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회든 목표는 금메달입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앞둔 각오를 묻자 여자핸드볼 대표팀 주장인
오영란(36) 선수와
문필희(26) 선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10일 개봉한 영화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올림픽 결승에서 2차 연장전까지
덴마크와 숨 막히는 접전을 벌이고 승부던지기 끝에 아쉽게 패한 4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아테네의 주역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땀을 흘리고 있을까.
최근
영화 시사회에 대표팀의 수장인
임영철 감독과 함께 참석한
아테네 올림픽의 주역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날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아테네의 기억을 넘어 베이징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영화같은, 영화보다 더한 현실
“핸드볼인이라서 그런지 감명깊게 봤어요. 우리를 소재로 다루니까 아무래도 그때 생각이 나죠. 실화를 가지고 드라마를 만든데다 좌절했다 희망을 갖는 메시지가 좋더라구요. 꿈, 용기, 희망 그런 것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마지막 부분에는 아테네 올림픽의 실제 경기 장면과 분노와 눈물이 뒤섞인 임영철 감독의 인터뷰가 들어가 영화의 감동을 배가시킨다.
부평 산곡중학교에 위치한 북부학생체육관에서 지난주 임영철 감독과 효명건설 팀(現 벽산건설 팀) 선수들을 만났다. 원래 연습하던 도원실내체육관은 겨울만 되면 프로스포츠인 배구에 내주어야 한다고. 학생들 위주로 쓰는 곳이니 마음대로 쓸 수가 없어 벽산건설 팀은 이날도 경기장 절반만 사용하며 연습을 시작했다. 영화 속에서 몸 담고 있던 실업팀이 해체되서 대형마트에 판매원으로 나선 문소리처럼 이들의 현실도 열악하다. 국내 실업팀 중에 최고로 꼽히며 대표팀 선수들만 6명이 속해 있는 효명건설팀이었지만 지난해 11월 회사가 부도나자 막막한 상황은 다시 반복되었다. 인천시가 나서서 시 체육회 소속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마침내 벽산건설에 인수되었다. 대표팀 막내 김온아(20) 선수는 “팀에 들어온지 1년밖에 안됐는데 해체돼서 걱정도 많이 되고…그래도 우리팀이 못한 건 아니었으니까 다른 데서 받아줄거라고 믿고 연습했다”고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국내 여자핸드볼 실업팀은 고작 6개에 불과하다. 경기장을 꽉 채운 팬들과 연봉 등 더 나은 환경을 찾아 해외로 갈 수밖에 없는 선수들이 부지기수. 이렇다 보니 대표팀을 소집해 훈련하는 것도 만만찮다. 임 감독은 “4년 전보다 여건이 더 안 좋다”고 잘라 말했다. “아테네 때는 해외에 나가 있는 선수들도 별로 없는데다가 그나마 2명이 일본에 있어 가까우니까 수시로 불러서 연습했는데 지금은 7~8명이 유럽에 가 있어서 같이 모여서 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요.” 현재 여자핸드볼은 올림픽 티켓 확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편파판정으로 인한 올림픽 예선 재경기는 잠정적으로 25일부터 31일까지 일본 도쿄 요요기 국립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것으로 결정됐지만 대표팀 선수들의 소집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이런 열악한 현실이 있기에 “자녀가 핸드볼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오영란 선수는 고개를 내젓는다. “실업팀도 없고 대학팀도 없어요. 당연히 부모들이 못하게 하죠. 배구, 농구같은 건 그래도 밀어주잖아요. 스포츠 유명한 건 돈을 많이 들여서라도 유학보내고 한다던데, 핸드볼은 아니니까…”
▶한국 여자 핸드볼의 힘
아무리 봐도 잘 할 수 없는 여건 투성인데 한국 여자핸드볼의 힘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려운 외부 여건이 보는 이를 안쓰럽게 할 정도지만 코트를 중심으로 모든 생활이 돌아가는 선수들의 마음까지 흔들지는 못한다.
