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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특권이 만든 경제적 계층을 계급이라고 할 때 일반적인 미국사에서는 보통 사회 계급의 존재를 거의 언급하지 않음.(어쩌면 미국 역사가 그렇게 각색된다고 말할수 있다)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은 두가지 목표를 가짐. 하나는 영국에서 빈곤을 줄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태하고 비생산적인 사람들을 신세계로 추방하는 것. 식민지 전초기지에서는 자유가 없는 노동자(연한계약하인, 노예, 어린이)를 착취했고 이런 계급들을 인간 폐기물로 여김
저자는 미국의 역사적 경험을 계급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함으로써 미국인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자주 무시되었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함
미국인 정체성을 지키는 영원한 부적처럼 기능하는 일종의 황금기를 택해 미국 사회를 미화하고 이상화하는 것도 역사에 대한 선택적 기억 덕분에 가능해짐. 1963년 갤럽의 여론조사 결과, 당시 응답자들은 빈곤층이나 부유층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거부함. 대략 절반정도가 자신이 노동계급이라고 말했고 나머지 절반은 자신을 중산계급이라고 생각함. 이런 결과는 나라 초창기부터 널리 퍼져 있었던 미국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국민적 자부심을 보여준다.
17세기와 18세기 영국령 아메리카에 뿌리를 내렸던 대부분의 식민지 건설계획은 모종의 원시 민주주의가 아니라 특권과 종속 관계에 근거하고 있었다. 1776년(독립선언) 세대는 분명 그런 사실을 소홀히 취급했고 이후의 모든 세대가 이들 건국자들을 본보기로 삼았다.
당대의 탁월한 역사가들은 대부분 뉴잉글랜드 출신이었으며 그들은 역사 서사 만들기라면 따라올 자가 없었다. 지배적인 건국 기원 이야기가 그들에게 유리히게 각색됨. 그리하여 오늘란 우리가 인정 많은 공동체와 훌륭한 직업윤리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청교도 서사를 가지게 된 것임. 종교적 자유와 근면이라는 두가지 속성이 부각되면서 이런 고매한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는 모든 정착민은 아예 기록에서 지워짐.
우리가 어린 시절 생각없이 받아들인 과장된 이야기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내면에 남아 있게 된다. 결과는 마음에 드는 신화들에 대한 더없이 단호하고 강경한 신념을 만들어내는 편협하게 형성된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다. 그것이 바로 ‘미국 예외주의’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르고 독특하며 계급의 부재는 우리의 우월함을 보증하는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라는 생각이다.
포카 혼터스 : 제임스타운의 수호신, 버지니아주와 미국의 어머니. 영국인을 구한 용감한 원주민 소녀-아메리카 원주민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종말에 참여했다는 더욱 넓은 범위의 국민적 합리화에 기여
식민지 정착 초기 신대륙에서 노동 착위 대상에는 다수의 빈민 소년들이 포함됨. 상류층은 원주민과 흑인 노예들을 소유했지만 그들이 가장 많이 착취했던 인구는 아동 노동자들임. 심지어 교회도 이런 계급관계를 고스란히 반영함. 교회 신도 석의 지정좌석이 계급 지위를 확인해주는 식이었다.
유럽에서 넘어온 최초의 미국인들은 실제로 어떤 사회구조, 어떤 식의 사회관계를 만들어 냈는가?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오래전에 확립된 빈자와 부자의 정체성이 미국인의 집단정신에 어떻게 영원한 흔적을 남겼는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음.
세상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다
1장 쓰레기 치우기 : 신계계의 폐기물 인간
식민지 건설이 시작되던 1500년대, 영국에서 아메리카 탐험을 홍보하고 촉진했지만 신대륙에 발을 들인 적이 없는 해클루트는 아메리카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황무지로 규정하고 이곳 불가사의한 땅에 대한 비유로 ‘텅 빈’을 첨가하며 영국의 합법적 목적으로 해당 지역이 공인된 주인없이 이용 가능하며 누군가의 점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함. 이러한 토지 사용 개념은 신대륙에서 미래의 인종과 계급을 분류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
이런 활무지를 개척할 일꾼이 어디서 올까? 해클루트는 영국 경제를 약화하지 않고도 장인들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함. 대부분의 노동력은 급증하는 빈민층이나 노숙자에서 나와야 했다. 해클루트의 아메리카는 그가 ‘폐기물 인간 waste people’이라고 분류하는 노동자 부대를 필요로 함. 이런 사람들이 ‘아메리카라는 단단한 황무지’에 이주하여 그곳을 개발하면 그 곳의 빈민과 영국의 폐기물 인간이 경제적 자산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거대한 구빈원이라고 생각함.
