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스토리(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 네이버밴드(으)로 기사보내기바로가기 기사스크랩하기 다른 공유 찾기본문 글씨 줄이기가본문 글씨 키우기
“밤하늘에서 은하수 폭포 쏟아지니 마음 맑게 하네”
서울에서는 드문 670년의 역사를 지닌 정릉 봉국사. 신덕왕후을 모신 정릉의 원찰이다. 사진은 봉국사 전경. 가운데 전각이 만월보전이다.
고려 공민왕 나옹선사 창건
서울에선 드문 ‘670년 寺史’
신덕왕후 모신 ‘정릉’ 원찰
한양 도성 혜화문 밖 자리
서울 정릉 북쪽에 자리한 봉국사(奉國寺)는 고려 공민왕 3년(1354)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창건했다. 조선 태조 4년(1395)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세웠다는 설화도 전하지만,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공민왕 3년 창건설이 더 합당하다”면서 “적어도 조선 초기에 사찰 규모가 갖춰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나라를 받드는 절’ 봉국사는 약사여래를 봉안해, 예로부터 ‘약사사’ 또는 ‘약사절’이라고도 불리며 중생의 귀의처가 되어왔다. <편집자>
추석이 지났지만 좀처럼 가을이 오지 않고 있다. 무더위와 폭우가 이상기후를 실감나게 한다. 조선 후기 문신 윤기(尹愭, 1741~1826)는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정릉 봉국사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쓴 3편의 시를 <무명자집(無名子集)>에 싣고 있다. ‘積雨初霽(적우초제) 爲看瀑布(위간폭포) 出惠化門(출혜화문) 行至貞陵遇雨(행지정릉우우) 入奉國寺(입봉국사) 得三絶(득삼절)’이란 다소 긴 제목이다. ‘장마가 그쳐 폭포를 구경하려고 혜화문을 나서 정릉에 이르렀을 때 비를 만나 봉국사에 들어가서 절구 3수’라는 의미이다.
20대 후반의 청년 윤기가 영조 45년(1769) 여름에 지은 작품으로 255년 전 봉국사 정경을 생생하게 담았다. 첫 절구엔 ‘忽然山雨急(홀연산우급) 送我入琳宮(송아입림궁)’이라며 봉국사에 온 까닭을 설명한다. 별안간 ‘산 비[山雨]’가 쏟아져, 임궁(琳宮)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임궁은 ‘도교 사원’이지만 봉국사를 의미한다. 이어진 절구는 비가 그친 뒤 봉국사 안팎의 정취를 묘사했다. “雨過雲吐月(우과운토월) 山靜樹橫煙(산정수횡연) 寂寂群囂息(적적군효식) 惟聞百丈泉(유문백장천)” “비 지나자 구름이 달을 드러내고, 산은 고요하고 숲 안개 지나네, 고요하고 고요하니 중생의 소리도 쉬고, 백 길 되는 시내 소리만 들리네” 비 그치고 구름에 가린 달이 나타난 하늘을 잘 묘사했다. 한양도성 혜화문 밖 삼각산 자락에 자리한 봉국사와 주변 숲이 비는 그치고 안개만 지날 뿐 고요했다. 너무 적적하고 조용하다는 대목은, 사바세계의 시끄러운 소리[번뇌]가 멈추고, 폭우로 불어난 계곡 소리만 들리는 상황을 상징한다.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는 봉국사 목조석가모니불상. 만월보전에 봉안돼 있다.
만월보전 목조석가모니불상
티베트형 육계, Ω형 옷주름
1500년대 이전 조성 분명해
문화유산 가치가 매우 높아
봉국사 만월보전(滿月寶殿)에는 약사여래가 본존불로 모셔져 있고,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석가모니불이 협시하고 있다. 석조로 조성된 약사여래는 원만하고 넉넉한 상호(相好), 그리고 자비로운 미소가 ‘만월보전’의 ‘만월(滿月, 보름달)’과 잘 어울린다. 달은 부처님 가르침을 상징한다.
만월보전의 석가모니불상은 조선 초기 조성된 성보이자 문화유산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무로 조성된 석가모니불상은 일반 사찰의 불상과 다른 특징을 보인다. ‘뾰족하면서 원통형으로 되어 있는 육계(肉髻)’가 대표적이다. 나발(螺髮)이 촘촘히 박힌 불두(佛頭)와 높이 올라간 원통형 육계 위에는 금색보주(金色寶珠)가 올려져 있다. 조선 초기 티베트계 명나라 양식 계열에 속하는 불상 특징을 잘 보여준다. 불상 머리와 육계 높이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도 주목된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석가모니불상의 불의(佛衣)로, 상의(上衣) 없이 대의(大衣)를 변형통견의(變形通肩衣)로 입고 있다. 오른쪽 어깨를 팔꿈치 이상까지 덮어 끝을 주름지게 하고 있으며 왼쪽 팔에 Ω형 옷주름을 하고 있다. 고려 이후 조선 전기까지 유행한 형식이다.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은 “원통형 불두와 왼팔 팔꿈치 위의 Ω형 주름은 조선 초기 불상의 트레이드 마크”라면서 “특히 Ω형 주름은 고려 후반부터 나타난 4대 특징 가운데 하나로 조선 초기까지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1500년 전후의 불상으로 매우 희귀한 성보이며 문화유산이다.