한국 여자 핸드볼은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실력파다. 미흡한 환경에서 온 키도 작은 이 선수들이 어쩜 이렇게 잘할까 하는 감탄의 시선이 늘 따라다닌다. 임 감독은 ‘강인한 정신력’을 한국 여자 핸드볼의 최고 장점으로 꼽았다. “우리나라, 특히 여자들은 세계 최고의 여자들입니다. 아줌마가 됐든 아가씨가 됐든 최고에요.” 외국 선수들과 달리 지도자를 믿고 따라주는 것도 장점으로 많은 훈련량, 시간도 다 믿고 이해해준다고 한다. 외국의 벤치마킹 상대가 된 한국형 핸드볼의 기술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힘이 아니라 스피드에 의존하는 부분, 그리고 페인트 동작도 독특해요. 스텝으로 하죠. 한번 움직일 거 두번 움직이면서 하니까…코트에서는 유리해요.”
또 한국 여자 핸드볼은 ‘아줌마 군단’의 힘이 세다. 대표팀에 아줌마 선수만 5명. 오영란 선수는 지난해 11월 첫 딸 서희의 돌잔치를 했다. “아기가 만 1살이라 엄마 손 많이 탈 때인데 떨어져 있어서 못 보고…그래서 힘들지만 가족이 있으니까 힘이 돼요.” 그는 “아이한테 자랑스러운 엄마로 기억되고 더 좋은 모습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한다”고 강조했다. 항간에서는 세대교체가 안 되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하지만 이들이 아직 최고의 선수들인 것은 분명하다.
오 선수는 이어 “항상 잘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1등 자리 지키기 힘들다”며 올림픽이나 세계대회에서 조금만 못해도 ‘이제 안 되나보다’하고 숱한 문제점만 지적하는 여론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선수들은 “그런 소리 들으면 오히려 한국 핸드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고 입을 모았다. 해외의 편파판정에 대해서도 의연하다. 문필희 선수는 “편파판정이란 건 늘 있는 거고 경기의 일부”라며 “이번엔 좀 심했지만 늘 따라다니는 거니까 재경기해서 잘 하면 다 들어갈 얘기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함께 꾸는 꿈은 꿈이 아니다
아테네 올림픽 이후 고정팬들이 늘어났다는 것은 희소식이다. 임 감독은 “아테네 올림픽 끝나고 나서 아무래도 국민들이 핸드볼팀에 빚진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그저 올림픽 효자 종목으로 인식될 뿐이었지만 현재는 인터넷 핸드볼 카페도 활성화되고 관심도 높은 편이라고.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팬들은 점차 핸드볼 경기 자체의 매력에 빠진다. 열악한 여건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선수들은 아테네 올림픽 이후 한두명이라도 꾸준히 경기장을 찾는 팬들을 보며 힘을 얻는다. “전에는 식구들만 오고 그랬거든요. 경기장도 열악하고 그래서 지방으로 멀리 시합나가면 그나마 아무도 안오고 그랬는데 연락 안해도 매번 찾아오시는 팬도 있어요. 오정희씨라고 아테네 올림픽 경기 보고 팬이 되셨다는데, 휴가를 내서라도 지방으로 오고 그러세요.”
국민들은 아테네 올림픽과 같은 기적을 이들에게 또 바란다. 행여 이 바람이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아테네 이후로 더 부담스럽고 그런 경기를 또 할 수 있을까 싶죠. 좋아진 점이 없으니까.” 그러나 임 감독은 “사람이 목표나 기대, 소망이 있을 때 어느 한 사람만 갖고 있으면 안 이뤄지지만 소망하는 사람이 많으면 이뤄진다는데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냐”며 “국민들이 십시일반 그런 마음을 조금씩만 가져주시면 소망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여자핸드볼의 올림픽 진출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당연히’라는 이야기는 이제 어렵다고 한다. 한국 스타일의 핸드볼은 이제 유럽에서도 다 따라 하는데 한국은 연령이 높아진데다 그 외 여건이 안 좋아 불안한 상황. 그래도 감독과 선수들의 자신감은 여전했다. “막내니까 배운다는 마음으로 언니들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잘해서 금메달 따서 오겠습니다.” ‘금메달 따러 간다’는 출전 각오는 처음 올림픽에 출전하는 김온아 선수도 다르지 않다. 임 감독은 지난해 세계선수권 파리대회에서 6위를 했지만 루마니아, 독일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훈련을 4일밖에 못 하고 갔는데, 대비 잘 하면 올림픽 4강은 가능할 겁니다.” ‘생애 최고의 순간’은 또 다시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