1607년 마침내 체서피크만에 영국의 식민지 전초기지인 제임스타운이 설립됨. 1625년 이전 인디언의 공격 등으로 최초 정착한 6,000명중에 80퍼센트가 사라짐.
현실성 결여, 잘못된 결정, 실패한 이주자 모집 전략 등으로 식민지는 농부와 경작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 됨. 이런 가운데 버지니아 식민지 정착민들이 담배 재배에 성공함. 담배는 식민지를 폐허에서 구출한 공도 크지만 한편으로 건강한 경제 발전을 저해하고 편향된 계급제도를 만들어 냄.(일종의 화폐가치로 쓰임)
인두권 제도 : 두당 일정한 토지를 나누어주는 방식. 대농장주 밑에서 일하는 하인이 많을수록 토지가 많아짐. 연하계약하인들은 일종의 사재기 대상. 1618년부터 1623년 사이 상당수의 고아와 사춘기 소년들이 영국에서 버지니아로 실려 옴.
제임스타운이 일반적인 영국 마을의 모습을 가지려면 담배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더욱 많은 여자가 필요함. 1620년 이후 3년에 걸쳐 200여명의 여자가 대양을 건넘. 여자들의 의무는 결혼하는 것. 미래의 남편이 그들의 뱃삯과 식비를 갚아주는 조건으로 결혼 함. 여자들 각각이 150파운드의 담배로 평가됨. 반면 계급 분화는 확고하게 뿌리를 내림. 토지 소유 여부를 중심으로 생긴 넒은 간극은 대농장주를 소규모 특권집단으로 격상시킴.
1630년 진정한 대규모 이주가 일어남. 윈스럽이 이끄는 11척의 선단에 700명의 승객은 신대륙에 영구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품고 있었으며 이곳 식민지에는 버지니아보다 훨씬 많은 온전한 가족들이 이주해 왔는데 핵심을 청교도들임. 윈스럽은 민주주의를 경멸해서 그는 민주주의를 ‘모든 형태의 통치 체제 중에 가장 형편없는 최악의 체제’라고 평하였으며 청교도들에게 교회와 국가는 상호 협력하에 일하는 관계였음.
청교도 엘리트는 비천한 노동인구에 의존하고 있었음. 이들 사이에도 서열이 있었는데 맨위는 도제와 고용 하인이고 하단에는 채무나 범죄를 저지른 뒤에 노예 상태에 있는 이들임. 1633년 윈스럽은 강도혐의로 기소된 남자를 재판했는데 유죄판결에 따라 남자의 재산은 피해자들의 피해액 변제에 사용하고 이어서 남자는 3년 동안 노예상태로, 그의 딸은 추가 담보로 14년 동안 노예상태가 됨.
생식능력이 있는 여자들을 관리한다는 생각은 식민지의 계급과 재산 개념의 핵심임. 1662년에 통과된 법에 따르면 노예는 출신지나 이교도 여부뿐만 아니라 노예 상태의 여자에게서 태어나는 것으로 규정됨. 영국 어떤 법에도 전례가 없는 일. 어떤 여자의 생식능력은 활용 방법을 치밀하게 계산해야 하는 일종의 천연자원이고 결혼을 통해 교환되는 상품이었음.
노예제도는 해클루트가 생각하는 식민지 계급제도의 논리적 파생물임. 이는 세가지 서로 연관된 현상에서 나온 귀결로 가혹한 노동 조건, 연한계약하인의 상품 취급,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를 낳게하여 착취 가능한 노동력 자원으로 만들려는 의도적 선택
2장 존 로크의 느림보 나라 : 캐롤라이나와 조지아 정착지
제퍼슨은 독립선언서에서 영국의 유명한 계몽주의 사상가인 로크의 말과 사상을 암암리에 빌려 활용함. 로크는 <캐롤라이나 기초헌법> 초안을 작성, 이를 통해 ‘캐롤라이나의 모든 자유민은 흑인 노예에 대해 절대적인 힘과 권한을 가진다’ 라고 인정함. 로크는 왕립아프리카회사의 창립 회원이자 3대 주주였음. 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영국 노예무역 독점권을 갖고 있던 곳.
입헌주의자 로크는 계급구조에 마음을 빼앗겼다. <기초헌법>에 따르면 토지의 5분의1은 지배 지주에게, 다른 5분의1은 식민지 귀족에게, 나머지 5분의 3은 작위가 없는 장원 영주와 일반 자영농에 해당하는 자유 보유권자에게 감. 식민지 특허장을 받은 여덟 명의 지배 지주가 법정 최고 지배기구를 구성했고 해당 기구는 모든 법률에 대해 절대적인 거부권을 가짐.