봉국사는 나옹선사 창건설에 따르면 올해가 670년, 무학대사 창건설에 따르면 내년에 630년을 맞이한다. 조선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 서울(한양 인근)에 창건된 사찰이 매우 드문 상황에서 봉국사의 사사(寺史)는 의미가 크다. 봉국사를 원찰로 하고 있는 정릉(貞陵)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묘소이다. 신덕왕후는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아들인 무안대군(이방번)과 의안대군(이방석)을 잃었다. 하나 뿐인 딸, 경순공주는 남편이 희생되어 비구니 스님이 되었다. 봉국사가 왕실, 사대부, 백성 모두에게 의지처라는 점에서 갈등과 대립이 증폭되는 현대 사회에 주는 메시지가 남다르다.
태조는 신덕황후가 세상을 떠나고 취현방(지금의 영국대사관 근처)에 정릉을 조성했다. 사대문 밖이 아니라 궁궐 앞에 묘소를 마련했을 만큼 신덕왕후를 각별히 아꼈던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무상한 것, 태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태종 9년(1409) 도성 밖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봉국사는 세조 14년(1468) 중건하고, 현종 10년(1669) 정릉을 단장하면서 흥천사와 함께 원찰(願刹)이 되었다. ‘나라를 받드는 절’이라는 뜻의 사명(寺名)으로 바뀐 것도 이때이다.
이익의 학풍을 계승한 조선 후기 문신 윤기의 문집 . ‘봉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 실렸다.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은 윤기는 250여년 전 봉국사의 ‘밤하늘’을 이렇게 노래했다. “今朝東嶽色(금조동악색) 明日槽溪聲(명일조계성) 九天銀瀑景(구천은폭경) 先向意中淸(선향의중청)” “아침에 동악(東嶽)의 산 빛을 보았네, 내일은 조계(槽溪)의 물소리 듣겠네, 하늘 높은 곳에서 은하수 폭포 쏟아지니, 벌써 내 마음 맑게 하는구나” 동악은 정릉과 봉국사가 있는 삼각산을 지칭하고 있으며, 조계는 정릉과 삼각산의 중간, 우이동 계곡의 한 부분을 가리킨다. 서울 경기 권역에서는 보기 드문 폭포로 많은 이들이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찾았다. 지금은 절 앞에 내부순환도로가 지나고 있어 아쉽지만, 그래도 탁 트인 눈에 경치가 들어온다.
한편 <순조실록>에는 포항 보경사를 봉국사의 속사(屬寺)로 정한 기록이 나온다. 순조 13년(1813) 3월 28일(음력)의 일이다. “본릉(정릉) 제향 때 두부를 만들고 향반(香盤)을 마련하는 등의 일은 신흥사[지금의 흥천사]와 봉국사가 돌아가며 거행하고 있다”면서 “그런데 봉국사는 스님들이 쇠잔하여, 청하현[지금의 포항] 보경사를 속사로 정하고, 승역(僧役)을 면해 주소서”라고 청해,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
한편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정릉 봉국사를 기록한 시가 다수 전해온다. 윤택규(尹宅逵, 1845~1928) <설봉문집(雪峰文集)>의 ‘봉국사’, 김인섭(金麟燮, 1827~1903) <단계선생문집(端溪先生文集)의 ‘제(題)봉국사칠성각’, ‘유신흥봉국양사(遊新興奉國兩寺)’ 등이 그것이다. 이와 더불어 지장삼존상 및 시왕상(十王像), 아미타괘불도(1892), 지장시왕도(1885) 등의 성보문화재도 ‘나라를 받드는 절’ 봉국사를 여법하게 장엄하고 있다.
600여 년을 이어온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원력을 계승한 봉국사는 1979년 주지 현근스님이 사찰 토지 100평에 ‘봉국노인정’을 마련해 어르신들의 쉼터로 삼은 적이 있다. 지난 2019년 현근스님이 30년 만에 다시 주지로 부임한 후에도 사회복지재단 수해 피해 구호금 전달, 성북구 관내 11개 경로당 수박 보시, 성북구 따뜻한겨울나기 성금 희사, 불교도 대법회 성공개최 기원 기금 기탁 등 다양한 자비행을 펼치고 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3839호/2024년10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