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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사람들〉과 〈숲의 사람들〉의 차이(差異)는 뭘까?
2019년 04월 09일
교수신문
‘옥저’의 후예라 주장하는 '어원커족' 연구서 출간
양도웅 / 승인 2018.11.14. 00:18
동북아역사재단 북방사연구소 『숲속의 사람들 어원커족』 출간
“어원커족은 아직도 그들의 기원이 어디인지, 그들의 조상이 지나온 숲은 얼마나 많았는지, 얼마의 세월을 순록을 벗삼아 살아왔는지, 풀리지 않은 문제로 가득 찬 신비학 민족이다.” - 『숲속의 사람들 어원커족』, 「머리말」에서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 북방사연구소가 옥저의 후예라 주장하는 어원커족을 분석한 『숲속의 사람들 어원커족』을 출간했다.
현재 중국은 다양한 민족이 공존했던 중국 동북지역을 한족 중심의 역사로 재구성하는 시도를 해오고 있다. 이런 상화에서 현대 한국인과 친연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된 퉁구스족의 문화는 점점 사라지는 실정이다.
이런 문제의식 하에 동북아역사재단 북방사연구소는 ‘동북아 민족문화 비교연구’ 사업의 일환으로 중국 내 퉁구스족 가운데 전통문화를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는 3개 민족을 선정해 3년간 연구를 진행하며 매년 연구서를 발간해왔다. 이번 신간은 퉁구스족을 연구한 2016년 『최후의 수렵민, 어룬춘족』, 2017년 『아무르강의 어렵민, 허저족』에 이어 세 번째로 출간한 동북아 민족문화 비교연구서다.
* 퉁구스(Tungusic)
- 17세기 러시아 학자들에 의해 등장한 민족 개념으로, 현재는 중국 동북지역 민족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음
- 한국인은 언어학적으로 퉁구스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알려졌지만, 한국인과 퉁구스족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부족한 상황
어원커족(중국명 鄂溫克)은 중국 헤이룽장성(흑룡강성) 서부와 내몽골 동부에 거주한다. 17세기경 러시아 학자들에 의해 최초로 ‘퉁구스’라 불린 민족이며, 러시아에서는 중국과 달리 어룬춘족과 어원커족을 ‘에벵키’라 해 하나의 민족으로 본다.
이번 연구서 발간을 위해 연구팀은 지난해 8월 어원커 지역을 현지답사하고, 어원커족 3대 지계(퉁구스‧야쿠트‧쒀룬)를 모두 돌아봤다. 연구팀은 한국과 중국의 민속학‧종교학‧민족학‧복식사‧건축사 전문가 8인으로 구성됐으며, 이번 연구서는 그 연구 활동의 결과물이다.
총 13장으로 구성된 이번 연구서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국학자들이 주로 물질문화를, 중국학자들이 정신문화를 연구‧저술했다.
(중략)
특히, 다른 어원커족 문화 가운데 우리 문화와 유사성 높은 문화가 있어 주목을 요한다. 신랑이 혼인 전 처가에 머무는 서옥제, 형이 일찍 사망했을 시 형수와 결혼하는 형사취수제는 고구려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인의 창고인 부경은 어원커족의 고상식 창고인 카오라바오와 같은 형식이다.
또한, 샤먼의 자격과 수련 과정, 의례 등은 한국 샤머니즘과 비교할 때 공통점과 차이점이 모두 발견돼 향후 비교연구가 필요할 전망이다. 어원커족의 곰 신화는 자연히 고조선의 단군신화를 떠올리게 하며, 특히 어원커족의 바터얼쌍 신화는 공주의 곰나루 설화와 같은 내용으로 보인다. 이 내용은 아직 비교연구가 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다.
연구팀은 “우리가 어원커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어원커족 스스로 자신들이 옥저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존에 알려진 어원커족의 기원은 ‘바이칼호설’이 유력했으나 1980년대 ‘옥저설’이 등장하면서, 현재 어원커족박물관에는 두 가지 설이 나란히 소개돼 있다. 서기 280년 고구려가 옥저를 공격했을 때, 서쪽으로 이주한 난민의 후예가 말갈 7부 중 안거골부(安居骨部)를 이뤘고, 그 후예가 어원커족이라는 것이다.
