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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석화 시인의 시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이승하
2009 국민제안 예술프로젝트 공모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오는 4월 20일(월)부터 5월 20일(수)까지 “2009년 국민제안 예술프로젝트-내가 만드는 예술기획”을 공모한다.
‘내가 만드는 예술기획’이란 지금까지 문화예술의 수요자, 향수자였던 일반 국민이 직접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제안하고, 그중 좋은 제안을 선정하여 예술위원회가 예술가(단체)들과 함께 실행해 나가는 프로그램이다. 2008년도에 처음 수요자 맞춤형 지원사업의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지난해에 130건이 넘는 제안이 응모되는 등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08년도에 이어 2009년도에도 일반 국민들의 제안을 받고 있다. 2009 국민제안 예술프로젝트에 제안할 수 있는 프로젝트 주제에 제한은 없으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제안한 아이디어 중 최우수 제안 1건과 우수제안 2건을 선정하여 각각 100만원, 50만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응모방법은 소정의 양식을 다운받아 이메일(jhyoon@arko.or.kr)로 접수하면 된다.
2008년도 공모에서는 ‘내 웃음의 자화상, 웃음 사진 전시회’(최우수기획), ‘동대문 헌책방 축제’(우수기획), ‘한국문학 노래축제’(우수기획)가 우수 제안으로 선정되어 올해 실제 예술 프로젝트로 진행 중에 있다.
‘내 웃음의 자화상, 웃음 사진 전시회’는 ‘함께 웃자, 대한민국’으로 해 오는 4월 27일(월)부터 약 3개월 간 웃음사진 공모전(네이트, 싸이월드, 중앙일보)이 사이버 문학광장(www.munjang.or.kr)과 연계하여 예술가들의 웃음에 관한 글이 연재되며 웃음 영화제(씨너스영화관) 등도 진행하게 된다.
‘동대문 헌책방 축제’는 ‘2009 헌책축제’로 하여 오는 5월 29일(금)부터 5월 31일(일)까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및 아르코미술관에서 헌책 회고전, 추억의 헌책방 재현, 명사들의 헌책방, 북 콘서트 등이 열린다.
‘한국문학 노래축제’는 ‘2009 문학노래 페스티벌’로 오는 10월 중에 진행 될 예정이며, 문학을 주제로 한 노래 만들기 온라인 공모전을 개최하고 문학 노래축제도 열리게 된다.
※ 문의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컨설팅부 02-760-4831
여러분!
5월 20일까지 진행되는 공모에도 참여하시고, 5월 29일(금)부터 5월 31일(일)까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및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2009 헌책축제’에도 가보시기 바랍니다. 헌책 회고전, 추억의 헌책방 재현, 명사들의 헌책방, 북 콘서트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헌책방’ 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지 않습니까? 아래는 제가 낸 산문집 『헌책방에 얽힌 추억』의 제2부 제일 앞머리에 실려 있는, 같은 제목의 수필입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라난 곳은 인구 면에서 전국적으로도 작은 도시에 속하는 경북 김천이다. 거기 삼각지 로터리 부근에 있던 헌책방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헌책을 아주 싸게 사서 결코 싸지 않은 가격으로 파는 구두쇠 할아버지가 주인이었다. 헌책 값이면 팍팍 깎아주어도 좋으련만, 어린 마음에 꽤 비싸게 판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헌책방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원』이라는 청소년 대상의 잡지는 60년대에 나온 것이 읽을 것이 많았는데 그 헌책방이 아니면 구해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것으로는 정운경 화백이 그린 연재만화 ‘진진돌이’, 개그 코너 ‘엉라이 후터리’, 권두의 사진 소설, 연재 소설 「바람의 선물」과 「바다가 보이는 언덕」, 표지 모델 안인숙 등이다. 또 전국 문청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학원문학상’을 들먹이면 옛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벅차오르는 분도 있으리라. 1972년부터 1974년까지의 내 중학교 시절에도 잡지 『학원』이 나오고 있었지만 헌책방에서 사 읽는 해묵은 잡지의 멋과 맛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늘 어두컴컴하고, 고서의 퀴퀴한 냄새가 풍겨오고, 책들이 책방 여기저기에 정리도 되지 않은 채 쌓여 있고, 언제 가도 손님이 뜸하던 그곳이 없었더라면 나의 중학교 시절은 무척 암울했을 것이다. 집안의 어두운 분위기로 말미암아 공부는 뒷전이었고, 일종의 도피처를 나는 책에서 마련하고 있었다. 책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집안 문제로 인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구고 3학년 이하석의 시, 대구상고 3학년 권택명의 시, 용산고 3학년 윤상규의 시, 대구 대륜고 2학년 정호승의 시, 원주고등학교 3학년 오탁번의 시, 대광중학교 3학년 마광수의 시를 읽으며 나는 얼마나 가슴 설레었던가. 『학원』지에 실린 시를 필사한 공책의 두께를 믿고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였으니,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그 헌책방이었다.
