.
그 해 2개의 주니어급 대회 블로킹 1위가 우리나라 선수였습니다. 한명은 방신봉,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홍익대의 구준회 선수였죠. 정말 깜놀했습니다. 당시에 명지대는 김성채라고 점프스타일이 독특했던 선수가 하드캐리했구요.
당시에는 중국과의 경기보다 일본과의 대결이 정말 재미있었죠. 요즘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1960.70년대 까지 여자 배구는 일본이 짱 먹었던 시절이었죠.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이 일본이었을 겁니다. 우리나라가 남배 여배 모두 일본에 15연패 하다가, 강만수의 국대가 남녀 통틀어 처음으로 일본을 이겼고, 그 이후 여배 국대도 일본에 첫승을 올렸죠. 일본이 배구를 국가적으로 육성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시간차 공격도 일본이 가장 먼저 개발했구요.
80년대 중후반의 말년의 모습만 봤지만, 포스가 정말 남달랐고, 혼자 다른 차원에서 플레이하는 느낌이었죠. 한국 배구의 GOAT라 봅니다.
강만수의 당시 위상은 김연경이었습니다. 국대에서 다 망가지고 국내에 현대차 복귀할 때 지금은 김연경처럼 화재가 됐었죠. 신생팀이 단번에 우승후보로 부각됐습니다. 당시 현대차의 에이스는 키 186 의 경기대 출신 김형태 였죠. 이선수도 당시 스카웃 파동이 일 정도로 좋은 선수였죠.
이경수선수가너무아쉽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선수가될줄알았는데ㅜ
뭔가 최전성기에 돌입하려던 순간에 스카우트 파동이 찬물을 끼얹었던 것 같아요. 강만수 이후 가장 많이 그의 향기가 느껴지던 선수였는데, 참 아쉽습니다.
@Doctor J ㅜㅜ 맞습니다
진짜 와 이게 신진식이후로 시원한선수가드디어나왔구나했는데말이죠ㅜ
저는 고려증권 팬이었고
정의탁의 팬이었는데
정의탁의 개인시간차가 참 일품이었죠...
체공력을 활용한 특유의 시간차 공격..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흔치않던 백어택 하는 센터공격수..
그리고 이재필도 좋아했구요
190에 점프도 낮은데 펀치력으로 모든걸 커버했던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