연구 책임을 맡은 김인희 동북아역사재단 북방사연구소 연구위원은 “폐쇄된 환경에서 장기간 자신의 문화를 유지한 어원커족은 한국의 고대문화를 복원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번 연구서가 한국 고대문화 연구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북방사연구소는 3년간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한민족과 퉁구스족 문화의 비교연구』를 2019년에 발간할 예정이다. 양도웅 기자 doh0328@kyosu.net
- 문무(文武)의 조선사(朝鮮史)해설(解說) -
어원커족(鄂溫克)은, 스스로 〈숲속의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서달(西㺚)은 서(西)몽골(蒙古)의 오이라트(Oirat)를 가리키는데, 오이라트(몽골어: ойрад, ойрд, 영어: Oirat)는 몽골의 서부에 존재했던 옛 부족이다. "숲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들 어원커족(鄂溫克)과 서달자(西㺚子)와의 관계(關係)가 더 밀접한 것이 아닐까?
숲속의 사람들, 그리고 숲의 사람들? 무엇이 다를까? 같은 이야기다. 2018년 04월 20일 게재 글을 참고 해 보기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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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西㺚)과 조선(朝鮮)의 변방지대(邊方地帶)
종족(種族)·부족(部族)을 아는 것은, 역사연구(歷史硏究)의 기초(基礎)
2018년 04월 20일
○ 고려(高麗)의 왕씨왕조(王氏王朝)를 무너뜨리고 조선(朝鮮)의 이씨왕조(李氏王朝)를 건국(建國)시킨 이성계(李成桂)는 과연(果然) 어떤 종족(種族)출신(出身)일까?
【왕씨왕조(王氏王朝) 또는 이씨왕조(李氏王朝)라고 표현(表現)한 것은, 오늘의 글속에서 이해(理解)를 돕기 위한 것으로, 어떤 다른 이유(理由)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誤解)없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카페에서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에 대한 많은 해석(解釋)과 그에 대한 해설(解說)을 한 바 있다.
그가 본시(本是) 조선인(朝鮮人)【통칭(統稱)】이었든, 여진계(女眞系)였든, 아니면 여진계(女眞系)몽고인(蒙古人)이었든 간에, 그는 몽고인(蒙古人)으로써, 수대(數代)에 걸쳐 ‘몽고(蒙古)=원(元)’의 관료(官僚)를 지냈다. 그러나 원(元)나라가 피폐해지고, 망(亡)하게 되자 고려(高麗)로 귀화(歸化)한 자(者)라는 사실(事實)은 변할 수 없다.
【참고(參考) / 필자(筆者) 주(注) (1) / 우리 카페(Cafe)에 많은 글을 게재(揭載)해 주시고 있는 “아심심”님의 주장(主張)에 의하면 “이(李)”는 “오얏 이(리)”자(字)로 바로 “오이라트(Oirat)=달자(㺚子)=달자(韃子)”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성계(李成桂)는, 곧 “오이라트(Oirat)=달자(㺚子)=달자(韃子)=달단(韃靼)” 출신(出身)이란 이야기다.】
큰 틀에서 보면 모두 옛 조선(朝鮮)의 일원(一員)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백성(百姓)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으로 세분(細分)한다면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가문(家門)의 수대(數代)의 묘지(墓地)가 달단동(韃靼洞)에 있었다는 사실(事實)은, 그가 몽고인(蒙古人)으로써 살았다는 것을 증명(證明)해 주는 일이다. 그의 선조(先朝)들이 달단동(韃靼洞)에 묻혔고, 그곳에서 호족(豪族)노릇을 했다면 그 가문은 여진계(女眞系) 몽고인(蒙古人)이란 가능성(可能性)이 크다.
우리가 오늘날 보고 있는 이들의 가계(家系)는 정말 사실(史實)일까? 〈철저(徹底)하게 확실(確實)하게 신분(身分)세탁(洗濯)을 거쳤을 것이다.〉라고 추측(推測)할 수 있다.
○ 조선사(朝鮮史)에서 달단(韃靼)이 거론(擧論)되고, 또 서달(西㺚)이란 종족(種族) 또는 부족(部族)이 등장(登場)하는데, 이들은 조선(朝鮮)의 서변(西邊)과 서북(西北) 및 북변(北邊)에서 노략질 하고, 때로는 의탁(依託)하고, 토벌(討伐)당하고를 반복(反復)했다.
그 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누구냐? 하는 것과 조선(朝鮮) 영토(領土)의 변방(邊方)은 어디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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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西㺚)은, 어디에 있던, 누굴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조선(朝鮮)의 변방(邊方)지대(地帶)는?
