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펜 서울시 문학탐방-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과 서촌
일시:2014년 6월 19일 목요일
탐방장소:선학원(한용운시인), 북촌 안동교회, 윤보선고택, 조선어학회터, 재동백송(600년수령), 심훈모교 옛경기고터(정독도서관), 청와대앞길, 경복궁신무문, 청와대사랑채, 진명여고터(노천명시인모교), 시인부락 동인지창간터(보안여관), 이상시인고택, 세종대왕탄생지
* 한용운 시인과 선학원
이번 국제펜 서울 문학탐방은 안국역에서 10시에 출발하여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의 북촌과 서촌을 중심으로 도보로 진행된다. 가장 먼저 간 곳은 북촌의 선학원이다. 풍문여고가 자리한 별궁길에서 만났다. 선학원은 일제 때 한국의 전통불교를 수호하고 사찰정책에 저항하기 위해 창립된 항일 불교의 본산지다. 일제 불교정책에 저항하고 그들의 사찰령을 피하기 위해 사찰 이름에 '절'자를 쓰지 않고 선학원으로 지었다. 백담사에서 수행하던 한용운은 당시 경성에 오면 이곳에서 숙식했다. 선학원은 해방 후 요동치던 불교계를 불교정화 운동으로 앞장 서서 1.사찰령에 의한 주지 전횡을 폐지한다. 2.불교의 대중화에 힘쓴다. 3.부패된 교단을 혁신하다. 4.사찰재산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승려상을 확립한다. 이런 4가지의 요지를 내세우고 참선에 주력했다. 한용운의 족적이 서린 곳이어서 우리 국제펜 문인들에게는 더욱 뜨거운 시선을 이끈다.
* 북촌 안동교회
북촌 안동교회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신앙과 교육에서 찾은 선각자들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1908년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며 박승봉, 유성준 등을 중심으로 기호학교, 지금의 중앙 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그 이듬해인 1909년에 김창제의 집에서 안동교회가 시작되었다. 100년에 가까운 역사 가운데 안동교회는 수많은 인재를 육성, 배출하여 사회와 교회에 기여하였다. 일제하에서 한글을 지키다가 한글학회 전신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한글학자 이윤재 선생은 안동교회의 장로로 시무했으며, 제2대 윤보선 대통령은 선대로부터 안동교회와 마주하고 있는 자택에서 평생을 지내며 대대로 믿음을 쌓은 교우다. 현재 안동교회는 한국 사회와 교계에 지도력을 가지고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북촌 길에서 만난 안동교회는 소허당이라는 한옥 쉼터와 큰 나무가 함께 자리하여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새로운 100년 이웃과 함께'라고 새겨진 돌비가 정겹다. 바로 길 건너편에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고택이 있어 더욱 한국 역사의 향수를 자아낸다.
* 북촌 윤보선 고택
북촌은 넓은 의미로는 청계천과 종로의 북쪽을 좁은 의미로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 도로인 율곡로를 말한다.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과 가회동의 경계 북촌에 위치한 안국동 윤보선 고택은 고종 1870년대에 지어진 주택이다. 윤보선 전대통령이 거주한 집이다. 1978년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고 2002년 고택의 역사와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438호로 격상되었다. 안채, 안사랑채, 바깥사랑채(산정채), 대문채, 별당, 광채, 부속채 등을 포함한 민가로는 최대 규모인 99칸의 대저택으로 건축되었다. 1910년대에 윤보선 전대통령의 아버지가 매입하여, 이후 4대째 윤씨 일가가 살고 있으며 현재는 윤보선 전대통령의 장남이 거주하고 있다. 140년의 역사가 흘렀는데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가옥으로 전통과 현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소슬대문은 굳게 닫아 밖에서만 바라보았다. 능소화가 아름답게 피어 담장을 장식한다. 바로 길 건너에는 안동교회가 있다.