고등학교를 2개월만 다니고 중퇴한 뒤 이 도시 저 도시 떠돌아다녔지만 주로 서울에서, 그 무렵 대학에 다니고 있던 형의 하숙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70년대 후반기와 80년대 전반기를 보냈다. 70년대 후반기는 대입 수험생이었고, 80년대 전반기는 대학생이었다.
다섯 살이 위인 형은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대학에 입학하였다. 형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뗀 것은 물론 한자를 많이 알아 부모님이 큰 기대를 걸고 초등학교부터 좋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며 할머니 혼자 사시는 대구로 보내 입학을 시켰다. 형은 공부를 무척 잘했다. 그런데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니체와 카뮈에 심취하여 뛰어난 성적에 걸맞지 않게 서울대 철학과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3 여름 한 철 신경쇠약 증세가 심해져 입원을 하는 통에 진로를 바꿨다. 이런 약한 신경으로 심각한, 혹은 심오한 철학은 무리라는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고3 수험생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여름방학 동안 입원해 있었지만 가을과 겨울에 피치를 올린 결과 성적이 수직으로 상승하였고, 마지막 모의고사에서는 전교 2등을 해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원서를 내도 될 정도의 성적이 나왔다. 성적순으로 지망 학과가 결정되는 터라 ‘모교의 명예’를 빛냄은 물론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법학과에 원서를 내기로 결정을 지었다. 형은 여름철의 공백 때문에 별 자신 없이 시험을 치렀건만 제1지망으로 써낸 법학과에 합격하였다.
형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이남하’란 이름으로 『학원』지에 글을 종종 발표하였다. (형의 본명은 이남하인데 대학 시절에 ‘동하’로 개명되는 데는 긴 사연이 있다. 현재 문학평론가로 활동중이다.) 형은 『학원』지에 글을 발표한 것 외에 시화전도 하고 교지에 글을 발표하는 등 고등학생으로서 문명을 떨쳤는데 그것이 무슨 연유가 되었던지 법전을 끼고 살면서도 문학병을 종내 버리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고등학교 중도 포기는 형의 사법고시 포기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고시를 치지 않고 문학을 하겠다고 형이 선언하자 집안에서는 (속된 표현을 쓰자면) 연일 ‘곡소리가 났다’.
오늘날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형은 부모님과의 오랜 투쟁 끝에 법관에의 길을 결국 거부하고 법학과를 졸업한 후에 같은 대학 국문학과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사법고시 1차 시험에는 두 번이나 붙어 애꿎게 두 사람을 1차 시험에도 떨어지게 하였다.) 형은 그 과정에서 그렇지 않아도 풍파가 끊이지 않던 집안을 아비규환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부모님과 장기전을 펼치며 인생의 진로를 다른 방향으로 틀게 된 자신의 고민이 워낙 커 ‘폭력과 광기의 나날’을 보내는 두 동생의 고충은 알 길이 없었다.
고속버스터미널이 강남으로 옮겨가기 전에는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있었는데, 그 일대는 유명한 헌책방 동네였다. 차표를 사면 대개 몇 시간 그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내가 담배 연기 자욱한 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몇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헌책방 순례에 나서면 중학생 시절이 생각나 나는 한없이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남의 손때가 묻은 헌책들에 왜 그리 정이 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남이 여기저기 밑줄을 그어놓거나 낙서를 해놓으면 그 책이 더욱 사랑스러워지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표지를 들치면 누가 누구에게 준다는 사인을 해놓은 책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희귀한 우표를 손에 쥐었을 때에 못지않은 기쁨을 느끼게 되니, 이 역시 헌책방 한구석에서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었다. 체취와 연륜이 느껴지는 ‘남이 보던 책’에 대한 애착을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70년대 후반기에 나는 수험생이기는 했지만 학원에는 다니지를 않고서 형 하숙방이며 공공도서관에 가 혼자서 입시 공부를 하였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너무 오래 고립된 생활을 하는 바람에 자폐증 비슷한 대인공포증에 걸려 사람 많은 데는 가지를 못하는 이상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공포와 억압에 짓눌린 상태로 성장기를 보내는 바람에 후천적으로 말도 더듬게 되었고, 다른 사람이 내게 말을 건네면 진땀을 흘리며 엉뚱한 소리를 하는 등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길을 걸을 때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걸었고, 때로는 혼자서 히죽히죽 웃어 타인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기도 했다. 내가 형과 누이동생을 제외한 누구에게 말을 먼저 건네는 일은 유년 시절이건 10대 때건 거의 없었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면 절대로 안 되는 집안의 무거운 분위기로 말미암아 종일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비일비재하였다. ‘말’에 대한 공포증에서 벗어나는 데 나는 대학 4년을 포함해 근 10년의 세월을 바치게 되는데, 지금도 사람 많은 자리에 가서 내가 화제를 끌어가는 일은 없다.