(1) ‘역사통설(歷史通說)’인 우리 학계(學界)에서는 :〈서달(西㺚)은 서쪽 달단(韃靼)이라는 뜻이고, 용어(用語)상으로는 몽골의 서부(西部)를 가리킨다.〉고 하고, 〈서달(西㺚)은 곧 서달자(西㺚子)를 말한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 위의 설명(說明)대로라면 : 조선사(朝鮮史)의 왕조실록(王朝實錄)이나 유학자(儒學者)들의 문집(文集), 기타(其他) 각종(各種) 사서(史書)속에 등장(登場)하는「서달(西㺚)」은 곧 “서달자(西㺚子)를 뜻하고, 이들은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에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역사통설(歷史通說)의 설명(說明)대로라면 :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없었다는 말과 같다.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에 있는 자(者)들이 일만(一萬)리 동(東)쪽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 소란(騷亂)을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 지들이 말하기를, 〈서달(西㺚)은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지방에 있었다.〉고 해 놓고는… …그런데도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 들은 : 〈반도(半島) 북방에 서달(西㺚)이 있었고, 그 남(南)쪽 땅에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있었다.〉고 막무가내(莫無可奈)로, 이해(理解)할 수 없는, 이야기만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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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서달(西㺚)은 서(西)몽골의 오이라트(Oirat)를 가리키는데, 오이라트(몽골어: ойрад, ойрд, 영어: Oirat)는 몽골의 서부에 존재했던 옛 부족이다. "숲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라고 말한다.
➠ 위 설명(說明) 역시(亦是),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와 당노산맥(唐努山脈), 알타이(Altai)산맥(山脈)과 ‘알타이(Altai)산=금산(金山)’과 러시아(Russia) 땅의 산림지대(山林地帶)에 살고 있었던 옛 종족(種族) 또는 부족(部族)을 뜻한다.〉고 하였다.
덧붙이기를 : 영조(英祖)때에 오이라트(Oirat) 준가르(準喝爾) 제국과 관련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청(淸) 황제(皇帝)가 심양(瀋陽)을 순수(巡守)할 때에, 서달(西㺚)이 시기를 틈타 난을 일으킨 사건을 「의주부윤(義州府尹)이 조정(朝廷)에 보고한 기록(記錄)이 있다」고 하였다.
위 설명(說明)을 보면 :〈의주부윤(義州府尹)은 당시(當時)의 정세를 상세(詳細)하게 조정(朝廷)에 보고(報告)한 것이다.〉그렇다면 당시(當時)의 청(淸) 황제(皇帝)가 심양(瀋陽)을 방문(訪問)할 때 “서달(西㺚)”이 난(亂)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의주부윤(義州府尹)이 조정(朝廷)에 보고를 했다는 것이니, 서달(西㺚)은 조선(朝鮮)의 변방(邊方)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 위의 본문(本文) 글 (1)+(2)등에서 보면 : 〈“서달(西㺚)”은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 땅에 있었던 자(者)들이라고 했으니, 이곳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 땅이, 당시(當時)의 조선(朝鮮) 변방(邊方)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내용(內容)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재주로 일만(一萬)리 동(東)쪽의 압록강(鴨綠江) 남안(南岸)의 청사(廳舍)에 있던 ‘의주부윤(義州府尹)’이 그 정세(情勢)를 상세(詳細)하게 알 수 있었겠는가!
【참고(參考) / 필자(筆者) 주(注) (2) /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 땅이란 이야기는, 21세기(世紀) 오늘날의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이야기일 뿐으로, 본래(本來)의 몽고(蒙古) 땅은 오늘날의 ‘몽골(蒙古)’ 땅이 될 수 없다. 그 서(西)쪽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동구라파(東歐羅巴)·우랄(Ural)산맥 서(西)쪽” 땅이라면 가능(可能)한 이야기다.】
조선사(朝鮮史)는, 신(神)이나 신선(神仙)들의 이야기가 아닌, 상식(常識)이 통하는 인간(人間) 무리들의 삶의 이야기가 일 뿐이다.