캐롤라이나 사람들은 귀족과 장원 영주 밑에 있는 독특한 하인 계급, 즉 노예보다는 높고 자유민보다는 낮은 지위에 있는 이들에게 ‘영주 관할인 Leetmen’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관리함. 로크가 말하는 영주관할인은 사회 최하층계급이지만 잠재적인 생산성을 지닌 안정적인 소작농계급임. 지배 엘리트의 재원에는 기여하지 않으면서 무단으로 땅에 얹혀사는 사람들(캐롤라이나 지역으로 이주한 버지니아 출신의 무단토지점유자들) 자리를 영주 관할인으로 대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봄. 영주 관할인들은 토지를 소유한 상류층과 노예 사이에 인종적, 계급적 장벽 혹은 완충지대를 만들어 줌.
<기초 헌법>은 가난한 이주민들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가난한 버지니아 이주민들은 캐롤라이나에 무단으로 토지를 점유하여 바람직한 계급 구분이 사라진 ‘평준화’를 널리 퍼뜨려 식민지 전체를 목락시킬지도 모르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함.
캐롤라이나는 결국 1712년 남북 두개의 식민지로 분할됨. 버지니아와 접하고 있다는 불리한 지형, 높은 비율의 빈민 무단토지점유자들, 태생적으로 불안한 정부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의 논의 주제인 백인 쓰레기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넓고 음습한 습지대의 노스캐롤라이나와 로크가 <기초헌법>에서 그랬듯이 노예제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전통적인 계급 질서의 모든 요소를 도입한 사우스캐롤라이나.
1732년 장군 출신 오글소프가 조지아라는 새로운 식민지 건설을 이끔. 그는 조지아 식민지 건설을 계급관계를 재구축할 유일한 기회로 보고 빚으로 감옥에 간 사람들과 빈민을 이주시켜 재기의 기회를 주고자 함. 로크가 말한 노예나 마찬가지인 영주 관할인을 대신할, 그보다 인전적인 대안을 제공하자는 것. 조지아는 노예제도를 금지하고, ‘자유민 노동’이 아프리카 노예와 연한계약하인에 대한 의존을 대체하고자 함.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건설되지 않은 미국내 정착지는 조지아가 유일함. 조지아 식민지 건설의 목적은 두가지, 남북 캐롤라이나 식민지를 장악한 부의 양극단 사이에서 중간지대를 개척하고 플로리다 지역의 에스파냐 사람들과 맞설 장벽 역할을 하게 하는 것. 개별 정착민의 토지 소유를 최대 500에이커로 제한하는 보수적인 토지 정책 덕분에 인접한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만연한 대농장주 중심 경제성장과 노예를 토대로 하는 과두지배를 막을수 있었음. 영국 스코틀랜드 등 유럽 여러지역에서 오는 가난한 정착민들에게 무상으로 50에이커의 땅을 제공하는 등 ‘자유민 노동’을 토대로 하는 식민지 건설이 목적임.
오글소프가 현대적인 의미의 평등주의자는 아님. 그가 원칙적으로 노예제도를 금지한 이유는 노예제도가 조지아 식민지 내에서 계급 권력의 균형을 바꾸고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을 굶주리게’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 조지아는 또한 토지를 장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장자상속을 제도화함. 이런 제도는 땅을 팔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을 가난한 아버지들이 땅을 팔지 못하게 함으로써 상속자들 보호하는 역할도 함. 그러나 미혼 딸들과 젊은 미망인의 미래는? 결국 자연스러운 ‘자손 번식’ 과정을 장려하는 것
1734년 이곳에 공동체를 세운 독일 루터교 시각에서 조지아가 사우스캐롤라이나처럼 되어 간다는 위험한 징후들을 봄. 오글소프는 1743년 식민지를 떠났고 이후 10년에 걸쳐 토지 소유권 정책이 바뀌고 노예가 비밀리에 판매됨. 1750년 조지아 정착민들에게 노예소유권이 공식적으로 인정됨. 그렇다고 오글소프의 철학과 정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님. 프랭클린과 제퍼슨은 노예소유가 백인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오글소프의 생각에 동의함.
