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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골의 풍장 문화를 알아봅시다. 몽골의 초창기 풍장의 풍습은 매우 특이하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라마승에게 운구하는 날을 택일하고, 흰색 천에 시신을 싸서 소달구지에 실어 나른다. 이 때 외지인은 물론 친지들도 여기에 따라갈 수가 없고 오직 운구를 하는 한 사람이 소달구지를 몬다. 정처 없이 마냥 가다보면 시신이 실린 달구지가 덜컹거리기 때문에 시신이 흔들려 나중에는 땅에 떨어진다. 이곳이 바로 사자(死者)의 최후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운구를 한 사람이 그 자리에 돌아와 시신의 상태를 살피는데, 시신이 짐승들에게 많이 뜯겨 먹혔으면 기뻐하고, 시신이 그대로 있으면 사자를 향해 욕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며칠 후면 시신은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된다. 경고 심약자 뒤로 가기 A. 고인 (시신) 사진 주의 B. 극혐 사진 주의 2. 1956년 이전의 몽골 풍장 1921년 혁명을 성공한 몽골은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풍습을 받아들여 관혼상제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큰 변화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장례 풍습으로 풍장에서 매장으로 바뀌었다. 몽골의 장례 즉 풍장은 16세기 이후 라마교의 도입으로 전래되어 와서 장례의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300년 가까이 라마교가 국교로 인정되어 풍장이 전국적으로 널리 전파되었으며, 근대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1956년 전까지 일부 오지에서는 풍장이 몰래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몽골인들은 체질적으로 땅을 파는것을 싫어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곳 현지에서의 느낀 점은 일 년의 반 정도가 땅이 얼어 있기 때문이다. 10월 중순부터 언 땅은 3월 말이나 되어야 녹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약 1.5m 깊이의 언 땅은 돌 보다 더 단단하다. 여름에도 땅을 파는 작업이 쉬운 것은 아니다. 무성한 풀뿌리까지 얽힌 땅은 삽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따라서 무덤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고대 연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시기에 언 땅을 파서 무덤을 만든다는 것은 중노동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풍장의 도입은 몽골인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으리라 생각이 된다.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지하 세계의 주인은 '로씬 항'이라는 물의 신이 사는 곳이라 그의 세계를 침범하면 큰 재앙이 온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 치면 '용'이 사는 곳이다. 즉 수맥을 잘못 건들이면 '로씬 항'의 노여움을 사서 갑자기 다리 병신이나 손 병신이 된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혁명 후에는 땅을 파서 매장을 하되 이런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반드시 라마승에게 점을 보고 매장을 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몽골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는 미신이다. 생존에 위협을 받는 혹독한 자연 환경을 경외하는 몽골인들의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몽골인들의 삶은 자연 그 자체이다. 수 천년을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이들에게 자연을 거부하고 맞서는 행동은 자연의 법칙에 벗어나는 바로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미신이 널리 퍼진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전통식은 사람이 죽으면 고인의 얼굴에 하닥을 덮고, 시체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합니다.
이때 장지는 라마승이 정하는데 , 땅에 하닥.차.돈 등을 놓고 사슴뿔로 선을 긋게 됩니다. 그러면 시체는 그 금 안의 땅을 파서 묻고 라마식 독경을 하면서 곡식의 이삭을 뿌리게 됩니다. 그리고 장례후 21일째 되는 날 천도제를 지내죠. 소련식은 사람이 죽으면 가족과 친지들이 모두 모여서 밤을 지새며, 유언을 전하고 상속절차를 밟습니다.
관 뚜껑은 열어 고인의 얼굴이 보이게 하고 조문객들은 가족을 위로하며 고인의 얼굴에 얼굴을 맞대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은 트럭에서서 관을옹위하고 공동묘지에 도착한 후에 매장을하면 장례는 끝납니다. * 묘지의 구분은 노출될까봐 매장한 시체위해 시멘트를 이겨 위에 덮는것입니다. 들어 시멘트로 묘지 안바르기 운동도 일어 나는것 같습니다.