【참고(參考) / 필자(筆者) 주(注) (3) / 이들 스스로 “옥저(沃沮)의 후예(後裔)”라고 한다면, 이들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서 이동(移動), 이주(移住)한 부족(部族)일 수밖에 없다. 여인국(女人國)에 관한 정보(情報)는 모두 옥저(沃沮)로부터 나왔는데, 여인국(女人國)은, 오늘날의 총령(葱嶺) 서(西)쪽인 카스피해(Caspi海=裏海)와 흑해(黑海)사이의 있었기 때문에, 옥저(沃沮) 역시(亦是) 이 주변(周邊)을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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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단(西靼) : 영조실록(英祖實錄)14년 / 무오(1738) 2월 14일(병신) :〈서단(西靼)들이 살고 있는 곳은 연경(燕京)과의 거리가 거의 1만여 리나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 주석(注釋)에서 말하기를, 「서단(西靼)은 곧 서달자(西㺚子)이다」라고 하였다. 【判尹金始炯曰:西靼所居之地,距燕京幾萬餘里. : 판윤 김시형(金始炯)은 아뢰기를 : ‘서단(西靼)들이 살고 있는 곳은 연경(燕京)과의 거리가 「거의 1만여(萬餘) 리」나 됩니다.’하였다.】
➠「서단(西靼)은 곧 서달자(西㺚子)」를 말한다. 옳은 말이다. 달단(韃靼)은 이미 깨지고, 무너지고, 망(亡)하고, 여중(餘衆)들은 청(淸)과 조선(朝鮮)에 이미 복속(服屬)되었으므로 달단(韃靼)이니 달자(㺚子)니, 달달(達達)이니 하는 명칭(名稱)을 사용(使用)치 않았으나, 이들 무리 중 일부(一部)가 깊은 산이나 외진 곳으로 스며들어 서(西)쪽 땅 한 모퉁이에서 보존(保存)하였는데, 잠시 흥성(興盛)하여 노략질을 함에, 이들을 가리켜 서달(西㺚)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연경(燕京)은 곧 북경(北京)〉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으로부터 약 1만 리(萬里) 쯤 떨어진 곳에 ‘서단(西靼)=서달(西㺚)’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연경(燕京)으로부터 일만(一萬)리라면 어디쯤이 될까?
구글-어스를 돌려보자. 〈 ⓐ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발하슈 호(Balkhash湖) 주변까지 약 3,500 km 정도이고, ⓑ 키르기스스탄(Kyrgyzstan) 이식쿨 호(Issyk-kul 湖)까지 약 3,300 km 가 되며, ⓒ 파키스탄(Pakistan)의 이슬라마바드(Islamabad)까지는 약 3,900 km 정도가 된다. 또 ⓓ 러시아(Russia)의 옴스크까지 약 3,600 km〉 정도를 나타내는데,
가장 근접(近接)하고,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땅과 조선(朝鮮)의 변방(邊方)까지를 생각해 보면 : ⓐ번의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발하슈 호(Balkhash湖) 서(西)쪽과 서북(西北)일대가 이들의 거점지(據點地)였다〉고 볼 수 있다.
◆ 만약(萬若)에 말이다. 위 기록(記錄)에서 말하는 ‘연경(燕京)=북경(北京)’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이 아닌 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이나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아스타나(Astana) 또는 카라간다(Karaganda) 쯤이 된다고 한다면, 그곳으로부터 ‘일만(一萬)리’라면 「발칸(Balkan)반도(半島)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는 동(東)구라파(歐羅巴)인들이 바로 서달(西㺚)이 된다.」는 사실(事實)이다.
이게 역사(歷史)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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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종실록(景宗實錄) 2권, 경종 즉위년 9월 13일 丁丑 (1720년 청 강희(康熙) 59년) / 《丁丑.告訃使李頤命等抵瀋陽,以沿路所聞馳啓曰 : 고부사(告訃使) 이이명(李頤命) 등이 심양(瀋陽)에 다다라 연로(沿路)의 소문을 치계(馳啓)하기를, 淸主尙在熱河,太子事,依舊無他聞.燕中地震,屋宇頹陷,人多壓死. : 청(淸)나라 임금은 아직 열하(熱河)에 있고, 태자(太子)에 관한 일은 예전과 같으며 다른 소문은 없습니다. 그리고 연경(燕京) 지방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가옥이 무너지고 압사(壓死)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西征之兵,屯戌多年,西㺚遠遁,不得交戰,病死相續云. : 서정(西征)한 군병들은 주둔(駐屯)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서달(西㺚)이 멀리 도망쳐 교전(交戰)은 하지 못했고, 병사자(病死者)가 속출(續出)한다 합니다." 하였다.》
➠ 위의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보면 :〈서정(西征) 곧 서(西)쪽을 정벌(征伐)한다고 했으니, 당시(當時)의 “서달(西㺚)”은 청(淸)나라 서(西)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달(西㺚)이니 서달자(西㺚子)니, 서단(西靼)이라고 하는 자(者)들은, 반도(半島) 땅이나, 그 북(北)쪽 만주(滿洲) 땅에서 활동(活動)한 적이 없는, 대륙(大陸) 땅의 서(西)쪽 땅에서 청(淸)나라를 괴롭힌 부족(部族)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자(者)들【서달(西㺚)】이,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고 주장(主張)하는 무리들은, 조선사(朝鮮史)를 얼마나 더 나락(那落)으로 떨어뜨리려 하는지…조선사(朝鮮史)를 아예 말살(抹殺)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렇게 철저(徹底)하게 한 나라의 역사(歷史)를 말살(抹殺)하려는 의도(意圖)는, 조선사(朝鮮史)가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여기에 장단(長短)을 맞추고 박수(拍手)치는 군상(群像)들 이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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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북원록(北轅錄) 제5권 / 1761년(영조37, 신사) 6일(병자) 맑다. : [주-D108] 서달(西㺚) : ‘해서달자(海西㺚子)’로 만주(滿洲)의 송화강(松花江) 중상류에 사는 여진족을 말한다.
