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동안의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년, 로마 공화정이 카르타고와 싸움)이 끝나고 갈리아 전쟁이 다시 시작되자 로마는 또다시 괴로움에 빠졌다. 이탈리아의 산간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인수브리아인들은 자기들만으로도 강하였으나 다른 갈리아인 중에서 가이사타이족 용병을 얻어 로마로 쳐들어오려는 것이었다.
이 갈리아 전쟁이 포에니 전쟁과 동시에 터지지 않은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갈리아인들은 포에니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마치 자기네들은 전쟁에 이기는 자를 공격하겠다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조용히 중립을 지키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공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포에니 전쟁은 이미 끝난 뒤였지만 로마인들은 오래 전부터 갈리아군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찍이 갈리아인에게 로마를 빼앗긴 일이(기원전 390년 갈리아족의 부족장 브렌누스가 로마를 공격해 함락시킨 사건) 있었으므로 다른 어떤 종족보다 그들을 겁냈던 것이다. 그들의 두려움은 법률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원래 최고 사제는 모든 전쟁에서 면제되지만 갈리아인의 반란 때에는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이하 중략).
플라미니우스와 그의 동료가 집정관직에서 물러나자 인테렉세스, 즉 집정관 서리는 마르켈루스를 새 집정관으로 앉혔다. 그는 집정관에 취임하자 크나이우스 코르넬레우스를 동료로 지명했다. 이때 갈리아인들은 휴전을 제의했고 원로원도 휴전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민중의 사기를 복돋워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마르켈루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휴전이 성립되었지만, 가이사타이족이 곧 이것을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알프스 산을 넘어와서 인수브리아인(이탈리우 북부에 정착한 갈리아 부족)들을 선동하여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3만 명에 가까운 가이사타이인은 더 많은 인수브리아군과 합쳐져 포강 저편에 있는 도시 아케라이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브리토마르투스(가이사타이인의 왕)는 1만 명의 가이사타이군을 이끌고 포강 유역 일대를 마구 짓밟았다.
이 보고를 들은 마르켈루스는 보병대와 기병대의 3분의 1을 아케라이에 있는 동료에게 맡기고, 자신은 기병대의 나머지와 정예병 600명을 거느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은 채 강행군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도중에 클라스티디움이란 마을에 이르러서 드디어 1만 명의 가이사타이군과 마주쳤다. 이 마을은 얼마 전에 로마의 영토가 된 곳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마르켈루스는 부하들을 쉬게 하지 않았고 식사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마을에 있던 갈리아군은 마르켈루스의 보병 부대가 적은 것을 알고 그들을 얕잡아 보았다. 그들은 말타기에 능숙하여 세상에 당할 자가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숫자에 있어서도 마르켈루스군보다 우세했으므로 기병대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들은 왕을 선두로 하여 밀물같이 달려들었다. 로마군을 한꺼번에 짓밟고 위협하려는 듯한 기세였다.
(갈리아 기병들을 묘사한 삽화들)
출처: 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 1권 492~495쪽/ 현대지성사/ 이성규 번역
첫댓글 갈리아 전쟁이 포에니 전쟁과 동시에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군요 갈리아 남부지방 정도가 로마의 영향군에 있었으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