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헌 정태수의 서예이야기 32
팔대산인, 시대를 건너온 불멸의 묵향
주 답(朱耷, 1626년~1705년)은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에 활동한 서화가로, 본명은 통금(統鐢), 자는 인암(刃庵)이며, 팔대산인(八大山人), 여한(驢漢), 설개(雪个), 인옥(人屋) 등의 호를 사용했는데 흔히 팔대산인으로 불린다. 강서성 남창 출신으로, 명 태조 주원장의 17남인 주권의 9대손이자 ‘청초사승(清初四僧)’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명말청초를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시, 서, 화, 전각을 결합한 예술 창작에 매진했다. 시(詩)는 격조가 기괴하고 난해하며, 신비로움과 풍자적인 색채가 강했다. 서(書)는 왕희지, 왕헌지, 안진경 등의 서체를 바탕으로, 닳은 붓(禿筆)을 사용하여 오만하면서도 굴하지 않는 기개와 유려하고 굳건한 정신을 표현했다. 화(畵)는 가장 명성이 높았다. 화조화는 수묵 문인화를 중심으로 형상을 과장되고 기이하게 표현했으며, 산수화는 동기창을 사승하여 필치가 간결하고 고요한 멋이 있다.
주답은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보였는데 8세에 시를 짓고 11세에 산수화를 그렸으며, 팔을 들고 행서를 쓸 정도로 서예에도 능했다. 16세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수재가 되었으나, 18세(1644년) 때 명나라가 멸망하자 박해를 피하기 위해 귀머거리와 벙어리 행세를 하며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22세 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전계(傳綮)라는 법명을 얻었다. 26세에 계를 받아 종사가 되었고, 산에 머물며 경전을 강설했다. 말년에 남창으로 돌아와 도관인 천녕관(天寧觀)의 주지가 되었으며, 이를 개축하여 청운보(青雲譜)라 이름 붙였다. 이후 39세에 주지직을 넘겨주고 ‘오가초당(寤歌草堂)’을 지어 머물며 전국을 유람하고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79세(1705년)를 일기로 험난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서예 변천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구양수, 동기창, 황정견의 서법을 본받아서 필치가 가늘고 힘이 있으며 정갈하지만, 미숙한 기운이 남아 있다. 중기는 황정견의 스타일로 전환한 시기이다. 글자 결구가 활달하고 역동적이며, 긴 획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말기(69세 이후)는 안진경의 서체를 바탕으로 끝이 뭉툭한 붓을 주로 사용했다. 붓을 누르고 드는 제안(提按)을 절제하고, 전서의 필법을 행서와 초서에 접목했다. 선은 둥글고 공간이 시원한 장법으로 글씨와 인격이 완숙해지는 인서구로(人書俱老)의 경지에 도달했다.
당시의 사치유(謝稚柳)는 주답의 서예에 대해 “닳아빠진 붓을 잘 사용하여 풍모가 고르면서 수려하고 굳세다. 뾰족한 필봉으로 표현할 수 없는 특수한 정취를 표현함으로써 서예의 필세에서 아직까지 없었던 정취를 개척했다”라고 평했다.
대표작인 ‘행서 난정서 축’은 원문을 그대로 베껴 쓰지 않고 문구를 줄이거나 수정했는데 이는 창작 주체의 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읽힌다. 낙관의 ‘팔대산인(八大山人)’네 글자를 연이어 쓰면 그 모양이 ‘울다가 웃는 듯(哭之笑之)’이 보이는데, 이는 나라를 잃은 슬픔과 복잡한 심경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살펴진다.
주답의 서예는 ‘간결함(簡), 둥글음(圓), 깔깔함(澀), 험준함(險)’이 특징이다. 전서와 주문의 필법을 유민(遺民)의 심경과 융합하여, 고고하고 차가우면서도 중후하고 견실한 독특한 서풍을 형성했다. 이는 명·청 교체기 문인 서예의 정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서예 못지않게 화조화와 수묵 사의화로 큰 명성을 얻은 주답은 ‘공작도(孔雀圖)’, ‘양류욕금도(楊柳浴禽圖)’, ‘하화수조도(荷花水鳥圖)’ 등으로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하여 후세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한국의 서화가들도 붓질은 덜어내어 절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예술적 의도나 정취는 매우 풍부하여 보는 즉시 빠져들게 만드는 3백 여 년 전 팔대산인의 작품을 즐겨 임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