서달(西㺚) / 고전번역원(古典飜譯院)DB / 북원록(北轅錄) 주석(注釋) :〈‘해서달자(海西㺚子)’로 만주(滿洲)의 송화강(松花江) 중상류에 사는 여진족을 말한다.〉고 하였다.
➠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만주(滿洲)니 송화강(松花江)”등은,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의 땅을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동서(同書) DB’에서도 : 〈서달(西㺚)은 외몽고 서부(西部)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왕조실록(王朝實錄)에서도 똑같은 곳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만주(滿洲)니, 송화강(松花江)이니, 또는 두만강(豆滿江)이니 하는 땅 이름(地名)이나 강(江) 이름 등은, 위의 설명(說明)에 따른다면 :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 땅에서 찾아야 될 일이다.
또 여기에서 말하는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가 어디냐?〉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외몽골 서부(西部) 땅인가, 아니면 옛 몽고(蒙古)의 서부(西部) 땅을 말하는 건가?” 이게 또 중요(重要)한 문제(問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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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광해군(光海君) 13년 신유(1621) 6월 1일(신미) /《傳曰:西㺚逼遼陽,此說不虛.西㺚又拔瀋陽,則此賊不無充斥東路之患,昌,義兩處堅守,江邊譏察等事,另加議處,言于備邊司. : 전교하시기를 : 서달(西㺚)이 요양을 핍박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은 허황된 말이 아닐 것이다. 서달(西㺚)족이 다시 심양(瀋陽)을 함락시킨다면 이 적들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가득 메우게 될 염려도 없지 않으니 창성(昌城)과 의주(義州) 두 곳을 굳게 지키고 강가를 기찰하는 등의 일을 별도로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라.》하였다.
➠ 위의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보면 : 당시(當時)의 서달(西㺚)은, ‘요양(遼陽)을 핍박(逼迫)하고 있다’고 하였다. 요양(遼陽)은 심양(瀋陽)의 서(西)쪽에 있으므로 「동진(東進)하여 심양(瀋陽)을 점령하고 나면, 동(東)쪽으로 진군(進軍)하게 될 가능성(可能性)이 많으니, 압록강(鴨綠江)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반도조선(半島朝鮮)에서 바라보면 :〈서달(西㺚)은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에 있었다.〉고 하고, 〈청(淸)나라에서도 서정(西征)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자(者)들이 무슨 재주로 북경(北京)의 동(東)쪽 지방인 요양(遼陽)을 핍박(逼迫)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며, 불가능(不可能)한 사건(事件)이다.
그러나 이런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를 왕조실록(王朝實錄)에 기록(記錄)했을 리 없다는 것으로 보면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을 명백(明白)하게 나타내는 것이고, 이는 중국(中國)이 바로 조선(朝鮮)이었음을 증거(證據)해 주고 있는 기록(記錄)이다. 따라서
‘연경(燕京)=북경(北京)’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에 없었다.
만주(滿洲)는, 오늘날의 반도(半島) 북방(北方) 땅이 아니다.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존재(存在)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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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조(仁祖) 3년 을축(1625) 6월 22일(무술) / 《戊戌/平安道監司李尙吉馳啓曰: 卽見義州府尹李莞所報,則都司徐景栢參將易承惠等,領軍兵,捕獲眞,假㺚二百餘名出來, 而眞㺚言 : 평안도 감사 이상길(李尙吉)이 치계하기를 : 의주부윤(義州府尹) 이완(李莞)의 보고를 보니, 도사(都司) 서경백(徐景柏)과 참장(參將) 역승혜(易承惠) 등이 군병을 거느리고 진달(眞㺚)ㆍ가달(假㺚) 2백여 명을 포획해 왔는데, 진달이 말하기를, 奴酋於六月初八日,率兵來到遼東城,與西㺚連和,使其第四子,領兵三千餘名入去,而今至月餘,尙不還歸.蓋似見賣於西㺚,而未能的知,云. : 노추(奴酋)가 6월 8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성(遼東城)에 이르러 서달(西㺚)과 더불어 연합하여 화목하게 지낼 것을 약속하고, 그 넷째 아들로 하여금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들어가게 하였는데, 지금 1개월이 되도록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 서달(西㺚)에게 속은 듯한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하였습니다.》하였다.
