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 감독이 5월 23일 결혼한다는 기사를 봤다. 정말 축하해주고 싶다. 하지만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기사로 알게 되는 것보다는 그전에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게 좋다. 하지만 내 잘못이다. 그를 늘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가 이런 내용을 나에게 먼저 알릴 수 있게 술도 자주 사지 못한 것이다. 5월의 신부가 될 사람은 장진 감독보다 10살 연하다. S여대 디자인 계열을 졸업하고 현재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2년전 영화 스텝으로 처음 만난 후 자주 만나다가 결혼까지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장진의 시대는 끝났다. 배우보다 더 멋있게 잘생긴 꽃미남인 그는, 대학로와 충무로의 노총각들에게 관심을 갖는 여성들의 1순위 후보였다. 한 여자의 남자가 되었으니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나는 그를 만나자마자 결혼 축하부터 했다. 그런데 그는 와인 한 병을 내게 선물했다. 오자다(ORZADA) 카르멘네레 2004 빈티지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비싼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칠레의 최상급 프리미엄 와인 중의 하나다. 오자다 카르멘네레 2004는 독일에서 열린 와인대회에서 톱 3에 랭킹되었고 제 4회 칠레 와인 어워드에서 베스트 카르멘네레 와인으로 선정되었다. 오자다는 배의 방향키를 나타내는 스페인어다. 노르웨이의 선주였던 오드펠에 의해 20년 전에 설립된 오드펠사는 까다로운 품질 관리로 유명하다.
그를 만나기로 했을 때 미리 결혼선물을 들고 왔어야 했는데 나는 미안했고 고마웠다. 덥썩 그의 선물을 받아버렸다. 청첩장을 달라고 하자 지금 인쇄 중이라고 했다. 5월 23일이면 수요일이다. 왜 평일 저녁에 결혼식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다음 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 휴일이고 평일 저녁이 결혼식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폐를 덜 끼칠 것 같아서 그렇게 정했다고 했다.
장진 감독의 [아들]은 5월 1일 개봉했다. 같은 날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스파이더맨 3]가 개봉했다. 3억달러 그러니까 2800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와 19억원으로 만든 영화가 맞붙는 것이다. 결과는 예상대로 [스파이더맨3]의 완승이다. 개봉일 하루에만 50만 2천명을 동원하며 역대 최고의 오프닝 스코어인 [괴물]의 44만 9천명의 기록을 깨버렸다. 그렇다고 [아들]의 흥행이 아주 저조한 것은 아니다. 맥스무비에서는 [스파이더맨3]가 67%, 2위인 [아들]이 20%대의 예매율을 보이고 있고 다른 예매 사이트에서도 [아들]은 2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예매율은 [스파이더맨3]와 큰 차이가 난다. 그러나 만약 개봉 시기가 조절됐다면 더 좋은 결과를 낳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장진 감독의 [아들]은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대중친화적인 작품이다.
11년 전, 그가 서울예대 연극학과 학생이었을 때, 나는 그 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강의하고 있었다. 그해 그는 학교 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예창작과 학생이 아닌 다른 과 학생이 수상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그리고 1995년 1월 1일 아침 신문에서 나는, 신춘문예 당선된 그의 희곡 [천호동 구사거리]를 읽었다.
사실 장진은 그 이전 TV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할리웃 통신이라는 걸 진행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분명히 한강의 고수부지인데 바바리를 입고 등장해서 시치미 딱 떼고 L.A의 가을은 서늘하다며 방금 줄리아 로버츠를 만나고 왔다고 사기를 치고 있었다. 전혀 엉뚱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웃음을 유발시키는 일종의 상황 코미디였다.