몽골인들에게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여러 가지 장례 풍습이 있다. 전통적으로 왕족과 귀족, 화신이나 고승, 무당을 장례하는 풍습과 평민들을 장례하는 풍습이 달랐으며, 빈부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다.
무당은 초원이나 산에 천막을 짓고 헹게륵(무당이 사용하는 북)과 함께 3년간 둔 후 다시 2차 장례를 행했다. 일반 사람들은 대개 풍장을 했다. 풍장을 할 때는 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게 하고 흰돌을 고여 주었다. 예전에 왕족은 매장을 했는데, 묻는 곳에는 사람이 다니는 것을 금했으며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높은 산이나 무성한 숲, 깊은 물 속에 시신을 숨겼다. 왕이 운명하면 관을 만들었으며 시신을 입관할 때는 털 있는 델을 입히고, 털 달린 모자를 씌우고 구두를 신기고 허리띠를 매었다. 관에는황금 그릇과잔, 젓가락을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그런다음 황금색 끈으로시체를 묶었다. 관은 흰 펠트와 금사로 짠 비단으로 둘렀다. 운명 뒤 삼 일 후 장지로 결정된 장소로 출발했는데, 시신 앞에는 무당이 말을 타고 황금 안장을 얹은 빈 말을 끌고 갔다. 시신을 매장한 후 말과 가축으로 땅을 다지며 팠던 흙을 다른 곳으로 져 날랐다. 시신을 묻은 장소를 누구도 알아내지 못하게 될 때까지 땅을 고르게 다졌다. 어떤 경우 어미 낙타가 보는 앞에서 새끼낙타를 죽이고, 그 다음해 어미를 시신을 매장했던 지역에 데리고가 풀어놓으면 어김없이 새끼가 죽은 곳으로 달려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매장 방식은 무덤 유물이 도굴되는 것을 막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무덤이 파헤쳐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유목민들의 서사시를 보면 적이나 원수에 대해 잔인한 보복을 하는 것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는데, 부족이나 한 나라의 지배자를 아무도 알지 못하게 철저히 숨기는 것은 아마도 적으로부터 시신을 보호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칭기스칸이나 쿠빌라이칸 등 몽골 대칸들의 묘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칭기스칸은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장례행렬 도중에 만나는 모든 생명체를 죽음에 처했다. 고인을위해 부장품으로 많은 가축을 죽이거나 어떤경우에는 산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어거데칸이 즉위했을 때 40여 명의 고관대작의 딸을 선발하여 보석과 장식으로 치장한 후 말과 함께 칭기스칸의 영혼에 제물로 바쳤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이렇게 왕족은 매장을 주로 했으며, 왕족이나 귀족, 고승의 경우 때에 따라서 화장을 하여 뼈를 날리거나 탑에 넣어모시기도했다. 어떤때는 미이라로 만들어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도했다. 몽골의 가장 보편적인 장례법은 풍장이었다. 그 후 매장 방식이 바뀌었으며 현재는 매장이 일반적인 장례법이 되었다. 고인을 매장하는 절차는 땅을 택하고, 시신을 집안에 모시고 애도를 표하고, 땅에 묻는 순서로 이루어진다. 장지를 택할 때는 전문적인 기관에서 도움을 받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신을 장지로 모셔오기에 앞서 일정한 절차를 행한다. 먼저 하득을 묶어 장지를 구별하고 금줄을 긋는다. 그리고 삽이나 곡괭이로 땅을 파는데, 매장할 땅의 깊이는 너무 깊지 않게 1.5m 정도로 파고, 성인의 경우 길이 2m, 폭 1m 정도로 한다. 매장할 때는 주변은 시멘트 등 다른 것으로 발라 막을 수도 있으나 밑에 땅은 그대로 둔다. 이렇게 바닥의 땅을 그대로 두는 것은 태어난 고향의 따스한 대지의 품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묻는 것을 존숭하는 풍속 때문이다. 이렇게 무덤을 만들어 그 위를 다진 후 비석을 세운다. 고인의 시신은 장례를 치를 때까지 집안에 편히 모셔 애도를 표한다. 시신을 집안에 모실때는 집안의 물건을 치우고 남자인 경우 서쪽, 여자의 경우 동쪽에 모시며, 존귀한 사람인 경우 게르의 중앙 상석에 모신다. 