인조 3년 을축(1625) 12월 10일(갑신) / 《平安監司尹暄馳啓曰:假㺚出來,近日益甚,或凍死,或飢死.問其出來之由,則皆言:奴兵大擧西向,與西㺚相戰,無暇東顧,故因此出來云. :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였다. : 가달(假㺚)이 요즈음 더욱 빈번하게 나오는데, 얼어 죽기도 하고 굶어 죽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까닭을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 노병(奴兵)이 대거 서쪽을 향해 가서 서달(西㺚)과 서로 싸우느라 동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에 이 틈을 타서 나온다하였습니다. 大槪彼賊已動之說,處處假㺚,一樣言說.賊謀難測,或不無聲西走東之患.臣日夜嚴飭,以備不虞,云. : 대체로 적들이 이미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곳곳의 가달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으나, 적들의 계략은 헤아리기 어려워 혹 서쪽을 친다고 하면서 동쪽을 공격해 올 근심도 없지 않기에 신이 밤낮으로 엄하게 단속하며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습니다하였다.》
➠ 가달(假㺚)이니, 진달(眞㺚)이니, 서달(西㺚)이니…가짜 달단(韃靼)이요, 진짜 달단(韃靼)이며, 서쪽의 달자(㺚子)…이 모두는 서달(西㺚)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妥當)하다.
위의 왕조실록(王朝實錄)에서 중요(重要)한 대목은 : 〈노추(奴酋) 곧 후금(後金)이다. 당시에 노추(奴酋) 곧 ‘노이합적(努爾哈赤 : 애신각라(愛新覺羅))’이 서달(西㺚)들과 싸우느라 대거(大擧) 서(西)쪽으로 간 바람에, 서달(西㺚)과 연합(聯合)하지 않은 가달(假㺚)이나 진달(眞㺚)등이 굶어 죽게 생기자, 조선(朝鮮) 변방(邊方)으로 와 의탁(依託)하게 된 이유(理由)를 조정(朝廷)에 보고(報告)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이다. 서달(西㺚)이란 자들은 누누이 말하기를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에 있던 자(者)들〉이라고 설명(說明)하였다. 본인(本人)이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료(史料)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말이다.
당시(當時)의 누루하치(努爾哈赤=愛新覺羅)는 오늘날의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없었다는 말이고,
조선왕조(朝鮮王朝) 역시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이야기고,
서달(西㺚)은 서방(西方)에 있었고, 노추(奴酋) 역시 서달(西㺚)과 근접(近接)한 곳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證明)된다. 따라서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이, 청(淸)나라 황성(皇城)이었다는 이야기는 조작(造作)된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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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숙종실록(肅宗實錄) 11년 4월 2일 辛卯 (1685년 청 강희(康熙) 24년) : 《謝恩使南九萬等,回自燕.上引見,問燕中情形. : 사은사(謝恩使) 남구만(南九萬) 등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서, 연경의 정세를 물었다. 九萬曰:聞大鼻㺚子謀反,其勢甚盛.淸人方欲興師往征,悉發山西,山東,廣西,廣東兵數十餘萬,勒取戰馬於民間,以是大起民怨. : 남구만이 답하기를 : 들으니, 대비달자(大鼻㺚子)가 모반(謀反)하여, 그 형세가 매우 성하기에 청(淸)나라 사람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가서 정벌(征伐)하고자 하여, 산서(山西)와 산동(山東)과 광서(廣西)와 광동(廣東)의 군사를 수십 여만을 다 징발(徵發)하였고, 전마(戰馬)를 민간에서 강제로 취하므로 백성들의 원망을 크게 일으킨다 합니다. 且聞有魚皮㺚子者,介在大鼻㺚子之間,皮物之貢,皆從此出,而自大鼻㺚鴟張,路梗不復貢,淸主憤之,必欲盡滅乃已云矣. : 또 들으니, ➠어피달자(魚皮㺚子)가 하는 것이 대비 달자와의 사이에 끼어 있어서, 피물(皮物)의 공납(貢納)이 다 이들에게서 나왔는데, 대비 달자가 강성해지면서 부터는 길이 막혀서 다시 공납하지 아니하기에, 청(淸)나라 임금이 이를 분하게 여기어 반드시 그들을 다 멸망(滅亡)시키고야 말겠다고 합니다하니, 上曰:曾聞太極㺚子,亦頗崛强,今果何如? : 임금이 말하기를 : 일찍이 들으니 태극달자(太極㺚子)도 꽤 강성하다 한다. 지금은 과연 어떠하냐? 九萬曰:上年春,西㺚率數萬騎,諉以入貢,馳到關外,淸人只許以數千騎入朝. : 남구만이 말하기를 : 지난해 봄에 서달(西㺚)이 수만의 기병(騎兵)을 인솔하고서는 들어와서 조공(朝貢)하겠다고 핑계하며 관(關) 밖에까지 달려왔으나, 청나라 사람이 수천 기(騎)만 데리고 들어와 조공하기를 허락하였습니다. 且欲誇示軍威,大張兵於城外,西㺚大笑曰:此不足多,吾何畏哉云矣. : 그리고 또 군위(軍威)를 과시(誇示)하고자 하여 군사들을 성 밖에 크게 진열시켰습니다. 서달(西㺚)이 이를 보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 이것은 많다고 할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리오하였다고 합니다.》하였다.
