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323 (9권 4. 김홍신. 펌글)
* 사악한 흥정 *
혜라의 욕심처럼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지치다시피 호텔로 돌아왔다.
밤이 제법 으슥해질무렵 빗방울이 창문을 가볍게 때렸다.
마치 보슬비 같기도 했다.
얼핏 잠들었을 무렵에 전화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혜라가 재빨리 전화기를 잡았다.
상대는 굵직한 남자 목소리였고 혜라는 불어로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자지 않고 불을 켰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내가 잠든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입술에다가 손가락을 가볍게 대는 것으로 보아 내가 곯아 떨어졌다거나 욕탕안에 있다고 들러붙이는 눈치였다.
제법 길게 전화를 통해 두 사람은 말을 나누었다.
"뭐야?"
"연락이 됐어. 당신을 수면제 먹여 재웠다고 했더니 이것저것 지시를 했어. 내일을 디데이로 하자고."
"전쟁하러 가는 거냐, 디데이 어쩌구 하게."
"그럴지도 모르지."
"어디야?"
"이상해. 파리 시내가 아냐.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야.
그들이 그런 곳으로 장소를 정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내 불찰야."
혜라는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디냐니까?"
"여기서 한 이백여 리 길 될 거야. 나도 두어 번 갔었지만 정말 그쪽 길은 깜깜해.
훤틴불루라는 궁인데 루이 십사세 때 지은 궁이야. 아침에 차를 보내겠대."
"난 상관 없어. 거기가 모스크바든 지옥이든 갈 테니까."
내 마음은 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일이 뒤틀리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맞부딪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흥분할 수 있는 일이었다.
"훤틴불루는 넓은 지역야. 더구나 그들은 망원 감시장치도 있고 망원 조절이 가능한 총도 가졌어.
더 큰 문제는 내가 가동할 수 있는 장비나 인원이 손 쓸 수 없는 곳이야."
"그렇다면 뭔가 눈치를 챘다는 얘기 잖아?"
"글쎄.... 나를 믿을 텐데."
"같이 움직이는 게 감시됐겠지."
"그건 각오했던 문제야."
"다른 건?"
"동태와 심경이 어떠냐는 거였어. 편하게 말해 줬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훤턴불루 근처의 지도부터 구해야 돼."
혜라가 뛰어 내려가더니 휴대용 지도를 구해 가지고 올라왔다.
프런트에 비치된 관광지도이지만 퍽 상세한 것이었다.
혜라는 그 자리에서 몇 군데 전화를 걸어보더니 머리를 더 갸웃거렸다.
내 마음은 혜라의 표정만큼이나 복잡해졌다.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훤턴불루 직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켜서 일부만 문을 연다는데...
그렇게 되면 관광객도 별로 없을 테고.... 아주 한적하겠지..... 수상해."
걱정할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출입이 제한되면 관광객도 없는데다,
루이 십사세가 사냥을 했다는 숲 속으로 나를 불러들이면 지리를 전혀 모르는 내가 그들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나를 맞을 준비를 계획적으로 했을 터이고 우리 나라 산악과 아주 다른 평원 같은 숲속이어서,
은폐는 되어도 엄폐물이 마땅찮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셈이었다.
"차라리 그게 좋다."
나는 가슴 죄기 싫어 이렇게 오기를 부려보았다.
"오기 부리지 마."
"이젠 너도 상관할 거 없다. 나 때문에 괜히 신세 망치지 말고 편한 대로 해라. 약속시간과 정확한 장소만 알려 줘."
"함부로 목숨 연습하는 거 아냐. 명분 없이 목숨 내던지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거야.
내가 예비로 차 한 대를 준비할 테니까 여차하면 이쪽 도로로 해서 숲길로 도망쳐.
그냥 도망치면 안 되고 상대 가운데 한 사람을 생포해서 싣고 가야 돼. 그럼 그 패들이 추적하겠지. 그뒤는 내가 맡을게."
"분명히 얘기하겠는데 난 너를 믿지 않아."
"왜?"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었어."
"나를 믿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다혜도 당신도, 또 나까지도 죽게 돼."
"이젠 믿게 해 줄 때가 됐잖냐."
"그래."
혜라가 지도를 접어 내게 내밀고는 핸드백 속에서 작은 메모지 하나를 꺼냈다.
거기엔 또박또박 쓴 연필글씨로 '귀하신 몸' '일본의 대화 그룹' '기타' 라고 씌어 있었다.
"짐작한 대로구나."
"더 있어. 내가 알고 있는 선이 그 정도고 일본 애들은 국제적인 조직과 손을 잡고 있어.
심지어 소련 애들까지도, 대화 그룹이 떠 맡았다가 다른 조직한테 인계했을 거야. 그 조직은 나도 몰라."
"꽤 비싸게 거래가 됐겠구나."
"그럴 거야."
"네 식구들도 대화 그룹한테 당했냐?"
