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런걸 뜯어 먹어야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섰으며, 명(明)은 전후 40년만에 국력이 쇠퇴되어 이자성의 반란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이런 대 전쟁을 어찌 가볍게 '왜란(倭亂)'이라고 할 수 있는가?
🌹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조선과 일본
16세기 말, 조선(朝鮮)의 상황을 살펴 보자.
선조(宣祖)가 재위하고 있었던 당시 조선은 건국 후 200년 동안 전면전 즉 직접적인 전쟁이 없었다.
평화가 지속되다 보니 나라가 문약(文弱)에 빠지고, 도대체 아군 병력이 얼마인지, 무기와 장비가 창고에 있기는 한 지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군사를 모집하면 병역 면제자들인 유생들이나 몇 명 모이고, 참! 양반들은 군대 안 가는 것 아시져?
나머지는 고개 돌리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노름판에서 잭팟 터지는 확률 보다 더 낮았다.
군대는 이렇게 🐕판이었지만, 그래도 세종대에 세계 최강의 화약 무기국이었던 조선의 전통이 계승되어서 중화기면에서는 일본군을 압도했다.
또 다행히 전대인 명종대에 전함을 판옥선(板屋船)으로 바꾸어 놓은 덕분에 전함도 막강했다.
모든 판옥선(板屋船)이 함포를 10여 문 내지 20문씩 장착하고 있어서 함포가 없는 일본의 함선은 해전에서 도무지 게임이 되지 않았다.
같은 시기 일본(日本)의 상황을 보자!
일본(日本)은 서양과 교역을 활발하게 하고 있어 포르투갈로 부터 조총을 수입해 오다 노부나가와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년 동안 이어졌던 전국시대를 통일했다.
도요토미는 하급 무사의 아들로 생김새는 원숭이를 닮았다고 한다.
(역쉬 쪽국 놈들은 원숭이와 친하당께~)
당시 최고 장군이던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乘勝長驅)한 도요토미는 어떻게 오다 노부나가의 마음을 사로 잡았을까?
도요토미는 상관의 명령이라면 충성을 다하고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한 지략가였다.
예를들어 만 원을 주고 만 원짜리물건을 사오라고 하면, 자기 돈 5천원을 보태어 상관에게 5천원을 거스름돈으로 준다.
그러면 상관은 '아, 이 물건값은 5천 원인가 보군.'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다른 사람에게 같은 물건을 사오라고 만 원을 준다.
하지만 그 사람은 원래 가격이 만 원이니까 그대로 사온다.
이때 상관은 어떤 생각을 할까?
' 이 녀석이 나머지 돈을 횡령 했구나!'
어떠셔요? 여러분!
승진하고자 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상관에게 꼬옥 5천원을 거슬러 주도록~ㅋ🤣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추운 겨울에 상관의 신발이 차가와질까봐 품속에 넣고 다녀 오다 노부나가를 감동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그를 계승하여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고민이 되기 시작 했다.
100년 동안 전쟁을 했으니, 대부분 직업 군인이었는데 평화 시기에는 이들이 할 일이 없는 대량 실업자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도요토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도요토미는 이제 눈을 국외로 돌려 이렇게 외쳤다.
'명(明)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니 조선(朝鮮)은 길을 빌려주어야 한다'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주장하며 통신사의 파견을 요구했다.
일본의 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당연히 조선(朝鮮)은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대마도 도주의 요청에 의해 선조는 동인의 김성일(金誠一)과 서인의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로 파견했다.
그리고 이들은 1년 뒤인 1591년에 선조(宣祖)에게 도요토미를 만난 일을 보고 했다.
이 당시의 상황을 선조수정실록을 인용해 보겠다.
상이 하문하기를,
"수길(도요토미)이 어떻게 생겼던가? " 하니 윤길은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 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하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누구의 의견이 채택되었을까?
당시 동인 김성일(金誠一)의 보고가 채택되고 조선은 전쟁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당시 김성일(金誠一)의 의견이 선택되었을까?
그건 바로 책임지기 싫어서였다.
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전쟁 준비를 하고 군대를 키웠는데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세금 낭비를 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될까 두려워 했던 것이다.
물론 전쟁준비로 민심이 나빠질까 걱정했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은 서로 다른 꿈을 꾸며 1592년 임진년(壬辰年)을 맞이하고 있었다.
헐~같은 날 같은 배를 타고 같이 돌아 온 사람들인데..
중대한 시점에도 당파(黨派)가 다르다고 무조건 반대 주장을 할 정도 였으니,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얘기가 오백 번 맞다!
🎓 다음은 조일전쟁이 일어나다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