➠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어피달자(魚皮㺚子)는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위의 글에서 보다시피 〈어피달자(魚皮㺚子)가 하는 일이 대비달자(大鼻㺚子)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하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 1년 계해(1623) 4월 16일(을해) : 《元翼曰:魚皮㺚子事,則以非我族類,恐有後患答之,似爲便當. : 원익이 말하기를 : 어피달자(魚皮㺚子)의 일에 대해서는 ‘우리의 족속(族屬)이 아니라서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고 답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하였다하였으니, 어피달자(魚皮㺚子)는 족속(族屬) 곧 종족(種族)이 달랐다는 뜻이다.
연행기사(燕行記事)【이조판서(吏曹判書) 이갑(李𡊠) 1,777-1778년의 연행기록】[잡기(雜記)] 문견잡기(聞見雜記) 하(下) :《大鼻㺚子.卽鄂羅斯.蒙古之別種.國在於沙漠外絶遠之地. : 대비달자(大鼻韃子)는 곧 아라사(鄂羅斯)인데, 몽고(蒙古)의 별종(別種)으로 나라가 사막(沙漠) 바깥 지극히 먼 땅에 있다. 其人身長.軀殼壯健.狀貌極凶悍獰惡.眼碧顴高.鼻隆如拳.紫髥鬱密.中略. : 그들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健壯)하여 상모가 극히 흉한(凶悍) 영악(獰惡)하다. 눈은 푸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가 주먹같이 높고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났다. 중략(中略). 蓋蒙及㺚子.蠢頑凶醜.全是禽獸.而㺚子尤倍之. : 대개 몽고(蒙古)와 달자(㺚子)는 미련스럽고 흉추(凶醜)하여 금수(禽獸)와 같은데 달자(㺚子)는 배나 더하다.》고 하였다.
➠ 위의 글에서 설명(說明)하는 종족(種族)의 특징(特徵)을 보자. 〈대비달자(大鼻㺚子)는, 사막(沙漠)의 바깥 먼 곳에 산다. 키가 크고 몸이 건장(健壯)하여, 상모가 극히 흉한(凶悍) 영악(獰惡)하다. 눈은 푸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가 주먹같이 높고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났다.〉고 하였다.
이런 신체적(身體的) 특징(特徵)을 가지고 있는 자(者)들은 누군가? 이들은 곧 현재(現在)의 ‘우랄(Ural)산맥(山脈)’ 동서(東西)에 살고 있는 러시아(Russia)를 포함(包含)한 그 주변에 살고 있었던 자(者)들이다.
〈대비달자(大鼻㺚子)와 어피달자(魚皮㺚子)는 근접(近接)하고 있었는데, 대비달자(大鼻㺚子)가 강성(强盛)해지는 바람에 어피달자(魚皮㺚子)가 청(淸)에게 보내는 공물(貢物)을 방해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자(者)들이 반도(半島) 두만강(豆滿江)이북(以北)에 있었다고…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주장(主張)을 할 수 있겠는가?
