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비가오는 15일. 몸은 아프지만 답사는 계속된다.
비석을 보면서 새겨진 명문도 보고 새겨진 시대도 본다.
묘도 보면서 풍수와 인물을 생각하여 본다.
묘지를 답사를 하다보면 대부분 흥미를 잃어 재미 없다고 한다. 비석도 마찬가지다......재미 없다고 하지만
모두다 사람에 관한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하는 것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인데
재미 위주로 답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본다.
각각의 재미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 공부다.
광명에 있는 정원용 묘는 대로변에 있으며, 광명역에서 그리 멀지 않다. 다만 대형 버스 주차하기가 곤란하다.
정원용은 영의정을 역임하는데 그 아들도 정승에 오른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정석증(鄭錫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계순(鄭啓淳)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정동만(鄭東晩)이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이숭우(李崇祐)의 딸이다. 예조판서 김계락(金啓樂)의 사위로, 이조판서 정기세(鄭基世), 목사 정기년(鄭基年), 부사 정기명(鄭基命) 등의 아들을 두었다.
묘를 보면 석물이 거의 없다. 망주석과 묘비 그리고 상석이 전부이다.
그 흔한 문인석 조차 없다.
묘비를 보니 당대의 학자이고 글씨의 대가인 윤순이 보인다.
이광사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선후기의 대단한 서학자의 흔적이 보인다.
윤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글씨의 대가로 시문과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양명학을 연구하여 시정 개혁을 주장했다.
본관은 해평.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白下)·학음(鶴陰)·나계(蘿溪)·만옹(漫翁). 두수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지평 세희(世喜)이며, 어머니는 승지 이동규(李同揆)의 딸이다.
1712년(숙종 38)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에 등용되었다. 1723년(경종 3) 응교로 사은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7년 이조참판으로 대제학을 겸임하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감호제군사(監護諸軍使)가 되었으며, 1729년 공조판서·예조판서를 지냈다. 1735년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1739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741년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순찰 도중 벽동에서 죽었다.
조선시대 양명학의 태두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으로 양명학에 심취했으며, 정제두의 제문(祭文)을 써서 양명학이 치양지의 심학임을 지적했다. 그는 〈잡식 雜識〉이라는 글에서 산림(山林) 선비들의 타락상을 개탄하고 이를 당쟁 때문이라고 규정했으며, 당시 북벌을 주장하던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의 허위성을 폭로했다. 양명학을 기반으로 실학파와 제휴하여 실심(實心)·실견(實見)·실득(實得)·실정(實政)을 강조하고, 시정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는 등 노론에 대항할 이론을 제공했다.
답사를 하면서 그헌 흔적을 찾아 낸 것이다.
손자인 정범조의 흔적도 보인다.
정원용의 부친 인 정동만은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정원용의 아들과 손자는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아들인 정기세는 충청도 암행어사를 하고 부여에 철비가 남았다.
그리고 손자인 정범조는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여 전주 감명에 선정비가 있다.
그리고 정원용은 관찰사 선정비와 양산에도 그의 비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학자인 정인보 선생이 정원용의 증손이다.
4대가 대단한 인물들이다.....
3대가 번성하지만 4대가 번성하기란 어려운데 정원용의 후손들은 그것을 해 내었다.
1802년(순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예문관검열·홍문관부응교·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냈다. 1821년 서북 지방에 괴질이 크게 번져 10여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민심이 흉흉하게 되자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83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중추부판사가 되었다가 1848년 영의정이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원용 무덤은 단순하면서 포근한 느낌이 드는 묘지이고 풍수상으로는 조안산이 아름답게 되었다.
정우너용의 묘가 광명에 있는 이유는 말년을 여기에서 보냈기 때문이며, 향 우측에는 그의 부친인 정동만의 묘가 있다.
묘를 보면 옴팍 들어가게 되어 있어 포근함이 느껴지는 풍수상의 자리이다.
묘자르 답사 하다보면 산 정상 부근에 있는 것과 산 아래 있는 묘가 즐비 하지만 풍수상의 길지는
놀은 곳이 아니고 낮으면서 아늑함이 느껴지는 곳이 좋다고 본다.
울산에 멀리 광명까지 답사를 가니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지금 연구하고 있는 영의정지낸 사람을 찾다보니 갔다
온 것이다.
답사지는 멀어도 보고 싶은 것은 참지 못하니 먼 걸음을 한것이다.
이제 시작되는 영의정에 대한 연구는 세 발걸음을 옮겨 본다.
옥산 이 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