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환 金昌煥 (1872 ~ 1937)】 "1922년 서로군정서 총사령, 1922년 대한통군부 사령관"
1872년 4월 9일 김계현(金啓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號)는 추당(秋堂)이고, 이명은 김석주(金錫柱)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1899년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육군 부위(副尉)로 복무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신민회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신민회는 1907년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 등이 국권회복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이다. 1909년 12월 일진회가 고종과 통감, 총리에게 합방상주문(合邦上奏文)과 한일합방청원서를 제출하는 매국 행위를 하자, 배동현(裵東鉉)·이승규(李昇圭)·오상근(吳祥根)·조규수(趙奎洙)·이용태(李用台)·노익형(盧益亨)·김진호(金鎭浩) 등과 함께 일진회 성토문을 발표하고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이회영(李會榮) 6형제를 비롯하여 이상룡(李相龍)·이동녕·김동삼(金東三)·주진수(朱鎭洙)·윤기섭(尹琦燮)·이광(李光)과 함께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로 이주하였다. 우선 토지를 구매하여 학교와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한인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의 설립에 진력하여 윤기섭·이회영·이상룡·이동녕과 함께 발기인이 되었다. 1911년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열고 교관으로 체육과 군사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후 강습소를 개편하여 1913년 5월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의 간부를 맡아 학생들을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920년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군사 간부 양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서로군정서 의용대 총지휘관으로 군대를 이끌고 백두산과 압록강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활약한 이후 일본군의 재만 한인에 대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1921년 자유시참변을 겪고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1922년 옛 동지들을 규합하여 서로군정서를 재조직하고 총지휘관의 책임을 맡았다. 같은 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결성되었을 때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22년 8월 남만주지역의 독립군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이른바 8단 9회 대표들이 환런현(桓仁縣)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었고, 이때도 군사 간부로서 능력을 발휘하였다. 당시 통의부 의용군 사령장을 맡아 부관(副官) 김창훈(金昌勳) 휘하 대대단위로 편성하고, 5개 중대로 조직하였다.
한편 1923년 초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민족운동을 지도할 최고기관 설립 문제와 독립운동방략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을 때, 대한통의부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국내외 각지에서 참석한 동지들과 민족 주권확립, 독립운동 노선 통일 등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상하이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 졸업식에 참석하여 신흥무관학교 동지인 지청천(池靑天)과 축사를 하기도 하였다.
1925년 중국 지린(吉林)에서 통의부와 길림민회를 토대로 재편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었을 때 재무위원을 맡았으며, 군사책임자로도 활약하며 독립군의 국내 진격과 동포사회의 치안 확보에 주력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북만주로 이동하여 지린성 우창현(五常縣)에서 생육사(生育社)에 참여하였다. 생육사는 겉으로는 한인의 친목 도모를 표방하였지만, 실제는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혁명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비밀결사였다. 1929년 봄 결성 당시 홍진(洪震)·황학수(黃學秀)·지청천(池靑天)·김좌진(金佐鎭)·이장녕(李章寧) 등 북만 지역 독립운동 중심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 생육사를 모체로 1930년 독립운동정당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은 민본(民本) 정치의 실현, 노본(勞本) 경제의 조직, 인본(人本) 문화의 건설을 강령으로 삼았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한국독립당의 당군(黨軍)인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을 도와 중국의 항일 구국 군대와 연합해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비행기까지 동원한 일본의 무력 앞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932년 5월 간부들과 비상회의를 열고 임시 총사령을 맡아 수습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때 윤봉길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을 받아 군사 간부 양성 계획을 추진 중인 김구의 요청을 받고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주요 인사들과 함께 중국 관내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33년 10월 당·군의 주요 간부들을 비롯하여 군관 양성에 지원한 인사들과 함께 베이징(北京)을 거쳐 난징(南京)으로 떠났다.
난징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먼저 활동하고 있던 한국혁명당과 합당을 추진하였다. 한국혁명당은 1929년 신익희(申翼熙)·윤기섭(尹崎燮)·민병길(閔丙吉)·성주식(成周寔)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독립운동 정당이다. 만주에서 건너온 한국독립당 인사들은 한국혁명당과 합쳐 1933년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하였다. 당의 간부로 이후에 전개되는 관내 독립운동 정당 통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5년 신한독립당과 상하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 만주에서 결성되어 중국 관내로 건너온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 미주의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등이 통합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새롭게 창당하였다. 이 때 군사부 위원과 중앙검사 후보위원으로 중책을 맡았다.
이후에도 중국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937년 2월 12일 난징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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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환 사망 보도 기사(『한민』 1937. 3. 1)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