머리는 문 반대쪽으로 하며 상석을 향하도록 하고, 그 위쪽에 고인의 사진을 걸어 놓는다. 게르인 경우 천창의 덮개를 덮고 문을 닫지만 일반 집인 경우 작은 환기창을 열어 환기를 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향을 피워 공기를 정결하게 한다. 사람이 죽으면 관을 준비해 잘 손질하고 장식해야 한다. 관 뚜껑은 흰색이나 푸른색 천으로, 관 안은 부드러운 노란색이나 흰색 천을 사용한다. 푸른색은 영원한 하늘, 노란색은 황금빛 대지를 상징한다. 꽃 장식은 영원함을 상징하는 푸른색 꽃이 중심이 되며, 사랑의 상징인 노란색, 순결의 상징인 흰색으로 만들어 장식한다. 또 부장품으로 나이 드신 어른인 경우 지팡이를, 여자인 경우 바늘이나 실, 아이인 경우 장난감 등을 넣어 준다. 또 고인이 평소 좋아했던 것을 넣을 수도 있다. 시신을 내갈 때는 문턱에 나무를 가로질러 놓고 시체의 머리 부분부터 나가게 한다. 이렇게 머리를 먼저나가게 하는것은 고인의 혼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게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장례 행렬의 가장 앞에는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그 뒤에 유가족과 사람들이 뒤따른다. 영구차에 시신을모실때는 가장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관을들어 위에 옮겨 고인을 편히 모신다. 장지에 가는 길에 유가족들은 소리 내어 울지 않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간다. 눈물을 흘리면 죽은 이의 영혼이 물에 빠져 가는 길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속은 곡을 하고 소리를 매기며 슬픔을 표하는 우리의 풍속과는 사뭇 이질적이다. 고인이 장지에 당도하면 스님이 장지의 주변에 금을 긋는다. 무덤 오른쪽에 시신을 매트 위에 내려놓고 머리를 높은 쪽으로 둔다. 구덩이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모든 사람들이 소리 없이 이별의 의식을 행한다. 보통 스님이 경을 읽으며 쌀이나 먹을 것 등을 뿌려 올리며 수신, 산신을 기쁘게 한다. 의식을 주관하는 자가 의식에 필요한 말을 간단히 한 후 친지들은 관에 손을 대며 사랑의 마음을 표한다. 고인이나이가 아주많은 경우,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관에 이마를 대어 존경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런 다음 시신을 무덤에 모신다. 땅에 묻을 때는 여러 종류의 차, 가죽, 펠트 조각, 흰 돌을 넣기도 한다. 그러나 돈을 많이 넣는 것은 적합지 않게 본다. 그리고 가축의 젖, 보리와 쌀 등을 무덤에 뿌리고 관을 넣는다.
이렇게 흙을 쌓아올릴 때는 돌을 뿌려놓거나 꽃이나 씨앗을 심어둔다. 장례가 다 끝나면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무덤을 3번 돌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갈 때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오던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서 간다. 그것은 혼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돌아오는 길에 검은 새나 콘도르와 같은 새를 만나면 길하게 여긴다.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유가족들이 풍요롭게 살게 된다고 하고, 말채찍이나 말장대를 얻으면 가축이 번성해진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게르를 다시 짓고 스님이 경을 읽은 후 일정한 의식을 행한 후 다시 게르를 내리고 두세 번 다시 이동을 했는데, 이것은 유가족들이 죽은 영혼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당 양쪽에 불을 피워 놓으면 장지에서 사람들은 불 사이를 지나 몸을 정화시키고 준비해 놓은 물이나 햐름( 물에 가축을 젖을 넣고 끓인 것) 또는 알코올을 솜에 적셔 손을 닦는다. 또 향을 피워 주변을 정화시킨다. 집에 들어와 차와 음식을 먹지만 술이나 포도주 등은 마시지 않는다.
찾아온 손님들에게 뿐 아니라 유가족은 조의금을 낸 사람, 직장 사람들, 아는 주변 사람에게 이러한 물건을 준다. 최근에는 비누, 향도 많이 주는데 이것은 정화의 의미를 가진 물건이라 할 수 있다.