* 북촌 조선어학회 터
조선어학회는 1921년에 조직된 한글학회의 전신이다. 1908년 국어연구학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어 1931년 조선어학회로 바뀌었다가, 1949년 9월 지금의 한글학회로 정착했다. 창립 초기부터 단순히 국어학 연구만이 아니라 한글을 통해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려 애썼다. 오늘날의 한글날인 가갸날을 정해 매년 기념식을 열고, 한글맞춤법 통일안,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표기법 통일안’ 등을 공표했다. 1942년 9월 일제는 사전편찬 작업을 하던 정태진을 검거하여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낸 뒤 조선어학회 핵심인물 11명을 검거하였다. 1943년 4월까지 모두 33인이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기소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해방 뒤 한글학회는 7년간이나 말살되었던 국어교육을 재개하려는 노력으로 12가지의 국어교과서를 편찬했으며, 일제 말기에 중단되었던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재개하여 1957년 6권 모두 완성했다. 그런 조선어학회 터에 현재는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바로 아래 골목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도서출판사 명문당이 있다.
* 북촌 재동 백송(600년 수령)
헌법재판소 건물의 정문으로 들어가 재동 백송을 만났다. 두 갈래로 우람한 소나무가 하얀 몸통으로 오랜 세월을 지고 잘 지탱하고 서 있다. 재동 백송은 600년의 수령으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갑신정변, 6.25 전쟁에도 살아남은 역사 깊은 생명체다. 또한 재동 백송이 자리한 이곳이 박규수, 홍영식, 최린의 집터였고 우리나라 최초 병원인 광혜원 터다. 재동 백송은 슬픈 역사를 지켜보며 한양역사의 중심이였던 북촌을 아직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다시 헌법재판소 정문을 거쳐 나와서 윤보선 모교인 재동 초등학교도 보았다. 그리고 방정환이 머물렀던 곳과 이상재가 머물렀던 터도 보았다.
* 심훈 모교 옛 경기고터(정독도서관)
오늘날 경기고등학교는 강남구 삼성동에 있지만 과거 이 학교는 서울 북촌 이곳 정독도서관 자리에 있었다. 1976년 강남 개발에 따라 이전했지만 다행히도 정독도서관이 들어서서 학교의 자리는 대체로 보존되고 있다. 1974년 고교 평준화 이전까지는 한국 최고의 오랜 전통을 지닌 명문 고등학교였다. 심훈의 모교이기도 하다. 심훈(1901~1936)은 위대한 시인이며, 영화인, 독립운동가였다. 1917년 왕족 출신인 이해영과 결혼했다. 1919년 3.1운동은 그에게 민족주의자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만들었고 6개월 투옥, 학교 퇴학 등으로 결혼했지만 그의 직업이 없었다. 중국망명을 선택했고, 돌아와서는 동아일보에 입사했는데 안타깝게도 이해영과 이혼했다. 그는 위대한 시 '그날이 오면'을 남기고, 1936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근처에는 또 성상문, 김옥균, 서재필 등의 집터도 있다. 한바퀴 돌아보고 나가는데 정독도서관 입구에 이곳이 중등교육발상지, 성삼문선생살던곳, 화기도감터였라는 안내문이 새겨져 있다. 역사의 한면을 보는 소중한 탐방이다.
* 청와대 앞길
청와대 앞길을 걸어서 이동했다. 청와대 진입로 바대 방향에서 시작하여 걸어 들어갔다. 춘추문이 먼저 보인다. 경호원들이 곳곳에서 지키고 있다. 근엄함이 배인 청와대 앞길이다. 춘추문은 청와대의 기자회견장이 있는 곳이다. 춘추문에서 경복궁 정문인 건춘문에 이르는 삼청동길에는 국제화랑, 그로리치 화랑, 갤러리 현대 등이 있으며, 효자로 쪽에는 진화랑이 있어 예술작품감상의 기회도 가질 수 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개방된 청와대 앞길은 효자동의 효자 삼거리에서 팔판동의 팔판 삼거리에 이르는 길이다. 경복궁 지하철역에서 효자로를 따라 효자 삼거리에 이르면 청와대 사랑방, 분수대, 무궁화 동산, 연무관, 대고각, 영빈관 등이 있다. 청와대 사랑방은 2층의 아담한 건물로, 1층에는 시정홍보와 서울 600년 전시관이 있으며, 2층에는 국정홍보와 국빈선물전시관이 있다. 청와대 사랑채 뒷뜰에는 그늘막이 있어 쉴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대고각에는 신문고의 옛 얼을 담아 김영삼 대통령에게 기증된 북이 걸려 있다. 연무관은 경호실 요원들의 무술 및 체력단련장이다. 1993년 7월에 안가를 헐어내고 조성한 무궁화 동산에는 상징 우물, 자연석 성곽, 휴게소 등이 있다. 무궁화 동산 바로 뒷쪽으로는 주한 로마교황청 대사관과 칠궁이 있다. 춘추문을 시작으로 청와대 사랑채까지 다소 긴장하며 청와대 앞길을 걸어본 체험은 흐뭇했다. 그리고 고운 꽃바구니가 걸린 청와대 앞길을 따라 주변 유적을 돌아보며 경복궁 3호선역까지 왔다. 오늘은 시간이 여유롭지 못하여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다음 기회에 천천히 걸으며 청와대 주변의 모든 것을 볼 것이다. 오늘은 시간이 여유롭지 못하여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다음 기회에 천천히 걸으며 청와대 주변의 모든 것을 볼 것이다.
