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문(大覺門)
초의선사 유적지(草衣禪師 遺跡地)는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943번지 일원(목포시와 무안군의 경계선에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초의(艸衣) : 조선 정조 10년(1786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흥성 장(張)씨이며 이름은 의순(意恂)이다.
초의(艸衣)라는 호는 출가 후 스승 완호(玩虎) 윤우(倫佑)로 부터 받은 것이며 일지암(一枝庵)은 재호(齎號)이다.
15세 때 나주시 남평에 있는 운흥사로 출가하였으며 19세때 해남 대둔사(大芚寺)에서 완호(玩虎)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탱화를 잘그려서 당대 오도자(吳道者)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한국 최고의 근대화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초의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서예는 천의무봉(天衣無縫) 바로 그것이었다. 강진에 유배중이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으로부터 유학과 시문을 배웠으며 완당 김정희(金正喜)등 당대의 석학들과 종파를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39세 때 대흥사 뒷편에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하고 이곳에서 초의선(艸衣禪),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專)등을 저술했다.
55세(1840년)에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종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宗師)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58세(1843년)에 고향을 찾아 집은 다 허물어가지고 잡초만 무성한 부모의 무덤을 보며 눈물로 시를 지었는데 귀고향(歸故鄕)이라는 시이다.
1866년(고종 3년) 8월 2일 입적하시니 세수(世數) 81세요 법랍(法臘)은 66세였다.
초의선사 살아온 길
15세
출가, 운흥사(雲興寺 나주군 다도면 덕용산)벽봉선사(碧峰禪師)로부터 수계(受戒)하였고,
19세
영암 월출산(月出山)에서 상봉에 떠오르는 둥근 달을 바라보며 크게 느꼈다고 한다.
22세
쌍봉사(雙峯寺)에서 토굴생활,
24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선생과 백련사(白蓮寺)에서 첫 만남을 가졌고
30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과 서울에서 첫 만남, 이 세분이 이후 오고 간 시서화차(詩書畵茶)에 얽힌 인연은 선비 세계의 격을 최고의 경지까지 끌어 올렸다.
32세
불국사(佛國寺)에서 득도(得道).
41세
일지암(一枝庵)
45세
다신전(茶神傳) 정서(正書).
48세
추사선생 아버지 유당 김노경(酉堂 金魯敬) 선생 일지암 심방.
50세
소치 허련(小痴 許鍊)룡선생이 찾아와 사사(師事 당시 27세). 일지암에서 수업했다. 초의스님과 소치 선생의 이 인연· 그리고 추사선생에게 이어져 화가로서 대성 운림산방(雲林山房) 4대에 걸친 도도한 화맥의 원천 구실을 했다.
52세
우리나라 다도(茶道)의 성서격인 동다송(東茶頌) 저술
55세
추사선생이 제주도 대정(大靜)에 유배되자 그곳까지 세 차례나 찾아갔다.
56세
추사의 유배지에서 쓴 글씨 일로향실(一爐香室)을 소치편에 보내왔는데 이 글씨는 현재 해남 대흥사 동국선원(東國禪院)에 각(刻)이 되어 걸려있다.
58세
고향인 무안군 삼향읍 석현리에 들렀고 이 감회를 시(歸故鄕)로 읊었다.
71세
천상천하 둘도 없는 벗 추사 별세. 나이도 같은 이 두 사람의 우정은 눈물겹도록 뜨거웠다.
81세
8월 2일(음) 일지암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저서 : 초의시교, 초의선과, 동다송, 일지암문집, 선문사변만어, 다신전, 선문염층, 문자반야집, 진묵조사 유적고,일지암시교 4권 401수 여러 유학자와 화답한 60여수 등
<출처 : 무안군청>
초의선사 현창사업 공덕비
차밭
명선 : 茗(차싹 명)禪(고요할 선) : “차와 선은 같다.”
초의선사 동상
초의바위
일지암(一枝盫) *盫암:그릇의 뚜껑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말년에 기거하며 손수 차(茶)를 일구던 다원(茶園)으로서 해남 두륜산 아래 있는 일지암을 본떠 지은 것이다.
현판 ‘일지암’은 보통은 암자 암庵을 쓰지만 뚜껑 암盦을 썼다.(정약용의 아들 유산 정학연의 글씨)
관세음보살여의주수진언(觀世音菩薩如意珠手眞言)
'옴 바아라 바다리 훔 바탁 (Om vajra vatara humphat)'
초의선사기념관
명선관
다성사茶聖祠 : 초의선사를 모신 사당
동다송비
금오초당 金鰲草堂
금오초당 金鰲草堂 현판
조선차역사박물관
용호백로정(蓉湖白鷺亭)
초의선사 생가
귀고향(歸故鄕. 58세(1834년))
遠別鄕關四十秋
歸來不覺雪盈頭
新基草沒家安在
古墓笞荒履跡愁
心死恨從何處起
血乾淚亦不能流
孤笻更欲髓雲去
已矣人生傀首邱
'멀리 고향을 떠난 지 사십여년 만에희어진 머리를 깨닫지 못하고 돌아왔네.새터의 마을은 풀에 묻혀 집은 간 데 없고,옛 묘는 이끼만 끼어 발자욱마다 수심에 차네.마음은 죽었는데 한은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는가.피가 말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네.이 외로운 중(僧)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아서라 수구(首邱) 한다는 말 참으로 부끄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