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오천유적지 조감도, 침락정은 오천유적지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침락정은 예조 예문관 검열을 지냈으며 의병대장이던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공의 아들 매원 김광계(金光繼, 1580 ~ 1646) 선생이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강학소로 건립하여 의병출신의 선비들을 모아 시모임을 열던 정자이다. 1974년 12월 안동댐 수몰로 예안면 오천리 1번지에서 탁청정, 후조당 등의 건물과 함께 현재 위치로 옮겼다. 원래 정자가 위치하던 곳은 배산임수한 강가였다.
주차장에서 침락정으로 들어가는 일각문
김광계는 그윽한 산천을 찾아 거처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취향을 갖고 있었다. 그가 침락정을 지은 것도 바로 그러한 취향의 발로이다. 침락정은 산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한적하고 조용하며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 정자는 산수 간에 즐기며 노닐기 위한 목적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의병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김해는 예안의진의 의병대장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으니 이 주변 선비들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의병 운동 시기 이후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김광계가 지은 이 정자는 의병 출신 선비들이 출입하는 공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기 모여서 회의를 하였고, 시회를 즐겼다.
침락정 정면
정자의 평면구성으로 보면 침락정은 정자라기보다는 정사의 성격에 가깝다. 마루보다 방의 비중이 더 큰 것이다. 정자가 가지고 있는 누마루도 여기에는 없다. 그저 마루방이 건물 가운데 위치할 따름이다. 집은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차분한 모습이다. 나무의 색감과 벽면의 백회 칠이 어우러져 정갈하고 따뜻한 느낌을 던져 준다. 건물의 전면에 침락정의 현판을 걸었고, 대청 뒤쪽 상벽에 ‘운암정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건축양식은 팔작지붕을 가진 매우 건실하면서도 소박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주변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정자가 아니라 뜻있는 유생들의 학습소로 사용되었으니 정사의 기능에 더 가깝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 2칸 마루을 중심으로 좌우에 2칸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동쪽·서쪽·남쪽의 세 방향으로는 낮은 쪽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한 사람이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걸을 수 있는 폭을 갖는 쪽마루이다. 쪽마루의 아래쪽으로 앞부분으로 낮은 원형의 나무 기둥에 의해 들려 있고, 뒷부분은 건물의 벽이 바닥까지 내려 앉아 있다. 물론 중앙의 마루부분은 바닥이 그대로 들려 있다. 정면 4칸 중,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이고, 동쪽 1칸과 서쪽 1칸은 온돌방이다. 동쪽 1칸의 앞면 벽과 서쪽 1칸의 앞면 벽에는 통상 크기의 2쪽 방문이 붙어 있다. 벽의 아래는 마루 면으로부터 50cm 높이의 횡보를 걸치고 벽면은 나무판으로 막아 처리했다. 이 나무판은 밖으로 각목 부재가 일정한 간격을 띄우고 종으로 내려붙어 있다. 벽의 위 역시 처마 아래 50cm 부분쯤에 횡보를 걸치고 그 사이는 백토 벽으로 처리를 하였다.
침락정에서 계암정으로 이어지는 협문
협문
방문은 그 두 개의 횡보 사이에, 양쪽 옆으로 일정한 넓이의 백토 벽을 두고 가설되어 있다. 이 방들의 2칸 규모 측면은 앞쪽 칸에는 2쪽 문을, 뒤쪽 칸에는 1쪽 문을 달았다. 방의 뒷벽에는 문이 없다. 정면의 중앙 2칸은 온 벽이 다 네 쪽의 긴 방문으로 막혀 있다. 방문의 아래쪽 3분의 1 부분은 판자로 막혀 있고, 그 위쪽은 격자무늬 문살이다. 이 중간 2칸 넓이는 위쪽의 횡보 아래로 10여cm 정도의 틈을 두고 횡보를 걸쳐서 그 아래쪽에 문을 다는 형식을 취하였다. 10여 cm 정도의 횡보와 횡보 사이는 작은 각재로 드문드문 막아서 그 사이로 공기의 통행이 자유롭게 하였다. 이 부분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마루방 영역이다. 마루방의 뒷벽은 아래와 위는 다 방의 앞쪽 벽을 처리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위 50cm 정도는 횡보 사이를 메우고 있는 백토의 벽이고, 아래 50cm 정도 넓이는 횡보 사이를 판자로 막고 각목 처리를 한 것이다. 그 사이는 전체가 다 나무판으로 막혀 있다. 나무판 사이, 각 칸의 가운데에는 두 짝의 나무문이다.
건물의 처마 아래로는 이중의 각재 횡보를 둘렀다. 전체적으로 아담한 규모인데, 아래쪽에 붙은 쪽마루 탓에 조금 바닥으로 내려 앉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건물이 되었다. 오천 문화재 단지 내의 모든 건물들이 다 그렇듯이, 목재들은 잘 관리되고 정갈하게 닦여서, 차분하고도 부드러운 색감을 드러낸다.
침락정으로 들어가는 앞쪽 뜰 양편의 문은 작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마도 그것은 작기 때문에 앙증맞은 아름다움의 미학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건물의 뒤편에 조성한 굴뚝
게첨되어 있는 침락정이라는 현판은 건물 처마 밑에 걸려 있다. 힘 있고 점잖으면서도 날카로운 필치이다. 「침락정중수상량기」에 의하면 스승에게서 이 당호를 받았는데 정확하게 그 스승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침락정은 아마도 낙동강의 빼어난 경치와 연관이 있는 이름일 것이다.