또 이날 어린 아이와 암캐를 배불리 먹이면 고인의 영혼에 좋다 하여 많은 가정에서 이러한 의례를 행한다. 만약 죽은 이의 영혼이 어떤 사람에게 숨어들어 있다면-대체로 고인이 사랑하는 어린아이에게 혼령이 숨어든다고 한다- 영혼을 떠나 보내는 의식을 행한다. 요즘에는 스님을 모셔 이러한 의례를 행한다. 고대에는 상장례를 무속 의례로 행해지고 그 후 불교가 습합되어 행해졌다면, 최근에는 서양 장례법이 혼재된 형태를 띠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은 영혼은 자신의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집안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상의 영혼을 불만스럽지 않게 하기 위해 예를 표하고 제물을 드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음식을 새로 마련하거나 특별한 음식이 준비되면 먼저 단 위에 올려 조상께 드리는 풍습이 있다.
* 장례에 관계된 금기 * * 임신한 여자가 죽으면 반드시 태에서 아이를 꺼내고 묻는다. 어미에게서 태어나지 못한 아이의다음 길에 장애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 고양이를 고인 옆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시신 위로 뛰어넘어 혼령이 길을 잃게 하여 고통을 준다고 한다.
* 사람이 죽은 후 49일 안에 가축을 거세하거나 죽이지 않는다. 거세를 하면 고인의 영혼에 죄가 되어 다시 태어날 때 자식이 없거나 남녀를 모르는 양성이 된다고 한다.
* 사람이 죽으면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면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혼이 숨어들고 고인의 이름을 부른 사람은 복이 나간다고 한다. 자기도 모르게 이름을 불렀다면 “퇘”하고 침을 뱉어 부정을 씻는다.
* 시신을 게르에서 내갈 때는 문으로 내보지 않고, 게르 벽채자락이나 문과 벽채 사이로 내보낸다. 게르가 아닌 일반 집에서는 창으로 내보냈다.
* 시신을 집 문으로 내갈 때 나무나 깔개를 놓고 내간다. 그리고 이렇게 사용한 나무는 장지에 가져가 태운다.
*문지방이 높은 게르에서 사람이 죽으면 생명을 지키고 나가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운명하기 전에 보조 게르나 문턱이 낮은 게르로 옮긴다. 시신을 내가면 즉시 가시 있는 붉은 하르간으로 게르의 안쪽 여기저기를 내리치는데 이것은 남아있는 사귀들을 쫓은 의례이다.
* 시신을 샘물 가까운 곳에 묻지 않는다.
* 한 그루 나무로 두 개의 관을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또 다른 죽음을 부른다고 한다.
* 어린 아기가 죽이면 땅에 묻지 않는다. 다시 태어나는 데 장애가 된다고 한다.
* 수의를 만들 때는 호랑이 띠인 사람에게 만들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유가족에게 해가 미친다고 생각한다.
* 시신을 매장하고 무덤을 만들 때는 앞뒤에서 흙을 퍼올리지 않고 옆쪽에서 퍼올린다. 앞쪽에서 흙을 푸면 고인이 가는 기에 구멍을 파는 것이요, 뒤에서 파면 의지처를 잃게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 고인을 단추가 있는 옷을 입힌 채 묻지 않는다.
* 사람이 81세에 죽는 것을 피한다. 만약 81살에 죽었다면 한 살을 더하여 82세로 하여 나이를 숨긴다.
* 유가족과 자녀들은 100일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
* 가까운 형제자매들은 머리를 빗거나 땋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
* 외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은 곧바로 집으로 들여오는 것을 꺼린다.
* 장지에서 돌아와 시신을 싣고 갔던 말을 곧바로 말 떼에 섞어두지 않는다.
* 식구 중 특히 부모가 죽으면 다른 사람과 인사를 하지 않으며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웃에 마실갈 때는 술을 마시지 않고 코담배를 차고 다니지 않으며, 옷 앞섶에 단추를 채 우지 않는다.
* 집에 아픈 사람이나 시신이 있으면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금줄을 치거나 표를 세운다. (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