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는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한다. 중국의 경우 한대부터 성행했는데, 처음에는 석주를 세우거나 간단한 제액을 써서 표시했을 뿐이고 묘비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한 것은 진·송대에 들어서였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부터 묘비를 세우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신도비를 세우는 것이 성행했는데, 태조의 능인 건원릉(建元陵), 세종의 능인 영릉 등 왕릉 앞에 세워진 것이 있다. 사대부의 경우에도 생전에 세운 공로나 인품을 기록하여 비석을 크게 세우는 사례가 많았다. 귀부와 이수를 갖춘 형식이나 귀부는 생략하고 이수만 갖추기도 했다.
정철신도비 정철 신도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遯齋(돈재) 李公神道碑(이공신도비) 전경]
북비 고택 앞 길건너에 자리하고 있다.
[신도비 안내석 글 내용]
李碩文(이석문) 자 士實(사실) 호는 돈재다.
1762년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의 반목으로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할 때 왕명을 무릅쓰고 세손(후일의 정조)을
업고 들어가 영조에게 부당함을 간하다
곤장을 맞고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무괴지심(떳떳하고 부끄러움 없는 마음)이란
편액을 벽면에 써 붙이고 조석으로 대좌하며 두문불출 하였다.
후일에 영조가 다시 훈련원주부를 제수하고 조정의
대신들이 출사를 권유 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사후에 병조참판에 증직 되었다.
그의 손자 이규진이 장원급제 했을 때 정조가 특별히 불러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 아직까지 너의 집에 북녘으로 낸 문이 있느냐"
고 하였다.
[李公神道碑(이공신도비)]
영릉 신도비
ㅇ우복정경세 신도비
최희량장군 신도비
도잠서원 조호익 신도비각
첫댓글 저의13대조 무숙공 최희량장군 신도비를 소개 해주셔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