학교에도 학원에도 나가지 않고 오로지 독학으로 하는 입시 공부이니 능률이 오를 턱이 없었다. 온종일 공부만 하자니 마냥 따분하여 나는 『학원』 애독자에서 어느새 추리소설 광으로 변모해 있었다. ‘동서추리문고’를 통해 아가사 크리스티, 엘러리 퀸, 반 다인, 존 딕슨 카의 소설들을 독파해나갔다. 고속버스를 타면 딱 3시간이 걸리는 고향까지의 거리, 명절이 오거나 다른 볼일이 생겨 고향에 갈 때면 나는 꼭 헌책방에 들렀다. 헌책방에서 산 추리소설에 푹 빠져 있다 보면 내 몸은 어느새 고향에 가 있게 마련이었다. 추리소설은 영화를 대신하여 나의 새로운 도피처가 되었다.
문학 관련 서적은 법학 공부를 마다하고 국문학도가 되어 있는 형 덕분에 헌책방을 순례하며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형은 언제나 향토장학금이 올라오면 최저 용돈만 남겨놓고 그날로 읽고 싶은 책을 몽땅 사 왔기 때문에 형제의 서울 생활은 늘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그 시절의 나와 형은 전혀 모르는 데를 물어서 찾아갈 일이 생겨도, 아무리 무거운 짐을 들고 있어도, 버스를 몇 번 갈아타면 탔지 택시를 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게는 버스를 잘못 타거나 반대편으로 가는 버스를 탄 기억이 엄청나게 많다. 꼭 하숙집에서 싸준 도시락을 먹지 집 바깥 식당에서 밥을 사 먹은 기억도 없다. 과일이며 과자를 내 스스로 사 먹은 기억 역시 없다. 어떤 때는 제철 과일을 먹지 못하고서 한 계절을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아 올해는 딸기를 한 개도 먹어보지 못하고 보냈구나.’ 참외며 딸기 같은 과일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야 깨닫고는 잠시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21세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오늘날,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으로 헌책방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대학이나 중․고교 근처에 가면 간혹 헌책방이 눈에 뜨이기는 한다. 옛 추억이 떠올라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 학교에서 쓰는 교재나 교과서와 참고서, 혹은 흘러간 여성지와 시사월간지들만 잔뜩 쌓여 있어 들어가서도 금방 실망하고 나오게 된다. 내 청소년기의 꿈을 키워주었던 헌책방의 분위기를 지닌 가게는 서울이건 지방이건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는다.
IMF 시대라 헌 옷가지며 헌 가방을 고쳐주는 가게가 다시 생겨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 시절의 분위기를 풍기는 헌책방이 다시 생겨날까. 요즈음 세상에서 제일 흔해빠진 것이 책이니 헌책방을 기웃거릴 이유도 사실 없다.
나는 그 시절, 헌책방 할아버지가 해주신 칭찬의 말을 듣고 얼마나 우쭐해 했던가. “내 학생만큼 책 좋아하고 많이 읽는 경우는 보다보다 처음 보는구먼.” 이런 말에는 또 얼마나 행복해 했던가. “다음 주말에 와보게. 내 대구 가는 길에 학원지 또 구해놓을 테니까.”
삼각지 로터리 부근에 있던 그 헌책방은 지금은 아마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 구두쇠 할아버지도 벌써 돌아가셨을 것이다. 아아, 헌책을 사서 읽는 즐거움을 나는 이제 누릴 수가 없구나. (1998)
첫댓글 잘 지내시지요? 벌서 올해도 무더움을 안고 있읍니다. 이곳 소식 자주 전하지 못해 죄송 하군요? 허무를 쫒는 인생이라 이해 하세요. 많은 발전 있으시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