3장 벤저민 프랭클린의 미국종 : 중간층 인구통계
1740년대와 1750년대, 프랭클린은 개인적으로 계급 및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과 관련하여 진행 중이던 논쟁에 참여하고 기여할 위치에 있었음. 평범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성공한 인쇄업자가 된 프랭클린은 여러 인물로 분해서 글을 씀. 성숙한 미망인, 아프리카 노예, 바람난 아내를 둔 상인등.. 1751년 펜실베이니아주 의회 의원에 당선된 이후 사회사업에 열성. 전기와 관련된 여러실험이 유럽에 강한 인상을 줌. 이후에 체신부청장에 임명됨
그의 주된 관심 대상은 과학 지식을 가장 복잡한 주제, 즉 계급의 탄생에 적용하려는 노력임. 프랭클린의 기여는 논의의 중심을 인간생물학으로 이동시킨 것. 안간의 모든 노력의 기저에는 직감 수준의 동물적인 본능이 있다. 프랭클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과 쾌락의 줄다리기. 지나친 쾌락은 퇴폐적인 사회를 야기한다. 반면에 지나친 고통은 폭정과 압제로 이어진다.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행복한 중용, 즉 인간의 좀더 바람직한 동물적 본능과 통하는 사회가 있다고 봄. 프랭클린은 북아메리카가 이런 행복한 중용을 달성할 환경을 제공했다고 봄.
대다수는 자원을 둘러싼 광적인 경쟁 대신 중간 위치를 점하는데 더없이 만족함. 프랭클린은 사회의 상층도 하층도 아니고 중간에 있으면서 만족하는 사람들을 ‘행복한 중간층’이라고 부름.
직접 노동을 하지 않는 노예소유주들은 많은 신체적 문제에 시달림. 그들은 “쇠약해졌고 따라서 전반적으로 생식능력이 그리 왕성하지 못했다” 요컨대 프랭클린은 노예제도가 영국인들을 나태하게 만들뿐 아니라 성적으로도 무력하게 만든다고 결론 내림.
프랭클린은 북부 식민지들을 위해 오글소프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규모로 자유민 노동지대를 만드는 것을 구상함. 새로 태어나 아이들이 노동자가 되어 연한계약하인과 노예를 대체할 것으로 봄. 결국 신민지 인구 증가가 영국의 상업과 제조업 성장으로 이어질 것으로 봄.
프랭클린의 생식 이론은 다가올 수백년 동안 미국 예외론의 핵심요소로 남게 됨. 그의 인상적인 세가지 주장은 1. 계급 안정과 동시에 서부로의 이주가 진행될 것 2.인구 분산이 계급 갈등을 줄이고 좀더 광범위한 부의 분배를 촉진할 것 3.중간 계급의 상황이 개선되어 ‘유복한 증간층’이 형성될 것
프랭클린의 이론이 얼마나 현실적이었을까? 인간의 본성은 고통과 쾌락에 대한 정해진 반응이라는 기계론적인 모델을 따르지 않으며 프랭클린이 말하는 전능한 자연의 손길은 다른 힘들, 즉 강력한 정치와 문화적인 힘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음. 부지런히 움직인다고 해서 사회적 계층이동이 가능하다는 보장은 없음. 근면은 자체로 경제적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해주지 못했으며 대가족이 항상 유리하다는 프랭클린의 주장이 옳지도 않음.
프랭클린은 몸소 경험하고 실천했음에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이동을 결코 지지하지는 않았음.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계급이 더욱 평등해지기를 바랐지만 이는 빈민 계급을 계속 유지하는 조건에서의 희망사항이있음. 프랭클린의 이론은 당대에 널리 퍼진 영국인의 사고에 기초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음. 프랭클린은 개혁가라기보다는 어떤 것을 대중화시키는데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임. 그당시 페인Thomas Paine은 프랭클린의 미국종American breed 이론의 변형 버전을 청중들에게 제시함. 미국종은 본능에 충실하고 젊은이다운 패기로 앞으로 나아가는 기상을 타고났다고 생각함.
미국독립혁명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 알려진 페인의 소책자 <상식>에 따르면 그의 핵심 주장은 유럽인의 후손인 아메리카인은 제국주의 정복이 아니라 자유무역에 맞게끔 길러진 종족이라는 것. 페인은 상업을 계급 구분을 완화시켜주고 영국과 아메리카 상인들 모두의 이해관계를 통합해 주는 일종의 접합제 같은 것으로 봄. 상업제도가 효과적으로 기능하려면 안정적인 계급제도가 필요하지만 혼자서 일을 처리하는 머리 둔한 왕은 필요치 않음.
페인이 보기에 1776년 아메리카의 헥심이슈는 새로 들어선 독립정권이 여러국가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나아가느냐였다. 말하자면 운명 개척은 기정사실이었고 속도가 문제였다. 페인은 상업과 대륙에서의 영토 확장으로 인한 막강한 힘이 나태를 제거하고 불균형을 바로 잡을 것으로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