데뷔 이후 그는 대본 작가로 그리고 출연자로 일했던 TV와, 연출자로 일했던 연극을 오가며 활동 했었다. TV의 영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그가 단편영화를 찍었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장편 영화 감독이 되어 시사회를 한다고 연락이 왔다. 장진의 영화감독 데뷔작 [기막힌 사내들]은 그러나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그것뿐이 아니다. 그 다음 작품 [간첩 리철진][킬러들의 수다] 그리고 지난 해 [아는 여자]까지 그의 영화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작품은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모두 장진 영화라고 부를만한 독특한 개성으로 포장되어 있다. [기막힌 사내들]에서는 아무도 주인공으로 쓰지 않는 최종원 등의 중년 배우들을 등장시켜 뮤지컬 형식이나 미술관 퍼포먼스 등을 도입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고, [간첩 리철진]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뒤집으며 어리숙한 간첩이라는 설정으로 웃음을 유발했다. [킬러들의 수다]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원빈이 가슴 저리게 사랑 고백을 하는데 그의 형들은 킥킥 웃음을 참는 장면이다. 이런 상황의 부조화야말로 장진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부산영화제 기간 중 부산 영평상 시상식에서 나는 사회자로 장진을 만났다. 그 이전 장진 사단이 제작한 [화성으로 간 사나이]를 너무 호되게 비평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게 편치 않았다. 그런데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당연한 비판이었다고 나를 마음 편하게 했다. 그리고 [웰컴 투 동막골] 시사회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그 이전 몇 번 그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 서운하다고 했더니 그는 내 핸드폰에 저장된 그의 번호를 보더니 구석기 시대의 번호라는 것이다. 핸드폰 번호를 바꾼 지 오래되었다며 다시 새로운 번호를 불러주었다.
일주일 뒤 [박수칠 때 떠나라] 시사회가 있었고 나는 며칠 뒤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박수칠 때 떠나라]에 대한 불만부터 털어놓았다. 미모의 여자 카피라이터가 호텔방에서 칼에 찔려 발견된 살인사건을 수사해 가는 미스테리 수사극이지만, 그것이 동시에 TV쇼로 제작되어 생중계된다는 설정이 장진스러운 영화였다. 그러나 생방송 TV쇼라는 설정은 처음뿐이고 전체를 관장하며 주제의 깊이를 전달하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하지는 못했다. [트루먼쇼]에서와 같은 미디어에 대한 비판도 없고, 관음증이나 훔쳐보기 같은 본능적 유혹이 깊이 있게 탐색된 것도 아니었다.
[편집하면서 생방송 쇼 부분을 많이 잘랐다. 방송 코드를 너무 희화해서 풀었고 물리적 시간으로도 미스테리에 투입해야 했다. 후반부의 진중한 드라마가 보호 받으려면 쇼를 절제해야했다. 그래서 수사를 방송으로 생중계하고 그것을 시청자가 보고 있다는 것은 설정으로만 두자. 방송이 더 들어가서 수사에 관여하는 것은, 대중들이 상업적 소비적 취향과 만나는 것인데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보편적 관념을 뒤집는 신선한 발상, 전혀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독특함은 그 누구보다 탁월하다. 장진은 분명히 한국 문화계의 보물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신선함의 강박증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장진이다. 일부러 엉뚱하고 새롭게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는 장진 영화의 엉뚱한 상황, 기막힌 설정 그 자체가 장진이다. 내 불만은, 이렇게 희귀한 재능을 가진 장진 작품이 항상 소재의 신선함에 주제의 깊이가 치인다는 것이다.
그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연극이나 영화로 분리해서 각본을 쓴다. 연극은, 정극의 맛보다는 마당극처럼 떠들썩하게 확장시키거나 아니면 무언어 연극으로 간다.
[내 다른 연극을 더 이상 영화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번만 더 했다가는 아이디어 다 되었구나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박수는 연극할 때부터 영화적 발상이었고, 웰컴은 영화적으로 먼저 기획했던 줄거리다.]
감독들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나 역시 원래 배우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캐스팅 제의를 은근히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내가 에드워드 올비의 2인극 [동물원 이야기]에서 제리 역을 했었다고 하자, 장진 역시 대학시절 제리 역을 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의 인간 소외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동물원 이야기]의 제리 역은 상당한 연기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무려 10여분동안 혼자 하는 긴 대사도 있다. 우리는 마음이 맞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마흔 넘어서 상업영화 하는 것은 힘들 것 같다. 극단적인 자본주의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대중들과 치열하게 부딪쳐야 하는데, 내 시작이 순수문학 쪽이다 보니까 계속 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가 회개를 더 늦게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이런 고백은 [웰컴 투 동막골]과 [박수칠 때 떠나라]의 거대한 성공으로 상당기간 늦춰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