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대명천지에
왜 이렇게도 이단이 많은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단의 그물과 함정은......
복음 전도와 선교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사이비와 이단의 숙주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로 착각할 정도로 혼란을 야기시켰습니다.
성경의 그 말씀은 진리의 복음, 그 자체인데
어찌하여 사이비와 이단이 기독교의 정체성이 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청정한 진리의 복음은 선포된 말씀으로 들을 수 없고
거짓된 다른 복음은 장강의 대하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바다가 넓어도 적조 현상에 양식 고기가 폐사를 하고....
오염된 물이 썩어 녹조 현상으로 그 강에 살지 못하여 물고기가 떠죽음을 당하는
바로 그 물을 수돗물의 식수로 사용합니다.
물과 공기와 토양의 오염은
문명이 낳은 부작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청정한 복음의 오염은
사이비와 이단의 숙주가 되어 진리의 빛을 어둡게 하였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주 믿는 성도의 깊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자기 방어의 능력이 없는 교인은
사이비와 이단의 늪에 너무나 쉽게 빠져듭니다.
안티 기독교는
사이비와 이단에 대한 유혹에 아주 강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안티의 경계가 없는 소자의 믿음을 가진 교인은
사이비와 이단을 만나 광신도가 되고 열정적인 이단의 추종자가 됩니다.
막연하고 밋밋한 설교를 듣다가
깨 쏟아지는 다른 복음의 감칠 맛을 들이면 열정의 광신도와 이단이 됩니다.
감칠 맛을 내는 인공 조미료에 길들여지면.....
라면을 하늘이 내린 먹거리라고 탄성합니다.
강력한 영성의 터치.....
그 한방에 영성의 마니아가 되었습니다.
맛깔스런 진리의 터치.....
그 한 방에 복음의 지계석을 옮겼습니다.
진리의 복음에 굳건하지 않는 어중이떠중이 교인을 숙주로 삼는 사이비와 이단의 사설은
열정의 광신도와 이단 추종자의 좀비를 양산하였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다는 말은
사이비와 이단에게 적용되는 워딩입니다.
찾으나 찾을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예레미야의 갈증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미션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하였습니다.(렘5:1)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어진 유다와 예루살렘을 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미션.......
○○○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그 넓은 거리에서
공의를 구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지 못하였고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는 말씀의 심판을 받았습니다.(렘5:14)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며
종말론적인 탄식을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길, 하나님의 법을 왜곡하고 날조한 이스라엘은
하나같이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거울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구속사적인 이해는
옛 언약의 새 언약 성취라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통전적인 신앙으로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속사에 대한 객기는
결국 구속사의 알레고리와 메타포에 빠져 디른 복음이 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구속사의 근간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올바른 성경 이해를 하게 하였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예표와 모형, 그리고 묵시는
구약의 여호와 신앙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적 복음 신앙으로 계승하였습니다.
성경의 구속사적 이해는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을 성취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대한 언
약적 복음 신앙을 갖게 하였습니다.
성경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구속사적 언약 신앙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속사의 남용.......
구약 성경의 그 모든 사건과 지명과 문자에 스며 있는 구속사적 계시의 해석은
구속사의 알레고리와 메타포에 빠져 구속사적 이단을 낳았습니다.
구속사를 말하면 개혁주의 정통 신앙이 되어야 하는데
구속사적 알레고리 영해라는 이단의 블렉홀에 빠졌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문자에 계시된 구속사적 비밀을 해석하는 믿음의 아버지.......
다시 해석하는 계시의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구원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그 추종하는 세력은 이단의 늪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이비와 이단의 덫과 함정은
진리의 복음에 깨어있지 않으면 누구라도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성경의 올바른 이해......
그 어디에서 읽고 들을 수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공허와 혼돈은
사이비와 이단의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미 기독교는 이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혼합한 말씀의 공허와 혼돈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누군가는 헐벗고 굶주려도.....
성경을 올바르고 깊이 연구하는 사도 바울의 후계자가 있어야 합니다.
바른 진리의 말씀으로 화답하는 신앙의 터는
예수님의 탄식이 서린 종말론적인 바로 그 믿음을 갖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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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록된 모든 문자에 계시된 구속사적 비밀을 해석하는
믿음의 아버지.....그는 누구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복음과 구원의 말씀에 대한 저작권은 오직 보혜사 성령이요,
선포된 말씀에 대한 계시적 권한은 성령의 고유한 주권, 그 자체입니다.
성령의 고유한 권한을 대신하는 소위 말하는 믿음의 아버지,
마지막 때 쓰시는 보혜사, 방언으로 계시된 성경을 다시 해석하여 계시하는 종말론적인 목자 등
모두 이단의 블렉홀을 가졌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에 대한 철저한 경계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믿음의 길을 걷게 할 것입니다.