➠ 또한 〈서달(西㺚) 역시 청(淸)나라의 서(西)쪽에 있었다.〉는 것을 위의 본문(本門)에서 알려주는 내용(內容)이다. 여기서 중요(重要)한 대목이 있다. 곧
◈ 인조실록(仁祖實錄) 1년 계해(1623) 4월 23일(임오) / 상이 모문룡(毛文龍)의 차관(差官) 시가달(時可達)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접견하였다. 《上曰:所謂魚皮,何地方耶?差官曰:魚皮㺚子,在中國東北,所謂忽溫也. : 상(上)이 이르기를 : 소위 어피(魚皮)란 어느 지역을 말하는 것이오? 하니, 차관이 말하기를 : 어피달자(魚皮㺚子)는 중국(中國) 동북부(東北部)에 있는 이른바 홀온(忽溫)입니다하였다. 上曰:忽溫盡爲降附於奴賊,未知有餘存者乎? : 상이 이르기를 : 홀온(忽溫)은 모조리 노적(奴賊)에게 항복하여 귀부했는데, 남은 자들이 있는지 모르겠소이다하니, 差官曰:忽溫雖降附奴賊,而餘種數十餘戶,合屯一處,願爲歸附,故欲招集行計於虜中矣. : 차관이 말하기를 : 홀온(忽溫)이 노적에게 항복하여 귀부하긴 했지만 남은 종족 수십여 호가, 한 곳에 모여 둔치고는, 우리에게 귀부하고 싶어 하기에, 그들을 불러 모아 오랑캐 내부에서 계책을 행해 볼까 합니다.》하였는데,
➊ 어피달자(魚皮㺚子) :〈중국(中國)의 동북부(東北部)에 있다〉고 하였고, 이들이 바로 「홀온(忽溫)」이라고 하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 36년 계묘(1603) 12월 22일(계묘) : 《備邊司啓曰:忽溫之賊,累次衝突,去秋來犯鍾城,今者又犯柔遠,移屯於穩城江邊,搜索藩胡,其勢鴟張,誠非細慮. : 비변사가 아뢰기를 : 홀온(忽溫)의 적들이, 여러 번 충돌해 오는 중에, 지난 가을에는 종성(鍾城)을 침범하였고 이번에는 또 유원(柔遠)을 침범하여 온성(穩城)의 강가에 옮겨 둔치고는, 번호(藩胡)를 찾는데, 그 세력이 치성하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하였다.
이러한 왕조실록(王朝實錄)의 기록(記錄)으로 보면 :「어피달자(魚皮㺚子) 곧 홀온(忽溫)은 두만강(豆滿江) 북안(北岸) 또는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곧 “어피달자(魚皮㺚子)는 조선(朝鮮)영토(嶺土)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문제(問題)는,
➋〈대비달자(大鼻㺚子)와 어피달자(魚皮㺚子)가 근접(近接)하고 있었으며, 청(淸)이 대비달자(大鼻㺚子)를 정복(征服)하려 했고, 서달(西㺚)은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에 있었다.〉하였으니, 서달(西㺚)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 〈준갈이(準喝爾)를 중심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지대(地帶)〉라 할 수 있다.
또 「준갈이(準喝爾)와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 등지(等地)가 바로 조선(朝鮮)의 변방지대(邊方地帶)」였음도 밝혀지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問題)는〈이곳이 ‘중국(中國)의 동북(東北)’지방〉이라고 한 것이다.
중국(中國)은 행성(行星)안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일까? 아니면 지들 중심(中心)의 역사(歷史)에서 “중국(中國)”은 여러 곳에 존재(存在)할 수 있을까? 이 차이(差異)다.
〈“중국(中國)의 동북(東北)”지방에 ‘어피달자(魚皮㺚子)=홀온(忽溫)’가 있다.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은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 땅이다.〉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 땅이 중국(中國)의 동북(東北)지방이라면,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 땅에서 서남(西南)지방에 중국(中國)이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위의 왕조실록(王朝實錄)에서 말하는 중국(中國)은 : 당시(當時)의 중국(中國)은, 이곳으로부터 서남(西南)쪽 수천(數千)리 먼 곳에 있어야 한다. 지도(地圖)를 펴 놓고 보면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남부(南部) 이란(Iran)과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정도가 정도(定度)가 된다.
이곳의 중국(中國)은, 〈고대(古代)이래(以來)로 진단(震旦)은, 곧 중국(中國)이다.〉라는 설명(說明)과는 배치(背馳)된다.
※ 위의 '펌 글'은 ' 우리 카페에 게재된 '서달자'와 직접적(直接的)으로 관계(關係)된 내용(內容)이라 생각되어, “2018년 04월 20일 게재”편을 함께 올렸습니다. (끝). / 2019년 04월 09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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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놀라운 사실들입니다
하루빨리 이런 사실들이 체계적으로정리되서 온 국민 나아가 전세계가 알 수 있게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