* 경복궁 북문 신무문
신무문은 경복궁의 북문이다. 신무문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살펴 보았다. 이 문은 엄격하게 통제했는데 때로 시대의 반역자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주역에서 동쪽은 봄(청룡), 서쪽은 가을(백호), 남쪽은 여름(주작), 북쪽은 겨울(현무)를 의미한다. 경복궁의 동문은 건춘문, 서문은 영추문, 남문은 광화문, 북문은 신무문이다. 신무문은 겨울의 문이다. 남쪽 광화문은 불을 뜻하는 여름의 문이다. 신무문은 음이고, 광화문은 양이다. 신무문 천장에는 거북과 뱀이 어우러진 현무도가 그려져 있다. 본래 현무는 거북을 의미한다. 경복궁 건축시에는 이름도 없는 작은 문이었는데 세종대왕이 크게 증축했다. '조광조가 왕이 되려한다는 주초위왕'이라는 나뭇잎을 들고 신무문의 문지기를 매수하여 몰래 들어가 중종을 만나 고하여 기묘사화가 일어났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장이기도 하다.그래서 기묘사화를 '신무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다시는 신무문이 음습한 기운을 드러내지 말고, 음모의 세력들에 의해서 이용되지 않는 문이 되기를 기원하다.
* 경복궁 북문 신무문에서 본 청와대
경복궁 신무문은 북쪽의 문이다. 신무문 바로 앞에는 청와대가 있다. 신무문으로 경복궁에 입장하여 잠시 신무문을 둘러보고 나와서 청와대를 조망했다. 해외여행에서 그 나라의 대통령 궁을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내 조국의 대통령 궁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인왕산이 뒤에서 보듬어주고 있는 청와대 푸른 기와 지붕이 선명하게 보인다. 진입도로와 도로변가루수 나무 사이로 드러나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진 촬영도 가능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경호원들이 곳곳에 있어 국가의 안위와 시민의 안전을 지킨다.
* 경복궁 옆 청와대 사랑채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 바로 앞에서 청와대를 조망하고 조금 걸에 내려오니 청와대 사랑채가 있다. 대한민국의 기념관으로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을 개조하여 만든 곳이다. '청와대 사랑채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는 안내판이 반긴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호를 위해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이 통행 금지된 후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던 지역이었다. 1996년 2월 청와대 앞길을 개방하며 '효자동 사랑방'으로 개관하였다. 다시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개축하여 '청와대 사랑채'로 2010년 1월 개관하였다.우람한 건물 앞에 태극기 3개가 높이 솟구쳐 나부낀다. 애국에 대한 기류가 저절로 샘솟는 청와대사랑채다. 1층에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세계 속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인 인물 등을 소개하는 국가홍보관과 서울의 사적과 음식, 전통 등 서울의 다양한 관광정보를 제공하는 하이서울관 등이 있다. 마침 우리가 탐방한 시간에는 한국 건조 야생화로 책갈피를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어서 나와 수필가인 남편도 직접 우리 꽃 책갈피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2층에는 대통령 60년의 역사와 역대 대통령들이 국빈에게서 받은 선물과 방명록 등을 소개하고, 청와대 대통령집무실도 재현해 방문객들이 직접 집무실을 체험할 수 있는 대통령관,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장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G20휴게관, 국정홍보관 등이 있다. 대통령 자리에 앉아도 보고, 영상 속의 대통령과 사진도 찍고, 경호 포토존 속에 몸을 담아도 보고 청와대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하고 나왔다. 청와대 사랑채 전시관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월요일은 휴무), 관람료는 무료다. 나중에 자손들과 손주들과 함께 와서 우리나라 대통령에 대한 역사와 현실 등을 보고 배우며 체험해보는 시간을 마련해주리라고 다짐했다.