"그런 셈이지. 그 안에 한국인들이 정보를 제공해서 먹고 사는 패들이 많으니까."
"동족 잡아먹는 애들 말이지?"
"그래."
"짐작은 가냐?"
"이태리 애들 아니면 소련 애들일 것 같애. 완벽하게 하고 값이 싸고 잔인하니까."
"날 팔아넘긴 애들 명단은?"
"귀한신 몸과 대화 그룹 애들야."
"그랬겠지."
나는 부르르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연결이 되었다는 걸 진작에 알았던들 그녀석들부터 박살을 내고 볼 일이었는지 모른다.
이미 때는 늦었다. 부딪쳐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나를 불러내어 일을 해결하려는 속셈도 얼추 읽을 수 있었다.
"굳이 나를 불러낸 이유는 뭐냐?"
"확실하게 모르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짐작해 보면 당신을 필요로 할지 몰라.
다혜를 살려놓고 당신도 가능하면 살려둔 채 일을 해결하려는 의도가 아마 그럴 것 같애."
"그렇다면 귀하신 몸들은 어떻게 되냐? 불리할 텐데."
"자신들의 이익이라면 그 정도 배신쯤은 누워서 떡먹기지."
우리는 새벽녘까지 입 아프게 내일 벌어질 상황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웠다,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가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현장에 다혜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밤 이슥토록 세운 계획은 취소해야 할 일이었다.
눈앞에서 다혜를 죽게 하거나 곤욕을 치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혜라는 약도와 메모지를 여러장이나 만들어 핸드백 속에 꼼꼼하게 감추었다.
아마 자구책으로 어떤 조직과 연결해 두려는 계획인 것 같았다.
아침이 되었다.
무섭게 음울하게 느껴지는 신시가지의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조용조용 내린 어젯밤 빗발 때문인지 거리는 다른 날보다 더 말끔해 보였다.
"데리러 오려면 아직 멀었어. 식사도 간단히 하고 마음도 단단히 먹어야 돼.
서두르지 말고 가능하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줘. 난 당신 편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를 믿어야 돼.
당신은 아직도 나를 믿지 않고 있어. 그러면 안 돼. 불쾌하더라도 믿어야 돼."
"지금은 믿는 도리밖에 없잖느냐."
"그 정도로 믿으면 안 돼. 무조건 믿어 줘야 돼."
그러더니 손톰 다듬는 작고 예리한 가위로 팔목을 힘껏 찍었다.
붉은 피가 솟구쳤다.
나는 얼른 혜라의 팔목을 잡았다.
"믿겠다."
"그럼 됐어."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시트를 찢어 붕대 감듯 죄어 묶었다.
나는 혜라가 어떤 여자인가를 새삼 느꼈다.
자신의 확실한 믿음을 위해 자해할 정도로 강한 신념을 엿볼 수 있었다.
순환도로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수로가 많은 평원같은 나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드넓은 전원 풍경 속에 얌통머리 없어보이는 농부들의 아파트가 드문드문 보였고,
저장탑 겸 감시탑이 고속도로 주변에 연이어 있었다.
운전하는 사내는 말 한마디 없었지만 백미러로 가끔 나를 감시하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한국인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건 혜라의 말을 잘 알아듣는 것과 대답할 때 우리 말로 쉽게 대답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혜라도 손가락으로 한국인이라고 시트 위에 천천히 글씨를 써보였다.
"당신들이 납치한 여자는 잘 있소?"
한참 만에 내가 물었다.
"아주 잘 모셔놓은 걸로 압니다."
정중한 대꾸였다.
"당신도 한국인이구."
"그렇습니다."
"자랑스럽소?"
"......"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국인라는 게 자랑스러우냐고 물었소. 내 말 알아듣소?"
"대답을 꼭 해야 합니까?"
사내가 반문했다.
혜라가 말하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나중에 내 말을 기억했다가 혼자 대답을 한번쯤 해 보쇼."
"그러지요."
사내는 갑자기 명랑하게 대꾸했다.
훤틴불루 전경이 멀찍이 보이기 시작하자 혜라는 손가락 글씨로 이렇게 썼다.
'나를 꼭 믿어.'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가볍게 웃는 혜라의 눈빛 속에 이상스럽게도 슬픈 빛이 엿보였다.
나는 그 순간에 내 죽음을 연상해 보았다.
정말 내 한 목숨이 죽는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물거품일 것 같았다.
한 여자를 위해 이렇게 엄청난 모험을 해야 하는가도 생각해 보았다.
사랑하는 여자,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녀의 사랑만은 획득해야 한다고 믿었던 여자,
내 인생을 걸고 사랑하겠다는 각오를 수없이 했던 다혜였지만,
이렇게 목숨을 걸면서까지 그녀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할 가치가 있으며,
내가 죽고 나서 그녀가 내 절절한 사랑만큼 나를 기억해 줄까를 생각하면 아득한 기분이었다.
내가 그녀를 위해 죽을 수 있듯이 그녀가 나를 위해 죽어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