다음은 운암정사(雲巖精舍)라 적은 편액이다. 운암은 김효로(金孝盧)의 큰아들 김연(金緣)의 호이다. 이 가문의 가계는 김연-김부필(金富弼)-김해-김광계로 이어진다. 여기 운암정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은 아마도 그런 가문의 역사를 상속받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광계는 김해의 아들이고, 김부필의 손자이며, 김연의 현손이다. 김연의 부친은 김효로 공으로 광산김씨 일문의 오천마을 입향조이다. 오천의 광산김씨 일문은 김연에서 김광계에 이르는 시기를 그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근시재 김해는 의병 활동을 통하여 나라에 충성하는 의리를 다함으로써 이 가문의 성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매헌 김광계는 그러한 부친의 행의를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행동과 태도의 준칙을 만들어나갔다. 나라에 충절을 다함은 부친의 인격을 설명하는 중심 덕목이면서 또한 그 자신의 인격의 중심에 들여 놓은 덕목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부친이 그러하였듯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예안의진을 이끌어 나갔다.
침락정 앞마당에 핀 상사화
김광계는 정묘호란 때에도 예안의진의 대장으로 죽령까지 출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대를 연이어서 예안의진의 대장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충의는 어느 가문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광계가 두 번이나 예안의진의 대장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가 이즈음 예안지역의 선비 사회에서 중요 인물이었음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당시에는 문예의 일과 군사의 일이 구분되어 말해질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문예 쪽에서 군사의 일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뒤편에서 본 침락정
침락정 창건 당시의 주변경관은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시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밀암은 시에서,
부친을 따라 부친의 임지로 나아가다
영가 땅에 이르러 병으로 취임 못함을 고하고 돌아오는 길
선정을 지나면서 침락정에 올랐어라
붉은 절벽 사이 도화꽃은 만발하고
멀리 산꼭대기에 운암사가 바라보이네
때맞춰 종소리는 울려 귓전에 이르는데
강산은 옥을 숨겨 둔 빼어난 절승일세
매원 김공을 생각하며 감상을 적어 보네
이 시는 침락정의 주변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침락정은 외내, 오천(烏川)으로 불린 마을에 있었다. 현재 오천리는 오천 1리, 2리, 3리로 나눈다. 오천 1리는 군자리(君子里)로 불린다.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 위기에 처한 문화유산들을 한자리로 옮겨 조성된 ‘광산김씨오천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원래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파의 600년 전통의 마을은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2km 위인 지금 위치로 종택, 묘우, 정자, 강당 등의 중요 건물들만 이건하면서 옛말을 빌어 군자리라 하였다.
오천군자리를 대표하는 건물은 단연 탁청정이다.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원래 전라도 광산에서 고려 후기에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그 한 파가 경상도 안동으로 와서 풍천의 구담(九潭), 와룡의 가구(佳邱), 예안의 오천 등 세 곳에 뿌리를 내렸다. 이곳 오천의 입향 시조는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로 풍산 도양골에 살다가 연산군 때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그의 아들 김연과 김유(金綏)는 중종 때 명신으로 이름을 얻었고, 이들의 자손들이 번창하였다.
이곳이 군자리로 불리게 된 것은 안동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오천마을은 주민 모두가 군자(君子) 아닌 사람이 없구나.”하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특히 ‘오천칠군자’는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과 봉화금씨(奉化琴氏)의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등으로 모두 농수 공의 친손이나 외손들이다. 오천리는 우리말로 외내라고도 하는데, 외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한줄기로 맑은 개울’이었다는 의미이다. 혹은 이 내가 물이 맑을 때 물 밑에 깔린 돌을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오천이라 하였다.
오천유적지의 기와지붕이 햇살을 받아 고택을 멋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아득히 나는 듯한 건물이 맑은 물굽이를 굽어보아
풍경이 앉은 책상 사이에 길이 머물도다
상쾌한 기운이 누헌을 침노함은 남쪽으로 물이 흘러가기에
맑은 빛이 방에 가득함은 북쪽에서 산빛이 오기에
새벽 창가에는 절간 풍경 소리가 구름을 뚫고 떨어지고
저녁 갯가에는 어부들 노래가 달빛 타고 돌아오네
시와 술로 한가한 속에 늙음을 물리치나니
그대가 칠십 나이에도 동안(童顔)이라 부러우이
도화원의 집 구조는 고작 세 기둥인데
손으로 동남쪽 푸른 하늘을 움켜 쥘 듯하구나
1천 겹의 그림들이 눈 아래 열리고
사계절 풍경이 그림 난간 앞에 펼쳐지네
성근 종소리를 구름이 가르니 절이 있는지 없는지
고기잡이 불을 강물에 비추며 배들이 오가네
사람들은 솔 그늘의 반석 위를 말하는데
밤 깊어지자 생황 불며 학을 타고 뭇 신선들 내려오네
임진년 중하(仲夏)에 월성(月城) 이적의(李適意)가 지은 침락정 시 한수를 감상하며 9월 답사를 마무리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1973년 8월 31일 지정되었다.
침락정과 이웃하고 있는 계암정
도산구곡 제1곡(운암곡) 군자마을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