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달력을 두 장 남겨두고 있거나 말거나 나는 칸트의 美學에 푹 빠져
아무 정신도 계획도 없어요. 페리호를 타고 인도양을 딱 한 번 항해했는데
망망대해가 하도 무심하고 만만해서 하마터면 구명조끼 하나 입고 뛰어들뻔
한 적이 있었어요. 당시 보스였던 우도쿼츠크나베가 제 말에 맞장구를 쳐
주지 않아서 입수 직전에 멈췄는데 만약 그때 입수를 했다면 어쩔뻔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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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6개월 후에 쓰나미가 덮쳐 한국인을 포함 많은 사람들이 물에 수장
되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났으니 말인데요, 쓰나미는 물속 대륙간의
충돌(지진)로 생긴다는데 스파크가 나는 순간 물기둥이 하늘로 솟는 풍경은
가히 판타스틱이라고 합디다. 판단력 비판에서 말하는’역학적 숭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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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숭고미는 절대적으로 큰 것, 그리하여 주체를 압도해버리는 대상에
대한 심성 상태입니다. 여기엔 부조화의 감정이 연관됩니다. 감각의 모든
기준을 넘어서 버린 느낌, 감 관의 좌초 앞에 상상력과 지성이 일시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숭고미는 기본적으로 취미판단과 같은 美의 범주에 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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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숭고미도 주관적 쾌·불쾌에 관계되고—이 말인즉 숭고 역시도 그 자체로
만족스런 판단입니다—이는 논리적인 규정적 판단력이 아닌 특수로부터 보편을
추론해야만 하는 반성적 판단력이란 뜻입니다. 마찬가지 성질들 역시 공유
하는데, 숭고미는 쾌적함에 관계되지 않으며 개념적 규정으로부터도 독립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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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다(무 개념적). 취미판단처럼 단칭판단이되 보편타당함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취미판단과 숭고미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미가 질(quality)의 표상이라면, ’숭고’는 양에 중점을 둡니다.
미에서 생겨나는 쾌는 생명감정을 촉진하는 반면, 숭고의 판단에서 수반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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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간접적인 쾌에서 생겨나는 제약된 것이며, 아름다운 대상이 그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서 있어서 합목적적인 반면, 숭고는 감관을 통해 수용하는
우리의 능력을 좌초시킨다는 점에서 반목적적입니다. 이것이 칸트에게 가장
중요한 무관심한 美 미와 ‘숭고’의 구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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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적 숭고뿐만 아니라 ‘역학적 숭고’ 역시도 무한에서 위력으로 넘어갔을 때,
뇌우, 화산, 허리케인, 폭풍우 등 자연력의 위력을 목도 했을 때 몰려드는
공포가 상상력을 마비시킬 것입니다. 저 위력들은 자유의지를 짓밟고, 지성을
중단시키지요. 그러나 위력으로서의 숭고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이성을 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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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는 촉매로서 기능합니다. 다만 이 경우엔 순수이성보다는 실천이성의
도덕 이념이 강조되는데, 역학적 숭고를 반성함으로써 물리적으로 압도하는
대상 앞에서도 저항할 수 있는 역량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숭고'를 느끼면서
우리는 만약 최고의 도덕 원칙이 위태로운 상황일 경우, 필요하다면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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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그리고 심지어 삶 그 자체보다 우리 자신을 더 중시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취미판단에서 주된 역할을 수행 하는 상상력은
숭고에게 와서는 무한/위력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촉매/전달자로서 역할이 변모합니다. 그러니까 상상력은 취미판단과 숭고라는
두 영역 사이에서 이중적인 역할 수행을 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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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판정’에서는 상상력과 지성 사이의 자유로운 조화로부터 미적 판단이
생겨 난데반해 숭고의 판단에서는 상상력은 도덕에서 그 기준을 취하면서
이성 이념을 추구해요. 이런 경우 美의 경우만큼이나 자유롭지는 않지만,
상상력은 도덕에 의해 규정되기보다는 미적 경로를 통해 가능성을 발견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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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위가 정말로 도덕적이고 심지어 종교 적이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두려움에 저항하는 숭고를 느끼고자 한다면 자율적
판단에 대한 능력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이해한 대로 정리하면 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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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는 '취미'와 '숭'고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두 번째 숭고는 수학적 숭고(나이야가라
/이과수 폭포)와 역학적 숭고(천둥/토네이도)로 구분합니다. 거대한 자연을 만나면
이성이 마비(불쾌)되면서 초월적 이성을 작동, 무한을 사유하게 한다 네. 이와 동시에
불쾌가 쾌감으로 바뀐대요. '무서워'가 '언 빌리버블'이 되는 건가.
'역학적 숭고'란 천둥이나 토네이도같은 것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다가 내가 관조
자의 입장이 되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쾌가 된다는 것이 칸트 형님의 이론입니다.
포스트모던의 관점에서 '숭고'는 업그레이드를 위해 출격하는 비밀병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