* 노천명 시인 모교 진명여고 터
청와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학교다. 내가 중학교 시절 한때는 이곳 진명여고에 진학하려고도 생각했고, 실제도 동창 친구 하나는 진명여고에 진학했다. 노천명(1911~1957) 시인의 모교다. 담장 밖 벤치에 앉아 잠시 그의 문학적 자취를 더듬에 보았다. 노천명은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 신동아에 '밤의 찬미'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노천명은 1934년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4년간 근무하다가 1938년부터 4년간은 조선일보사 기자로 여성편집인이 되었다. 그의 대표 시 '사슴'은 그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고 고독과 가난으로 일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독신으로 살면서 사슴의 고고한 이미지를 자신과 접목과 하여 쓴 시다. 1957년 길에서 쓰러져 백혈병 진단을 받고 자택에서 숨졌다. 진명여고는 1989년 목동으로 이전했다. 바로 앞에는 청와대로 드나드는 길이 놓여있다. 노변 가로등에 설치된 고운 꽃이 노천명 시인을 기리는 듯하다.
* 시인부락 동인지 창간 터(보안여관)
일제 강점기인 1936년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김광균 등이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한 장소다. 서정주는 이곳에서 장기 투숙하며 동인지 작업을 했다. 보안여관이라는 상호가 걸려있다. 경복궁 영추문 건너편에 있다. 청와대로 진입하는 대로변이다. 편안한 집이라는 뜻의 이 여관은 2004년 문을 닫았다. 폐업하고도 여전히 보안여관이라는 간판을 내리지 않고 있다. 2010년 문화공간으로 바꿔 전시회를 하고 있다. 통의동, '의가 통한다'라는 뜻의 효자로 통의동에 위치한 보안여관에는 아직도 그날의 문학청년들의 기상이 흐른다. 한국 현대문학의 본격적인 등장의 산실이다.
* 이상 시인 고택(제비다방)
이상(1910~1937)이 머물던 고택이다. 그 당시 운영하던 제비다방을 재현해 두고 있다. 기와 지붕과 나무기둥, 벽 등이 고스란히 그날을 담고 있다. 한쪽 벽면에는 조촐한 서가, 한쪽은 다방, 바닥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시인이며 소설가였던 그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여 조선총독부에 잠시 기술공무원으로 근무했다. 1933년 각혈로 조선총독부에 사표를 내고 요양하면서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정지용 등과 만났다. 1934년 구인회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했다. 다방과 카페 등을 경영하다가 실패하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 갔지만 사상불온 혐의로 구속되었다. 구속 후 건강 악화로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커피와 녹차가 준비된 실내에서 지금은 거저로 대접해주는 차 한잔을 마시며 이상의 숨결과 마주하는 체험을 했다.
* 세종대왕 탄생지
경복궁과 청와대에서 가까운 곳에 세종대왕 탄생지가 있다. 세종마을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도로변에 허술하게 설치되어 있다. '서울 북부 준수방(이 근처)에서 겨례의 성군이신 세종대왕이 태조 6년(1397년) 태종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라고 씌여진 돌비 하나가 전부다. 대로에는 차들이 분주하게 왕래한다. 경복궁에 집현전을 두고 그곳에서 연구에 열중하던 신숙주에게 곤룡포를 덮어주었다는 인정 많은 세종대왕이다. 훈민정음을 만들어 한글을 창제했고,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성군', '대왕'이라는 호칭을 붙여 부르는 분이다. 사람은 가고 없는데 그의 숨결은 살아서 아직도 오가는 사람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